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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17화 (117/150)

117화

*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나디아는 눈을 반짝 떴다. 잠결에 들린 소리는 인기척이라고 할 만한 것조차 아니었지만 잠을 몰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채 뜨기 전이라 창 밖의 하늘은 아직 어두컴컴했다.

“이런, 깨운 거요?”

“…다행이다…. 벌써 가버린 줄 알았어요.”

루크였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자 나디아의 몸이 그에게로 기울었다. 나디아는 굳이 버티려하지 않고, 몸이 기우는 대로 그에게 기댔다. 나갈 채비를 마친 그의 셔츠는 조금 빳빳하고 차가웠다. 그에게 묻은 바깥 바람 냄새가 기분 좋아서, 그녀는 뺨을 기대어 어리광을 부렸다. 머리 위에서 그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루크는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아주지는 않았다. 단단한 가슴에 기대어 나른한 잠의 여운을 즐기던 나디아는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루크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난감한 듯 웃으며 말했다.

“손이 차가워서.”

“괜찮은데….”

“잠이 깨버리잖소. 당신은 더 자도록 해. 아직 해도 뜨지 않았소.”

기대어 안긴 나디아를 안아주는 대신, 루크는 흘러내린 이불을 조금 더 끌어올려 드러난 어깨를 덮어 주었다. 겨울 새벽의 공기가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와 실내라고 해도 방심할 수 없었다. 옷을 껴입고 있으면 모를까, 알몸으로는 더더욱.

나디아는 제 어깨를 스친 루크의 손을 불만스레 쳐다보다 먼저 손을 뻗었다. 루크가 손을 위로 올려 피하려 했지만, 그의 몸을 타고 오르듯 기대어 뻗은 통에 피할 수 없었다. 크게 움직였다가는 나디아가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루크의 손은 커다랗고 딱딱했으며, 손바닥은 생각보다 부드럽고, 그의 말처럼 차가웠다. 나디아는 그의 손바닥에 뺨을 묻었다. 기분 좋았다. 잠이 깨기는커녕 이대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만족스럽게 늘어진 그녀의 입술을 본 루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나디아는 고개를 조금 돌려 그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또 몰래 나가려고 했죠?”

“들키고 말았지만 말이오.”

“너무해.”

부루퉁하게 내민 입술에 키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크가 입술을 붙인 채 변명했다.

“당신까지 새벽에 일어날 필요는 없소. 잠든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소. 아직 피곤하지?”

“그야….”

나디아는 슬쩍 시선을 내렸다. 그가 남긴 자국이 선명하게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기절하듯 잠든 후 그가 깨끗하게 닦아 주어 물기 없이 산뜻했지만 그의 말처럼 피로감이 이끼처럼 눅진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실제로 잠든 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

“루크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건….”

“나는 체력이 좋으니까.”

“……나도 단련할 거예요.”

“무리하지 않는 선이라면, 좋지.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오. 자도록 해, 나디아.”

루크는 둥근 이마에 아쉬운 듯이 입을 맞추었다. 나디아는 순순히 그의 말을 듣는 대신 팔로 그의 허리를 꽉 안았다. 언뜻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신음이 들린 것 같았지만 루크는 잠시 굳었다가, 이내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다녀오겠소. 당신이 브릿 저에 가기 전까지 돌아올 거요.”

“네.”

루크는 잠기운이 묻은 나디아의 얼굴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가슴 안쪽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배 깊은 곳에서 뜨뜻한 물이 퍼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디아를 보고 있노라면 종종 이랬다. 대화를 나누다가, 간식을 나눠 먹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치솟는 감정은 물렁하고 뜨뜻하다. 뜨겁거나 빠르지 않았지만 그의 몸 전체를 지배했다.

루크는 숨과 함께 감정을 삼켰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키스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영원히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다.

“잘 다녀와요. 이따 봐요.”

나디아가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일어나려 하는 것은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였다. 루크는 그녀가 웃어 주기만 한다면 기름을 바르고 불 속에 뛰어들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녀오라고 했으니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와야만 하겠지.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기척을 내지 않고 떠날 수도 있었다. 침실에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떠났다면 나디아는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나디아의 자는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 떠나는 건, 검 없이 전쟁에 나가는 행위와 같았다. 루크는 금세 잠이 든 나디아를 확인하고는 방을 나섰다.

“나오셨습니까?”

침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짓궂게 웃고 있었다.

“밖에 나가 기다리라니까.”

“춥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던 거였다. 루크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서 떠드는 소리는 침실 안까지 들릴지 모른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후에야 루크가 입을 열었다.

“안나는 스테이턴 저에 가 있나?”

