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정말 남겨두고 가도 괜찮습니까……?”
“문제없습니다. 이 근방은 잘 압니다.”
루크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씩 웃는 얼굴은 자신감만큼 위엄도 넘쳐 흘렀지만 앤더슨은 여전히 불안했다. 어째서 이렇게 미덥지 못할까…….
‘나디아에게 걱정이 옮은 걸까.’
28세는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었고, 그의 과거는 앤더슨 자신보다 훨씬 험난하고 다사다난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 작위를 이어받아 제국의 대공작으로 인정받은 남자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텐데도 어쩐지 안심이 되질 않았다.
레너드가 말했다.
“그리 걱정할 것 없네. 정 불안하다면 호위를 붙여 돌려보내지.”
“필요 없습니다만.”
“사양할 것 없네. 자네가 길을 잃고 미아가 될까 걱정하는 앤더슨을 위해서이니.”
“이 근방은 잘 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애초에 길을 잃을까 걱정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닌가. 앤더슨은 루크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부분에서 불안을 느꼈다. 모든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했으므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 사람들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뭐든지 할 수 있는 입장과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합쳐지면 이렇게 무서운 결과물이 나오고 만다.
칭찬인 것 같지만 칭찬할 의도는 아니었다. 앤더슨은 지친 눈으로 말다툼을 하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세련된 레너드와 야성적이고 거친 루크는 일견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뿌리는 엇비슷했다. 성격보다는 성질일까. 겉모습만이 아니라 성격도 이리 다른데 성질이 비슷하다는 것은 참으로 기묘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면서도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거겠지……. 앤더슨은 혼자 납득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오셔야 합니다.”
“예, 형님.”
“딴 길로 새지 말고, 누가 시비를 걸어도 싸우지 말고, 따라가도….”
“……형님, 전 어린애가 아닙니다만.”
앤더슨은 오히려 펠릭스에게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린애에게도 하지 않는 잔소리가 커다란 루크에게는 줄줄 흘러나왔다.
“어린애 취급을 할 생각은 아니지만, 걱정이 되어서요.”
“…….”
솔직한 직설은 랭커스터 가의 특기인 걸까. 루크는 말문이 턱 막혀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그를 보고 레너드가 히죽 웃었다.
“형님이 걱정해주어 기쁜가 보군?”
“……조용히 하시죠….”
“앤더슨, 루크는 내가 책임지고 해가 지기 전까지 랭커스터 저택으로 돌려보내겠네. 정말 이 커다란 남자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니.”
“감사합니다, 전하.”
레너드라면 당연히 믿고 맡길 수 있다는 듯 앤더슨이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신뢰와 감사가 뭉쳐 반짝거리는 눈길 앞에서 레너드는 호인처럼 활짝 웃었다. 얼굴만 보자면 천사처럼 어울렸지만 루크에게는 속이 메슥거리는 광경일 뿐이었다. 앤더슨은 레너드에게 재차 루크를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며 떠났다.
앤더슨이 사라지기 무섭게 루크가 말했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신 겁니까?”
“수작이라니? 듣기 거북하게.”
“어울리지 않는 호인 흉내가 수작이 아니면 뭡니까.”
“…자네가 할 말인가?”
“전 진심입니다.”
루크는 당당하고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레너드가 코웃음을 치며 마찬가지로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이쪽도 마찬가지일세.”
“전하께서요…?”
“뭔가, 그 불손한 눈은.”
“…….”
“……나로서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에게 나쁜 짓을 하면 사람 이하가 되어버릴 것 같단 말이지.”
애초에 사람이기는 했나……. 아니, 그 이전에 선악을 구분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게 가능했어?
“약해지고 만다고 해야 하나, 거역할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루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레너드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리려는 의도였지만, 무작정 거짓이라 매도하지 못하는 시점에 이미 진실이라 여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울리지 않는 호인 행세를 수작이라 말했지만, 레너드는 앤더슨에게 그 어떤 수작도 부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절절매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앤더슨을 이용해 무슨 짓을 꾸미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가 없는 자리에서 추궁해 꿍꿍이속을 알아내고자 일부러 혼자 남은 참이었다.
“작은 동물을 목졸라 죽이는 새끼가 되는 것 같은, 그런….”
레너드는 약자를 동정하는 부류가 절대 아니었다. 나약하니 죽어도 어쩔 수 없지 않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떠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앤더슨은 다른 모양이다. 의외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듯했다. 사실 앤더슨이 마음 상할까 절절매는 꼴을 보고 어느 정도는 마음을 놓고 있기도 했다.
그 꼴만 놓고 보자면 수작을 부린 건 레너드가 아니라 앤더슨이어야 했다.
“이참에 말해두겠네만, 셀리아 건에 나는 관여하지 않았어.”
레너드가 턱을 괴었다.
“알고 있습니다.”
