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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15화 (115/150)

115화

앤더슨을 따라 도착한 건물은 루크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라 먼스트로드를 방문할 때면 레너드와 술을 마셨던 곳이다. 루크는 앤더슨의 뒤를 따라가며 인상을 찌푸렸다. 레너드가 떨었던 허풍이 귀 언저리를 맴돌았다. 당연히 거짓말인 줄 알았더니 진짜였던 모양이다.

단순히 얼굴, 이름만 아는 사이가 아니라 따로 연락해 만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니.

‘형님과 어울릴 만한 놈이 아닌데.’

레너드는 다소 별나고 구질구질한 구석이 있지만 황태자로서 요구되는 의무와 역할을 모자람없이 해내고 있다. 그 부분은 루크라고 해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인성 문제가 되면 또 다르다.

소위 대귀족과 황족이라는 것들은 신분이 낮은 자들을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이 신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루크 역시 대귀족으로 태어나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았으므로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제게 귀속된 자들을 지켜야 할 대상이라 여겼다. 많은 것을 누린 만큼 많은 책임을 져야 할 입장이라고 배웠다.

레너드는 유들유들한 태도와 기름이라도 바른 듯 잘 돌아가는 혓바닥을 가지고 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누구보다 이기적이고 오만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세상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무엇이 희생되든 신경쓰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재미, 흥미, 욕구를 위해 움직이는 게 당연했다.

그러므로 레너드는 쓸모가 있는 사람들을 곁에 두었다. 그 외에는 취급도 하지 않았다.

루크에게는 앤더슨은 형님이지만 레너드에게는 작위도 없는 남작가의 장남일 것이다. 게다가 무척 진지한 성격이라 재미를 느낄 만한 요소도 없었다. 앤더슨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지만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무척 친절하신 분이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대답만 들었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일이야 많겠지만, 그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면 사적인 연락을 주고받을 리가 없다.

‘혹시라도 형님을 핍박하면 황태자고 뭐고 이번에야말로 때려주겠다.’

루크는 살벌한 각오를 다졌다. 랭커스터는 스테이턴과 마찬가지로 그가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앤더슨은 너무나 착한 사람이라 레너드가 어떤 개수작을 부리든 착하게만 해석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황녀 셀리아에게서 해방되자마자 제 발로 지긋지긋한 황족을 만나러 가는 이유는 오직 그 하나였다.

나디아가 없는 시간을 때우려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녀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도 아니다.

하지만 칭찬을 해준다면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앤더슨, 왔…… 루크?”

앤더슨을 먼저 발견한 레너드가 반갑게 말을 하다 멈추었다. 루크는 당황으로 물든 레너드의 얼굴이 생소했다. 진심으로 당황한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자네가 왜 앤더슨과 같이 오는 건가?”

“가족이니까요.”

딱 맞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루크는 매우 흡족하게 웃었고 레너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 앤더슨이 당황했다. 레너드는 루크와 가까운 사이라 강조했었고, 그렇다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수였던 것 같다. 루크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을지 모르는데 성급하고 무례했다.

루크를 노려보고 있던 레너드가 희게 질린 앤더슨을 발견했다. 아차.

“제가 권유했습니다. 생각이 짧아 실수를?.”

“아닐세. 괜찮네. 친한 사이인데 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도 쉬지 않고 위로가 쏟아졌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됐군! 그렇지 않아도 루크도 불러서 이야기를 하려 했어. 그에게 연락할 수고를 덜어주어 고맙네, 앤더슨.”

루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앤더슨이 뭐라 사과 같은 말을 몇 마디 더하자, 레너드는 안심하라는 듯이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기까지 했다. 이게 웬 어울리지도 않는 친절이고 내숭인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신경쓰지 말게. 자, 앉고. ……루크 자네도.”

“감사합니다, 전하. 역시 친절하시군요.”

“이 정도 가지고 뭘.”

다정하게 오가는 대화가 루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게 들렸다. 앤더슨이 웃으며 레너드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고, 잠깐 사이 레너드와 루크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내가 뭘. 친하다고 했잖아?

이게 친한…….

눈빛을 주고받던 루크는 문득 깨달았다.

사적인 연락, 만남, 대화. 이게 친한 사이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내숭이야 좀 떨 수도 있지. 나디아 앞에서 아직도 내숭을 버리지 못한 루크는 그 부분은 따지고 들지 않았다. 루크는 어떻게 해도 랭커스터 가와 친해질 수 없어서 한참을 헤맸는데, 레너드는 앤더슨과 친분을 나누고 있었다.

앤더슨과 레너드는 실제로 친해 보였다. 앤더슨은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있었지만 루크를 대할 때보다 자연스러운 태도다. 얼마나 친한지 몰라도 적어도 루크 자신보다는 친한 것 같다.

진한 패배감이 몰려왔다.

‘가족은 이쪽인데.’

입을 다문 루크를 보고 레너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답이 없는 여동생에 대해 마음껏 푸념이나 하고 싶어서 불렀던 참이다. 루크가 함께 올 줄은 생각도 못해 당황하고 말았지만, 이건 생각 외로?.

“전하? 무슨 문제라도….”

“아무것도 아닐세. 자, 앉으라니까, 루크.”

