119화
팔불출 눈도 가끔은 믿을 만하다.
레너드는 가볍게 생각을 바꾸었다. 유연한 사고는 현명한 군주의 미덕이므로 그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꽤 예쁘잖아?’
솔직한 감상이었다.
비록 루크처럼 ‘지상에 내려온 천사였다’거나 ‘후광이 비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보기만 해도 서고 생각만 해도 싼다’는 과장스러운 감상은 내놓을 수 없었지만, 그와 달리 레너드의 미의식은 지극히 정상이었으므로 오히려 점수가 높은 셈이었다. 게다가 그는 본인의 외모에 자부심이 있는 만큼 기준도 높았다.
스테이턴 공작부인이 앉은 자리는 황족 다음가는 대귀족을 위해 마련된 좌석이었다. 평소 근위대의 연무장으로 쓰이던 검술대회 경기장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다. 다소의 거리는 있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덕에 관찰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매끄러운 금발을 촘촘하게 땋아 손질해 틀어올린 덕분에 흰 피부와 긴 목이 돋보였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기는 했지만 조용히 웃는 얼굴이 예뻐서 눈을 사로잡았다. 저렇게 예뻤는데 왜 이제까지 화제가 되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런 생각한 사람이 비단 레너드 한 사람만은 아닌 듯, 그녀를 흘긋거리는 신사들이 꽤 많았다. 그나마 그녀 주변을 둘러싼 부인들이 따갑게 노려보아 금세 눈길을 돌렸지만.
‘이런, 들켰나?’
브릿 후작 부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레너드는 짐짓 예의 바른 미소로 그녀의 경계 어린 눈길을 흘려보냈다.
‘협력을 구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저 깐깐한 부인의 마음까지 얻었을 줄이야.’
그 앤더슨(죄책감을 자극해서 잘해주고 싶은 친구)이 귀여워 죽는 여동생이자 그 루크(일방적인 라이벌이자 지고 싶지 않은 남자)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부인, 거기에 그 브릿 후작 부인(사교계에서 깐깐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독설가이자 황제에게도 직설할 수 있는 혈통의 귀부인)의 피후견인…….
잠깐….
‘이거…… 잘못 건드리면 그냥 끝 아냐?’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에 빠진 남편만이 아니라 막강한 보호자들까지 붙었다.
길을 잘못 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레너드는 섣부르게 여동생과 아버지에게 협력하지 않은 제 처신을 칭찬했다. 역시 나는 황제가 될 남자다. 운이 따라준다.
나디아 마샤 스테이턴.
최근 레너드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그녀를 보는 건 고작 세 번째였다. 결혼식 때와 경황이 없던 밤? 어느 쪽도 인사를 나눌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숱하게 들었던 이름에 비해 아직 인사도 나누어보지 못한 사이다. 그에 유감은 없었지만,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루크가 들으면 질색하겠지.’
얼마나 질색할지 기대가 차올랐다. 당장 짐을 싸서 영지에 틀어박힐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바빠도 직접 공작령으로 행차해 괴롭혀주어야지, 다짐했다. 앤더슨을 데리고 가도 좋을 것이다. 아, 어쩌지.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저 여자가 그…….”
셀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레너드는 부풀었던 망상에서 빠져나와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혈연의 정으로 충고하건대.”
“혈연의 정 같은 거 느껴본 적도 없으시면서.”
입을 떼기 무섭게 정곡을 찔렸다. 레너드는 피식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을까? 쓸데없는 짓을 해서 황실에 민폐를 끼치진 말라고 말이야.”
“저도 황실의 일원이에요. 결코 민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셀리아는 차갑게 대꾸했다. 확실히 그녀는 이제껏 영리하게 잘 처신해왔다. 레너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네게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닫지 못했나?”
“글쎄요. 제 눈에는 구슬리기 쉬운 초식동물 한 마리만 보이는데….”
셀리아는 비뚤게 입꼬리를 당기며 턱을 치켜들었다. 긴 속눈썹 아래의 눈빛이 어스름하다. 레너드는 그녀가 루크에게 거절당하고 난 후에 늘어놓았던 하소연을 떠올렸다.
물러날 곳이 없다던.
과연, 귀를 기울이면 웅성거리는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검술 대회가 개막을 앞두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야수 공작의 전 연인과 현 부인의 대치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확실히, 곧 타국으로 시집갈 황녀에게 달라붙을 소문으로는 질이 좋지 않았다.
셀리아는 신경쓰지 않는 듯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타인의 눈길 속에서 살아온 만큼 숨어있는 흥미를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흥미의 무서운 점은 그 대상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신이라도 되는 양 찬양하다가도 흠을 발견하는 순간 무섭게 헐뜯고, 무너질수록 열광한다.
자업자득이지. 레너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 초식동물 주위를 둘러싼 맹수는 안 보이나?”
“…보여요…. 보이니까 이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는 거잖아요….”
셀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러니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지….’
브릿 후작 부인이 저리 날을 세우고 지키는데.
