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19.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었다.
오늘은 브릿 후작저에 가지 않고 아침부터 준비로 바빴다. 안나는 이 날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웬만한 의상실 뺨치는 드레스를 준비해두어 나디아는 시작부터 조금 기가 죽었다. 스테이턴 공작가의 재력이 옷 몇 벌에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저 목걸이에 박힌 보석, 진짜겠지. 가짜일 가능성은… 없겠지….’
보석처럼 보이는 유리 세공품이었다면,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을지도 모른다. 제 손바닥보다도 더 큰 보석함이 몇 개인지는 세어보지도 못했다. 흠집을 내거나 잃어버리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옷 몇 벌로는 흔들리지 않을 재력이라도 장신구가 이만큼 모이면 흔들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잘해야지. 잘 해내야지. 도와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루크에게 부끄럽지 않게…….’
심장이 너무 뛰어서 이러다 멈추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나디아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려 애쓰며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손바닥이 벌써 축축해졌다. 잔뜩 얼어붙은 그녀를 보고 마리아와 일리야가 피식 웃었다.
“어깨가 굳었어, 나디아.”
“아. 으으….”
“벌써 긴장한 거니?”
“그러지 않으려고는 하는데 자꾸…… 우, 웃지 마세요.”
“어머. 딸이 예뻐서 흐뭇해하는 것뿐이야.”
그러나 휘어진 눈매에는 장난기로 그득했다. 나디아는 제 귀밑머리를 정리해주는 마리아를 잠시 원망스레 쳐다보았으나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뿐더러,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짓궂게 구는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일리야가 말했다.
“브릿 후작부인께는 정말 감사해야겠구나, 나디아. 나쁜 버릇이 많이 없어져서 그런지 자세가 아주 예뻐졌어.”
“고마워….”
나디아에게는 언제나 칭찬이 헤픈 일리야와 마리아였지만, 이번만큼은 과장 없는 진심이었다. 특히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이 매우 깨끗해져서 저절로 시선이 갔다.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펴는 것만으로 차이가 컸다.
애초에 이목구비는 어른스러운 편이었다. 자세가 달라지니 그동안 어린애 같은 표정과 이미지에 묻혀있던 장점이 확연히 드러났다. 표정이 아직 딱딱하기는 했지만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생겼다. 마리아와 일리야는 어린애처럼 허물어지는 표정도 무척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혈육의 정을 떼고 따져보면 썩 보기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울상을 지어도 어린애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랜 습관을 고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단시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디아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낮엔 검술 대회를 관람하는 것뿐이야. 나와 안나, 브릿 후작부인께서도 네 곁에 있어줄 거고. 그렇죠, 안나?”
“예. 그러니 염려하지 마세요, 부인.”
안나는 늠름하게 웃었다. 나디아는 안나의 손을 잡으며 그녀에게 머리를 기댔다. 최근 바빠서 루크만큼이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존재만으로 나디아에게 큰 힘이 되었다. 혼나는 건 무섭지만 그녀가 제 편이라는 건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든든해요.”
“혹시 누가 괴롭히거든 저에게 말씀만 해주세요.”
“대신 복수해주려고요?”
물론 어리광이 섞인 농담이었다. 그러나 안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혼쭐을 내주어야죠. 자신이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농담이죠?”
“농담 같나요?”
아니요…. 나디아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아하하 웃어 버렸다. 혹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마리아와 일리야는 긴장을 풀기는커녕 더욱 어색해진 나디아의 얼굴을 보며 크게 웃었다.
“안나, 농담이 통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러게요. 안타깝네요.”
제이나 루크, 스테이턴 성에서 온 시녀들이 있었다면 안나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는 랭커스터뿐이었다. 안나는 우아하게 웃으며 속내를 감추었다.
일리야가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미리 라 트에빌레에 참여해볼 걸 그랬지. 언제였더라. 레이나가 너와 함께 가겠다는 걸 말린 적이 있었잖아.”
“아, 으응….”
“레이나도 여기 있었다면 널 무척 부러워했을 거야. 피오나가 저도 데려가라며 어젯밤 내내 날 괴롭혔던 것처럼.”
나디아는 자신이 제대로 웃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직 레이나의 이름은 가슴이 아프다. 명랑하고 쾌활하며, 자신과 달리 친구가 많았던 레이나가 자신을 부러워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라 트에빌레에 가고 싶어 했을 거라는 것만은 알았다. 레이나도 부모님이 허락해주지 않아 라 트에빌레에는 한 번도 참여해보지 못했고, 그것을 무척 불만스러워했다.
레이나와는 두 번 다시 연락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녀가 결혼한 후로 두어 번 편지를 보내봤지만 답장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제임스와는 아직 친구였고, 가족들끼리도 오래 알았다. 자신 때문에 모두가 어색해질 필요는 없었다. 나디아는 화제를 돌렸다.
“루크는 황궁으로 바로 오나요?”
황실이 준 임무에서는 해방되었지만 루크는 여전히 바빴다. 새벽 일찍 나가서는 그녀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귀가했다. 저녁식사는 함께 했지만 무슨 일로 바쁜 건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나디아는 그가 흑곰 기사단의 일로 바쁜 거라고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제이가 새벽 훈련이 힘들다고 툴툴거리는 소리를 몇 번 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무리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나디아는 그가 힘들어도 힘들다하지 않는 것이 조금 불만이었다.