“예. 어제부터. 근처 상가를 모조리 쓸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일부터 라 트에빌레가 시작된다. 안나는 건강을 회복한 마리아, 일리야와 함께 쇼핑에 빠져 있었다. 라 트에빌레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날부터 준비를 해 오고 있었지만, 막바지를 앞두니 정신없이 바쁜 모양이었다. 드레스는 일찌감치 치수를 재어서 주문 제작에 들어간 덕분에 거의 완성이 되었지만, 그 외에도 준비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어머님과 누님도 라 트에빌레에 참여하신다던가?”

“일리야 님만 참여하신다고 합니다. 마리아 님은 아직 회복 중이시라 외부 활동은 자제하시는 편이 좋다고 안나가 말렸다고 하더군요.”

“그럼 오늘은 안나가 브릿 저에 가진 않겠군?”

“네.”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에 맞춰야겠는데….”

루크가 검지로 턱을 쓸었다. 곤란하다는 듯 말하는 내용에 비해 자신만만하게 웃는 낯짝이었다. 제이는 코웃음을 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공손한 척 말했다.

“곤란하시다면 예선에는 대타를 보내겠습니다.”

“아니, 그럴 수야 없지. 신분도 빌리고 있는데 거기까지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제부터 양심을 챙기셨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지 않으면 선물은 의미가 없다.”

그러지 않으면 나디아에게 그 꽃은 바칠 수 없다. 사죄와 감사와…… 고백을 더해야 하니까.

처음부터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게 싫다고 말할 것이지. 제이는 아니꼬운 눈길로 주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루크는 흑곰 기사단원의 이름을 빌려 예선에 참여했다.

‘라 트에빌레’의 검술 대회는 황궁에서 열리는 축제이니만큼 일반인의 참여는 금지되어 있었다. 귀족과 기사만 참여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스테이턴 공작의 이름으로 참여했다가는 큰 소란이 일 것이었다. 그리고 쓸데없는 주목을 끌어버리고 만다.

“흑곰 기사단이라는 것만으로도 근위대에서는 항의가 나오는 모양이더군.”

“누군가 시비를 걸었습니까?”

“뭐. 귀여운 수준이었다.”

루크는 비식 웃었다.

근위대와 흑곰 기사단의 악연은 아주 오래되었다. 흑곰 기사단은 걸려오는 시비를 받아주었을 뿐이라고 말은 하지만, 수도에서 와 거들먹거리는 곱게 자란 것들을 작정하고 놀려먹은 건 사실이었다. 몇 명은 순순하게 실력 차이를 인정했지만 몇 명은 이를 갈며 싫어했다.

루크가 스테이턴 공작으로 참여했다면 시비를 걸지 않았겠지만, 흑곰 기사단원 이름으로, 그것도 혼자 참여했으니? 비아냥거림 한두 마디 듣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기왕 덤비는 것, 작정하고 덤볐다면 재미있었을 텐데 말이다.”

“많은 걸 바라지 마십쇼. 보통은 저희 만한 맷집이 없습니다.”

“근성이 없어.”

“그러니 새벽마다 저희가 상대해드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괜히 난동을 피워 일을 크게 만들지 마십쇼. 수습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래…. 이름을 빌려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루크는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한 번 나가보라고 사방팔방에서 바랐을 때는 쳐다도 보지 않으시더니….’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으므로, 꼭 한 번 참여해 우승을 거머쥐기를 제이도 몇 번은 간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루크는 뭐라고 했었나.

어릿광대도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 검을 들고 춤을 추는 취미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루크는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닌,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검술은 겨루어보았자 의미가 없다는 주의였다. 실제 전쟁에서는 실력이 아니라 임기응변과 운에 의해 생사가 갈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그에게 검술 대회는 의미가 없을 만했다.

‘하여간 부인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으시지.’

새삼 돌이켜보면 루크가 나디아를 위해 했던 행동들은 그가 ‘절대’ 하지 않았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결혼하라 그리 잔소리를 했어도 28세가 되도록 버티다 나디아를 만나자마자 결혼을 해버리질 않나, 황실에 밉보이니 싫어도 일 년에 두어 달은 수도에서 지내달라 말해도 귀찮고 성가시다며 무시로 일관하더니 자진해 머무르고 있다. 거기에 검술 대회까지….

‘뭐, 좋은 일이지.’

고작 검술 대회다. 루크의 상대가 될 만한 실력자는 없었다. 제이는 루크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가 모시는 주인이라 그런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괴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선대가 남긴 땅에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으려던 짐승이, 이유가 무엇이든 스스로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얼마 남지 않았다. 제이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제가 모시는 주인이 얼마나 대단한지, 라 먼스트로드의 모두가 알게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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