브릿 후작 부인은 사교계에서 손에 꼽히는 인기인일 뿐만 아니라 황제, 황후와도 친분이 있어 어릴 적부터 자주 교류해왔다. 그럼에도 그녀와는 그다지 친분을 쌓을 수가 없었다. 서로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셀리아는 이제껏 브릿 후작 부인이 스테이턴 공작가와 친밀하기 때문에, 공작을 대놓고 무시했던 자신을 싫어하는 거라 생각했다.
달리 자신을 싫어할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저 여자가 그 루크(미추를 구분하지 못하는 고자이자 미친놈)의 부인이란 말이지. 그 남자가 정절을 지키려는 이유….’
감히 황태자와 황녀보다 시선을 모으고 있는 무리의 중심에서 스테이턴 공작부인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행복에 겨운 그 얼굴이 아니꼬웠다. 행복할 만도 할 것이다. 편히 앉아서, 브릿 후작 부인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만 건네면 될 테니까 얼마나 편하고 좋겠는가?
‘인생 편해서 좋겠네. 평생을 보호만 받고 살아왔을 테지. 사랑만 받으면서….’
누구에게도 상처받는 일 없이, 행복하게만 살아왔기 때문에 저리도 해맑을 수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사랑만 받으며 살았으면, 별 볼 일 없는 남작가가 막내딸을 과보호한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났을까. 그나마 강압적인 결혼이 그녀의 인생 최초의 불행이었겠으나 그나마도 뚜껑을 열어보니 행운이지 않았나. 결국 좋은 일밖에 없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누구는 국익을 위해 팔려가는 신세인데. 아는 이 없는 타국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는데.’
유혹하는 미녀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남편까지 가지다니.
‘안 부러워! 화나는 거야! 남편이나 부인이나 둘 다 짜증나!’
셀리아도 현실을 안다. 이혼을 시키더라도 자신은 몰브티 왕국으로 시집을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야수 공작에게 차인 황녀”가 되어 몰브티 왕국에 시집가게 된다. 갈 때 가더라도 그 모욕은 참을 수 없지, 없고 말고. 결혼은 못하더라도 반드시 이혼을 시켜서, “황녀를 잊으려고 결혼했다가 결국 잊지 못하고 이혼한 야수 공작”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셀리아는 “야수 공작도 푹 빠진 미모의 황녀”가 될 수 있었다. 그 정도라면 있지도 않았던 연애담이 생기는 대가로는 적당했다.
‘좋아, 가볼까.’
미간에 주름이 깊이 패지 않도록 주의하며 셀리아는 눈을 감았다 떴다.
*
“우와….”
헙.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탄성에 깜짝 놀라 나디아는 급히 입을 닫았다. 브릿 후작 부인의 따가운 눈초리가 뺨으로 쏟아졌다.
‘잘하고 있었는데!’
손으로 입을 틀어막지 않은 것만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이 놀라고 말았다는 걸 숨길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세상에, 어떻게 사람이….’
평생 알아왔던 ‘사람’의 정의가 흐려지는 것만 같았다. 만약 이곳이 라 트에빌레의 무술 대회 관람석이 아니고, 주변에 일리야와 안나, 브릿 후작 부인이 없었더라면 나디아는 입을 벌리고 넋을 놓았을지도 몰랐다.
‘천사 아닐까? 사람이 맞을까? 모드리야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더니 사실이었어.’
단순히 미인이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셀리아 황녀는 나디아가 이제까지 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아름다웠다. 달콤하게 흘러내리는 금발은 마치 황금으로 뽑은 실타래 같았고, 보석을 박아놓은 듯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는 신비로웠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는 생크림 같고, 모양 좋은 입술은 같은 여자인 나디아가 보아도 탐스럽고 유혹적이었다.
‘여신 같아….’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쥐었다. 이대로 믿으라고 명령한다면 믿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신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황홀하게 바라보던 나디아는 불경하게도 여신의 말을 놓치고 말았다. 일리야가 넋을 놓은 여동생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네? 지금 뭐라고?.”
“……제 목소리가 작았나 봐요, 공작부인.”
“아니오, 아닙니다. 잠시 딴 생각을?.”
대놓고 널 세워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실례일 것이다. 나디아는 솔직하게 이유를 털어놓아도 될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간의 훈련으로 인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큼은 태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안나는 언제나와 같이 담담한 무표정이었다. 눈을 마주치면 웃어주기만 해서 옳은 판단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떤 사고를 쳐도 사고라 말하지 않고 수습하며 편을 들어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리야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사람은 브릿 후작 부인뿐이다. 그러나 브릿 후작 부인은 도통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냉랭한 무표정은 아니고, 그저 조금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다….
‘괜찮겠지? 대놓고 딴 생각을 했다는 것보다는 낫겠지?’
셀리아 황녀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미는 듯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절 앞에 두고 딴 생각을,”
“아름다우셔서요….”
“뭐?”
여신에게 미움을 받기는 싫었다. 나디아는 제 진심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았다.
“너무 아름다우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