루크는 조용히 앤더슨의 옆자리에 앉았다. 레너드가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갑작스럽게 불러내었는데도 기꺼이 와 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서 부르신다면 어디라도 가야지요. 제 은인이신데요.”

앤더슨의 목소리에는 무한한 신뢰가 묻어났다. 말이 이어질수록 루크는 더욱 패배감에 물들었다. 우울했던 레너드는 기분이 하늘을 날 듯이 좋아졌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한다.

“은인이라니, 섭섭하게. 우린 이미 친구가 아닌가.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게. 난 자네와 첫 술잔을 나누었을 때부터 자네를 친구라 여기고 있었지. 아니, 이미 가족인가. 가족보다 가깝게 여기고 있네.”

“네……? 영, 영광입니다, 전하.”

“평생 친하게 지내주게.”

평생 놓아줄까 보냐. 루크가 이를 득득 가는 소리를 들으며 레너드는 활짝 웃었다.

*

말이 통하지 않는 여동생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려고 부른 자리였지만, 정작 셀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군요, 황녀 전하께서는 그래서 그런 행동을…….”

“말이 통하지 않아 말릴 수가 없었네.”

“낯선 왕국으로 시집을 가려니 얼마나 무서우셨겠습니까? 마지막 희망을 잡고 싶어서 그러셨던 거겠지요.”

“그….”

셀리아가 시집을 가기 싫어하는 건 맞지만 무서워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것만은 레너드가 제 이름과 명예를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고작해야 새로운 왕국에서 입지를 다지기 귀찮아서, 성가셔서, 지금껏 쌓아둔 게 아까워서일 텐데.’

셀리아 본인 입으로 말하기도 했다.

앤더슨은 사람이 너무 좋다. 제 여동생을 완전히 무시한 황녀를 가엾게 여겨줄 만큼 관대했다.

“사람이 너무 좋은 것 아닌가? 셀리아 때문에 자네 여동생의 명예가 완전히 땅에 떨어지지 않았나.”

“음…….”

앤더슨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루크를 흘긋 보고는 말했다.

“이것도 사실은 여기 있는 루크가?루크가 귀를 쫑긋 세웠다? 신뢰를 주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소문이 어떻든 루크가 잘해줄 거라 믿었으니까요….”

“형님….”

레너드는 아니꼬운 눈으로 루크를 보았다. 형님 소리가 잘도 나온다.

“명예는 자연스럽게 회복될 겁니다. 헛소문에 휩싸였다는 이유만으로 떨어지는 명예라면 그런 건 없어도 돼요.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지기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레너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로서는 해본 적도 없는 사고였다. 평소라면 삐딱하게, 약한 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시도하는 합리화라고 비꼬았을 텐데? 진심이 가득한 앤더슨의 눈을 보니 비아냥거림도 나오지 않았다. 루크는 자신과 앤더슨의 대화에 자꾸 끼어드는 레너드가 짜증스러웠다. 모처럼 칭찬받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디아에게 그런 소리를 듣게 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형님. 죄송합니다.”

“저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루크도 휘말린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어떻게든 사과하고 싶습니다. 나디아에게.”

“솔직하게 말해주고 사과한다면 좋아할 걸요.”

레너드가 끼어들었다.

“선물을 준비하게, 루크. 자고로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보석이 최고지. 향수도 괜찮고. 향수를 선물하겠다면 내가 골라줄 수 있다네.”

“그런 건 평소에도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걸로 사과가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난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말한 것뿐일세.”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루크는 당당하게 앤더슨을 보며 “그렇죠?”라고 물었다.

엄밀히 말해 싫어하는 건 아니었던 앤더슨이 어설프게 웃었다. 부담스러운 선물을 싫어할 뿐, 보석, 향수 같은 사치품 자체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비비안이 좋아해줄 선물이라면 제 손으로 사고도 싶었다. 게다가 여기서 “그렇다”고 해버리면 그런 건 조금도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대귀족과 황족의 금전 감각에 동의해버리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나디아는 다른 걸 더 좋아할 것 같긴 합니다. 예를 들면 꽃이나….”

“꽃 보석을 말하는 건가? 과연, 그쪽이 더….”

“아뇨, 잘 다듬어진 꽃다발이면 충분합니다!”

앤더슨이 당황하자 레너드가 씩 웃었다. 그의 장난이었다는 걸 깨닫고 앤더슨이 쓰게 웃었다. 긴 대화 끝에 내린 결론이 지나치게 평범했지만, 원래 평범한 게 제일 좋은 것이다. 앤더슨은 소박한 규모에 안도했다. 꽃 선물을 받고 행복하게 웃을 여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냥 꽃다발만 주는 건 너무하지 않나. 재미도 없고 로맨틱하지도 않아.”

“…….”

“아니, 내 말은!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걸세! 앤더슨, 자네 의견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이벤트 말입니까?”

“마침 곧 라 트에빌레가 시작되지. 검술 대회의 우승자는 단 한 명의 숙녀에게 꽃을 바칠 수 있어. 우승자가 바치는 꽃다발이라면 충분히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선물이 되겠지.”

사치품 선물보다 규모가 더 커지고 말았다. 황족의 스케일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승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도 않고, 시간도 없고…….”

“그렇군요.”

루크가 중얼거렸다. 앤더슨과 레너드가 그를 보았다.

“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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