“부왕의 뜻을 거스르기는 곤란해 적당히 중립을 지키고 있었네만, 마음을 바꿨어.”
“…….”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네.”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황녀 전하께서 어지간히 이를 갈고 계시나 보군요.”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당장 그 애를 몰브티로 치워버리고 싶어.”
본심이 툭 튀어나왔다. 고저없는 목소리에는 감정 한 톨 실려있지 않았다. 피를 나눈 남매가 아니라 거슬리는 방해물 취급이다. 앤더슨에게는 나쁜 짓을 할 수 없다고 푸념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루크는 그 차이가 새삼 놀라웠다. 루크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레너드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당겼다.
“곧 사라질 어리석은 여동생 때문에 내 힘이 되어줄 자네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
“황제 폐하의 뜻에 거스르는 결과가 됩니다만.”
“아바마마도 그 애의 고집에 큰 기대를 걸고 계시진 않네. 그리고 어차피 곧 이 제국은 내 것이 될 거야. 부왕이라 해도 눈치를 볼 필요는 없지. 길게 보게. 곧 내 시대가 오면, 내게 도움이 되는 건 자네이지 아바마마나 여동생이 아니야.”
“…….”
“스테이턴을 묶어둔다면 차라리 자네의 자식과 내 자식을 약혼시키는 게?.”
“싫습니다.”
“……생각이나 좀 해보고?.”
“거절합니다.”
“…….”
“절대 안 됩니다.”
태어나기는커녕 임신도 하지 않은 아이를 두고, 루크는 무섭게 정색했다. 더 밀어붙였다가는 당장 목을 조를 기세라 레너드는 주춤거리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아니, 잘 생각해보게. 나쁜 얘기가 아니지 않나. 자네의 딸이 황후가 되면?.”
“끔찍합니다.”
“…….”
“그보다 딸이라니 뭡니까. 나디아를 닮은 딸을 어디로 보낸단 말입니까? 아니, 때가 된다면 보내주기는 해야겠지만, 본인이 원한다면 말릴 수야 없겠지만? 크윽….”
널 닮았을 수도 있잖아…. 레너드는 꺼내지 못한 말을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루크의 기세가 점점 더 살벌해졌다. 초점이 흐려진 검은 눈동자가 위험스레 빛났다. 루크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레너드가 존재하지도 않는 딸을 빼앗아 간 원수가 된 모양이었다.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살기는 진짜였다. 레너드는 다급하게 외쳤다.
“진정하게, 루크. 아직 자네에게는 자식이 없지 않나! 흥분하긴 일러!”
“……후?.”
“그래, 깊이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고….”
두어 번 심호흡을 하고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인정하기 싫었으나 루크가 덤벼들까 봐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던 레너드는 몰래 안도했다. 아직 자식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있었다면 이미 한두 대 얻어맞았을 것이 분명했다. 눈이 뒤집힌 짐승에게는 보이는 게 없는 법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황태자든, 황제든 원수라면 물어뜯고 볼 테다. 아직 공작부부에게 자식이 없는 덕분에 레너드는 목숨을 구한 셈이었다.
루크가 이를 꽉 깨물고 험악하게 경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아이들을 황실에 보낼 일은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부인을 닮은 딸은 포기하겠네. 그럼 자네를 닮은 아들을 내 아들의 친구로 삼는 건 어떤가. 우리처럼.”
“절 닮은 아들이라면 전하의 아들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
“황실에 보내야만 한다면 차라리 자식을 안 낳고 말지….”
한 치의 망설임 없는 확언이었다. 레너드는 기묘하게 서글퍼지고 말았다. 울컥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자식을 낳을 능력이 없는 건 아니고?”
“…….”
“셀리아에게 듣자하니 자네가 고자인지 의심스럽다던데?.”
“…….”
“서기는 하나, 그거.”
평탄했던 인생에 떨어진 골칫덩이라 해도, 객관적으로 셀리아의 미모는 진짜였다. 신에게 몸을 바친 사제에게서 욕망을 끌어낼 정도였으니, 그녀의 매력은 충분히 증명이 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능을 의심해볼 만했다.
‘남매가 나란히 성추행을 저지르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루크는 굳은 얼굴로 가만히 레너드를 내려다보았다.
“주인을 보면 섭니다.”
“…….”
“눈길만 줘도 섭니다.”
“…….”
“냄새만 맡아도 섭니다.”
“…….”
“생각만 해도.”
루크는 말을 멈추고 레너드를 확인했다. 그는 당장 귀를 씻고 싶은 듯 짜증스러운 얼굴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성추행에는 성추행이다. 알고 싶지 않을 정보를 쏟아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말을 하는 스스로도 상당히 짜증났지만, 레너드가 몸서리를 치는 건 즐거웠다. 루크는 씩 웃으며 말했다.
“쌉니다.”
내 더러운 기분을 느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