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밤이 늦도록 딸이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랭커스터 남작 부부는 걱정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제이드 앨런이 “공작 부부께서는 스테이턴 저에서 하룻밤 묵고 오신다고 합니다.”라고 전해준 덕분이었다. 제이드 앨런은 “이번에는 납치당했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라고도 웃으며 덧붙였다. 앤더슨을 비롯해 가족들은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앤더슨는 저녁 식사를 하며 오갔던 부모님의 대화를 회상했다.
“기왕 가버린 거 돌아오지 않아도 될 텐데.”
마리아가 말했다.
“그건 좀…. 봄이 되어 공작령으로 돌아가버리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소.”
“여기 있어도 못 보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나디아가 당신을 피하는 건 알고 있는 거죠?”
“그야….”
랭커스터 남작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싸웠으면 화해를 해야죠. 언제까지 내버려 둘 참이에요?”
“맞아요, 아버지. 이러다 겨울이 끝나면 어쩌시려고.”
얌전히 듣고 있던 일리야도 한 소리 거들었다. 부인과 딸의 공격에 랭커스터 남작은 아들을 쳐다보았다. 앤더슨도 아버지가 안쓰러웠지만 이번만큼은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미루시면 더 어려워지실 뿐이에요.”
“나도 알고 있다만, 나디아와는 싸워본 적이 없어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과 싸움을 해봤을 리가 없었다. 앤더슨과 일리야에게는 엄하게 혼을 낼 줄도 아는 아버지였지만, 나디아에 한해서는 예뻐하기만 해도 모자라 혼은커녕 따끔한 소리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디아가 울먹거리면 어쩔 줄 몰라서 허둥거리기 바빴던 것이다.
‘그 이전에 나디아는 혼날 만한 짓을 하지도 않았지.’
과보호의 대명사 랭커스터 남작가의 후계자가 생각했다.
“일단 나디아를 단둘이 이야기를 해 보세요. 솔직한 아이이니 자리가 마련된다면 끝까지 피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도 제대로 사과해야 하고요.”
“…알았소. 그래야지….”
랭커스터 남작은 나디아가 어째서 마음이 상했는지 정확히 알았다. 그 자신도 말을 내뱉고 난 직후 실수했다고 깨달았다. 그러나 워낙 정신이 없었고, 그 후로는 나디아가 티나게 피해다니는 통에 충격을 받아서 먼저 다가가지도 못했다.
루크가 처가살이를 해주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나디아와는 계속 어색한 채로 헤어졌을 것이다. 한 집에 살아도 얼굴을 보기가 힘든데, 스테이턴 저택에 머물렀다면 같은 도시 안에 있어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부담스러웠던 공작의 체류가 이토록 고마워질 줄은 몰랐다. 랭커스터 남작뿐만 아니라 앤더슨에게도, 일리야에게도 그랬다.
루크만이 아니라 그가 데리고 온 사람들과도 친해졌다. 부담스러웠던 선물 공세를 멈추고 적절한 정도를 맞추자 그들의 매력이 보였다.
제이드 앨런은 루크의 뒤를 쫓아다니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는데, 반듯하고 성실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자유분방한 혓바닥을 가졌다. 일리야는 제이드 앨런의 신랄하고 공손한 비판을 무척 좋아했다.
안나는 매우 유능했다. 랭커스터 저택에서 원래 일하던 사람들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만 일을 도와주었고, 약에 대해서도 박식해 마리아에게 필요한 약을 배합해주었다. 마리아와 일리야는 최근 안나와의 대화에 푹 빠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리 웃어요?”
“비비안.”
“어서 주무셔야죠. 밤이 늦었어요.”
“편지만 확인하고 잘게요. 먼저 자요, 비비안.”
비비안은 앤더슨을 불만스레 내려다보았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다. 지금 침대에 끌고 들어가지 않으면 새벽 3시는 가뿐하게 넘기고 말 것이다.
“편지는 그것뿐인가요? 지금 확인하세요. 기다릴게요.”
“하지만….”
“…….”
비비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입을 다물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앤더슨은 서둘러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사실은 답장까지 쓰고 잘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앤더슨은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주로 기부로 운영이 되고 있어 인맥 관리는 무척 중요하다. 제국에서 운영하는 보육원도 있었지만 시설은 부족하고 버려지는 아이들은 너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관리가 허술하고 불행한 사고에 휘말리는 아이들도 많았다.
앤더슨은 철저한 사전 조사 후에 입양을 진행하고 아이를 보낸 후에도 꾸준히 지켜보았다. 다시 갈 곳이 없어지면 데리고 왔다. 돈이 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손해만 늘어나는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비비안은 앤더슨에게 이 일이 딱 알맞다고 생각했다.
돈은 랭커스터 가의 재산을 이리저리 굴리고 투자해 만들어냈다. 비비안이 지참금으로 가지고 온 돈도 있어서 그럭저럭 사치하지 않는다면 충분했다.
랭커스터 가는 정기적으로 보육원을 방문해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특히 나디아는 보육원 방문을 무척 좋아했다. 제임스와 레이나를 제외하면 나디아가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또래는 모두 보육원 출신이었다.
