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13화 (113/150)

113화

*

“전부 바보 같아졌어. 난 뭘 걱정하고 있었던 거야?”

신경질적인 투였지만 짜증보다 허탈한 목소리였다. 소파에 깊이 기대며 인상을 찌푸리는 브릿 후작 부인을 보며 안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안나가 놀리듯 말했다.

“걱정해주고 계셨던 건가요?”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하겠어.”

늙어서 기운이 없다고 제 입으로 말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건만, 브릿 후작 부인은 태연하게 말을 바꾸었다. 안나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언뜻 냉정한 독설가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녀는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사람을 돌봐주길 좋아하고, 타인의 불행을 두고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브릿 후작이 타계한 후에도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였다.

“너도 참 심술궂어. 내가 저 애에게 정이 들 거라는 걸 뻔히 알았으면서.”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하겠나요.”

“여전히 한 마디도 지질 않지.”

안나는 부드러운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마저도 얄밉기 짝이 없어서 브릿 후작 부인은 밉지 않게 그녀를 흘겨보았다. 괜히 지는 것 같아 인정하지 않을 셈이었지만 안나 앞에서는 거짓말을 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자매처럼 자란 사이였고, 서로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물러터진 치즈는 싫지만 열심히 하는 애는 싫어할 수 없어. 그 애는 둔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최선을 다해. 기특한 애는 지켜봐주어야겠지.”

“그러실 줄 알았어요.”

안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마치 제 손녀가 칭찬받은 듯 뿌듯한 얼굴이다.

“그 애만 떼어놓고 보면 괜찮지만, 루크는? 아니, 지난 며칠 간의 내 걱정은 뭐였어!”

“그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오랜만에 그 입을 때려주고 싶어졌어.”

브릿 후작 부인은 깊은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고 보면, 그래……. 아무리 스테이턴 영지가 아니라고 해도 심각한 상황이었다면 네가 가만히 두고 보았을 리가 없지. 내 목을 졸라서라도 해결을 하려고 했을 거야. 하지만 넌 이 상황이 그저 촌극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로군.”

“그런 셈이지요. 이제 부인께서도 아시겠지요?”

“아아, 알지. 알고말고. 정말 웃기지도 않아….”

뻔히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둘만의 세계에 빠져버리질 않나, 사람을 방해꾼 취급하질 않나. 나디아는 문득문득 정신을 차리고 수습을 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비틀거리며 어지러운 척을 하는 루크를 보고서는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부채에 얻어맞고도 나디아가 모르니 되었다는 양 헤벌쭉 웃는 꼴이라니….

커다란 덩치를 하고서 연약한 척하는 루크와 그걸 또 진심으로 걱정하는 나디아를 보고 있노라니 브릿 후작 부인은 다 되었다 싶었다. 저 둘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알겠어. 그 부부에게 걱정은 사치라는 걸 말이야.”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됐다. 브릿 후작 부인은 어디까지나 루크가 비정상이고, 나디아도 거기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오늘의 대화는 그마저도 뒤집어버렸다. 루크를 보고서도 지켜주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나디아도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다.

안나는 혀를 내두르며 넌더리를 내는 브릿 후작 부인의 감상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나마 라 먼스트로드에 와서 덜하신 거예요. 성에서는 어땠는지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

“유난 떠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안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끝을 흐렸다. 눈은 입보다 많은 말을 했다.

라 먼스트로드로 오면서 가장 걱정했던 건 나디아의 가족들에 대한 것이었다. 어떻게 그들의 오해를 풀지,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을지. 그 외의 문제는 걱정한 적도 없었다. 애초에 루크와 나디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툼이 있어도 금세 풀린다. 서로를 보고만 있어도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데, 갈등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일이 그리 쉬울까. 셀리아 전하는 쉽게 포기하실 분이 아니야. 만만치 않을 텐데.”

“저희 부인도 만만한 분은 아니랍니다.”

“……그래봐야 치즈일 것 같지만 그렇다 치고, 소문은 내버려 둘 거야? 바란다면 도와줄 수 있어.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지만, 셀리아 전하만큼은 아니어도 내게도….”