“아니요, 부인. 그럴 리가요. 무술 대회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돌아오신다고 하셨어요.”
“예? 여기로요?”
“그럼요. 랭커스터 저택으로 돌아오시기로 하셨답니다.”
“하지만 우린 지금 나가는데….”
돌아와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으셔야죠.”
“예?!”
새벽부터 오전 10시까지 치장만 했던 나디아가 억눌린 비명을 삼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듬느라 쓴 시간이 다 얼마인가. 그녀는 당연히 이 복장으로 하루는 버텨야 할 거라 생각했다. 무술 대회의 관람은 고작해야 서너 시간. 고작 서너 시간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그 고생을 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이게 야외 활동을 위한 준비였으면 본격적인 무도회 준비는 어떻게 돼…?’
그리고 또 얼마나 호화로울까. 안나는 저를 쳐다보는 나디아의 애처로운 눈길을 태연히 받아넘기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부인. 제가 다 준비해놨답니다.”
“……네에….”
“라 트에빌레에서는 부인이 가장 빛날 거예요. 제게 맡겨주세요.”
믿어요, 안나. 믿고말고요. 안나의 미소는 이번에도 늠름했지만, 나디아는 도저히 함께 웃을 수 없었다.
역시 체력을 길러놔야 했다.
*
“아름다우세요, 전하.”
“세상에,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
셀리아는 쏟아지는 찬사를 당연하게 받아넘겼다. 스스로 보아도 제 미모는 완벽했다. 라 트에빌레를 위해 특히 공을 들여 가꾸었으니 더욱 빛이 났다. 그녀는 거울 속 제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하루 종일 보아도 질리지 않는 미모란 바로 이 얼굴을 말하는 거겠지. 흐뭇하게 웃는 그녀의 귓전에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니 그게 진짜인 줄 알 수밖에.”
“오라버니,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오셨어요.”
“시비라니. 네 에스코트를 위해 온 것 아니냐.”
“……밤의 무도회라면 몰라도 낮까지 에스코트라니요. 지나쳐요.”
셀리아가 손짓해 시녀들을 물렸다.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겠지만 굳이 껄끄러운 이야기를 들려줄 이유도 없었다. 레너드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녀들의 뒷모습에 눈길을 주다 셀리아를 보았다. 셀리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레너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세요. 언제부터 제 에스코트를 신경쓰셨다고….”
“곧 시집갈 여동생과 보내는 마지막 라 트에빌레 아니겠니. 오라비로서 신경을 써야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감시라도 하실 참이에요?”
“오, 눈치는 있구나.”
레너드가 히죽거리며 느리게 박수를 쳤다.
“……도대체 뭐예요? 제가 뭘 했다고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요. 무얼 할 기회도 없었고요.”
“이제부터 할 거잖아.”
“그야?.”
그럴 생각이었다.
스테이턴 공작부인은 외부 활동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셀리아는 미리 그녀에게 접근해보려고 갖은 수를 써봤지만, 도무지 접근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혼 전까지 수도에서 태어나 자랐다는데도 나디아에게는 친구가 없었고, 그나마 친하게 지냈다던 여인은 이미 결혼해 수도를 떠났다. 소꿉친구라는 남자는 브릿 후작 부인의 거처를 드나들어 오히려 접근하기 껄끄러웠다.
‘미친 거 아냐? 무슨 경호를 감시 수준으로 해.’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진정 미친놈이 틀림없다. 셀리아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고자일 뿐만 아니라 미친놈이라고 말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고작 부인의 경호를 그 지경으로 하지는 않을 테니까. 단언컨대 나디아의 호위에 배치된 흑곰 기사단의 전력은 암살 위협을 받던 황녀 호위보다 훨씬 철저했다. 브릿 후작 부인의 저택을 드나들던 제임스 밀리언에게도 감시가 따라붙었다.
스테이턴 공작부인에게 접촉할 수가 없었으니 남은 기회는 공식적인 자리뿐이었다. 셀리아는 가장 아름답게 치장해 공작부인의 기를 확 죽여놓을 참이었다. 그리고 가시를 숨긴 말 몇 마디, 압박, 필요하다면 눈물이라도 써서 공작부인이 스스로 이혼하겠다는 말을 하고야 만들 것이었다.
“별 거 안 할 거예요. 말 몇 마디 할 뿐이라고요.”
“그걸 내가 듣겠다는 거야.”
“……대체 왜 이러세요. 오라버니는 원래 루크를 싫어했잖아요?”
“잘 보여야 할 사람은 루크만이 아니거든.”
루크를 싫어했다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이지만, 근본적인 감정은 싫어하는 것에 가까웠다. 더 정확히는 질투였다.
레너드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팔을 내밀었다.
“자, 갈까.”
앤더슨이 그렇게 예뻐하는 여동생, 루크가 첫눈에 반한 천사….
공교롭게도 레너드는 이제까지 나디아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다. 오늘에야말로 말로만 듣던 사람을 직접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당사자에 대한 기대감은 미적지근했다. 별로 궁금하지는 않다.
‘자고로 팔불출 눈은 믿을 게 못 되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