두 통은 성인이 되어 보육원을 나간 아이들이 보냈다. 소량의 기부금과 안부를 묻는 편지가 담겨 있었다. 앤더슨은 흐뭇하게 웃으며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는 봉투가 굉장히 고급스럽네요.”
“…그러네요.”
“누가 보낸 건가요? 새로운 기부자인가요?”
“음. 그런 것 같아요.”
겉봉을 살펴보았지만 발신인이 없었다. 봉랍에는 아무런 인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앤더슨은 왠지 누가 보낸 편지인지 알 것 같았다. 서둘러 편지를 펼쳤다.
“역시….”
“누구예요?”
“은인에게서 온 편지예요. 논의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시네요.”
“하지만 여기 발신인이 너무 수상하잖아요.”
비비안은 미심쩍은 듯이 편지지의 끝을 가리켰다.
“‘곤란한 여동생을 둔 오라비로부터’라니.”
“유머러스한 분이거든요.”
앤더슨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이만 자러 갈까요.”
“…어쩐 일이에요? 적어도 30분은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당신이 기다리는데 어떻게 30분씩이나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겠어요?”
“종종 그러셨으면서.”
비비안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녀의 말처럼 자주 기다리게 만들었던 앤더슨은 무안한 듯 웃어넘겼다.
“내일은 일찍 나가야 하거든요.”
“그러면 그렇지. 딱히 저 때문은 아니었잖아요.”
툴툴거리면서도 비비안은 얌전히 앤더슨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남편이 일찍 잠자리에 들어준다면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었다. 잘 준비는 책상에 앉기 전에 이미 마쳤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침대에 누웠다.
발신인이 없는 편지는 태자 레너드로부터 온 것이었다. 지난 소동 이후 앤더슨은 괜히 폐가 될까 감사 인사 편지를 보낸 후로는 연락하지 않았다. 황실, 황녀와 얽힌 소문은 알고 있지만 원망할 마음도 없었다. 소문 때문에 나디아의 명예 운운하기에는, 그 소문 이전에도 별반 좋은 평판은 듣지 못했다. 나디아가 스테이턴 공작가에 팔려가듯 갑작스럽게 시집을 간 직후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조롱이 들려왔었다. 그때에 비하면 공작과 황녀에게 관심이 쏠린 무시는 조롱 같지도 않았다.
‘아, 혹시 걱정할까 봐 사정 설명을 해주시려는 건가. 친절하신 분이야.’
레너드 전하가 제국의 태자라니, 제국의 미래는 밝다. 앤더슨은 흐뭇하게 웃으며 잠들었다.
*
다음날.
루크와 나디아는 아침 일찍 랭커스터 저택으로 돌아왔다. 루크는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고 싶었지만 나디아가 브릿 후작 부인에게 가야 한다고 재촉한 탓이었다.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잖소.”
“안 돼요. 부인께서 절 위해 시간을 할애해주시기로 한 건데 어떻게 그래요.”
“양해해주실 거요.”
“물론 양해해주시겠지만 제가 그러고 싶지 않아요.”
수면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부족했던 나디아를 충분히 채운 덕분에 루크의 컨디션은 완전히 되살아났다. 그러나 모처럼 성가신 황녀에게서도 해방이 되었으니 적어도 하루는 종일 그녀를 끌어안고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루크는 최선을 다해서 나디아를 방해하고 붙잡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잠든 척하고 있으니 몰래 가버리려고 하고, 키스하며 넘어뜨리려고 하니 결연하게 입을 손바닥으로 막아 버렸다. 어린애처럼 침대에 누워 그녀를 붙잡아도 보았지만, 나디아가 “안 돼요.”라고 말하면 풀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타공인 전패의 남자인 것이다.
“‘라 트에빌레’가 끝나면 종일 함께 있어요.”
달콤하게 보상을 약속해주며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안나에게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브릿 후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버렸다. 루크는 나디아의 마차가 대문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지켜보았다.
누가 보면 전쟁에 나가는 배우자를 배웅하는 줄 알 것이다. 눈빛만큼은 못지않게 애틋했다.
그때 앤더슨이 외투를 여미며 걸어 나왔다.
“일찍 왔군요.”
“형님. 외출하십니까?”
“…….”
거뭇하게 수염이 자라 그런지 오늘따라 형님 소리가 더욱 위화감이 들었다. 앤더슨은 어색한 호칭을 웃어넘기며 말했다.
“예. 점심 약속이 있어서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뇨, 아직….”
앤더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루크는 며칠 새에 다소 핼쑥해졌다. 잘 챙겨 먹지도 못하는 것 같다고 일리야가 흘러가듯 걱정하던 말이 떠올랐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 할 텐데. 가정식보다는 조금 더 영양이 풍부한 식사를 했으면 했다. 앤더슨이 말했다.
“바쁘지 않으시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루크는 앤더슨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은 랭커스터 가족과 안나, 제이드 앨런이 전부였다. 앤더슨은 그들을 모두 두고 외출을 하려 하므로 점심 약속 상대는 루크가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루크의 눈빛에서 의문을 읽은 앤더슨이 말했다.
“태자 전하와의 약속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