“스테이턴 가의 위신에 문제가 생기겠지만 부부를 직접 보면 다들 알게 되겠지요.”

“…….”

“휘말린 사람만 바보가 된다는 걸.”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얽히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

자처해 휘말린 바보는 기분이 좋았다.

‘모든 것이 완벽해. 내 인생은 달라질 거야.’

제임스 밀리언은 언제나 인생이 불만족스러웠다. 그는 밀리언 자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작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자랐다. 밀리언 자작가는 낮은 신분에 비해서는 부유한 편이었으므로 하나뿐인 후계자에게 모든 정성과 돈을 쏟았다. 가르칠 수 있는 건 모두 가르쳤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주었다.

다행히 제임스는 영특해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달았다. 비싼 교육비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가르치는 대로 쏙쏙 받아먹는 아들은 밀리언 자작부인의 자랑이었다. 여느 부모가 그렇듯 밀리언 자작부인에게 아들 제임스는 완벽했다. 그녀에게는 딸도 있었지만, 아들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넌 위대한 사람이 될 거야.’

‘어디서도 너보다 잘난 사람은 본 적이 없단다.’

어린 제임스는 어머니가 속삭이는 달콤한 칭찬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를 가르치는 교사들도 입을 모아 그를 천재라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마 여덟 살 무렵까지는 순진하게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영특한 제임스가 제 신분과 처지, 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달콤한 속삭임이나 많은 돈을 받은 교사의 칭찬과 달리 제임스는 천재가 아니었다. 그보다 똑똑한 아이는 얼마든지 있었고, 그는 고작 해봐야 수재 정도였다. 심지어 시간이 흐를수록 평범한 수준에 머물렀다.

신분도 별 볼 일 없다. 밀리언 자작가는 부유한 편이었지만 역사가 짧았다. 그 누구도 자작가의 평범한 장남을 위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평화로운 시대에는 공적을 세워 작위를 받기란 불가능하다. 애초에 ‘위’에 올라가려면 연줄이라도 있어야 했다.

드높은 이상과 별 볼 일 없는 현실.

겉으로는 성실한 청년이자 순종적인 아들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의 안에는 시꺼먼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한계가 정해져 있는 신분의 벽을 느낄 때마다 그는 자연스럽게 화풀이를 할 대상을 찾았다.

랭커스터 가의 막내 나디아는 가장 완벽한 대상이었다. 병아리처럼 제 뒤를 졸졸 쫓아오던 여자아이에게 지적을 하고, 잘못된 행동을 교정해줄 때마다 제임스의 자존심은 한껏 부풀었다. 여자아이는 어깨를 움츠리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였다. 그 정수리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다른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준다는 성취감, 저보다 못한 사람을 내려다보는 만족감.

그 여자아이는 이제, 제임스를 가로막았던 벽을 뛰어넘게 해 줄 발판이 될 것이다.

‘네게 그 자리는 안 어울려, 나디아.’

자신은 올라가봐야 자작인데, 나디아는 고작 결혼으로 공작가의 이름을 얻었다. 제게 지적을 받고 어깨를 움츠리던 여자아이가 말이다. 공작 부인이 되어 브릿 후작 부인의 저택을 드나드는 나디아를 보았을 때 제임스는 뱃속이 뒤틀리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를 이용해야 제게 유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질투가 새어나오려 했다.

‘잘 됐지. 너도 힘들었을 테니까.’

브릿 후작 부인에게 뒤늦게 가르침을 받으며 나디아는 힘들어 보였다. 말수가 줄고 표정이 어두웠다. 잘 웃지도 않는다.

‘내가 널 구해줄게….’

공작부인이었던 여자를 거두고, 공작에게는 빚을 지운다. 최근 예뻐진 나디아라면 손해볼 것도 없었다. 스테이턴 공작은 나디아를 몇 번이나 안았을까? 이성에 대해서는 무지하던 나디아를 그가 하나하나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흥미가 떨어지고 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스테이턴 공작은 대귀족임에도 그에게 퍽 친절하게 굴었다. 그럼에도 나디아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심드렁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나디아는 착하고 순하지만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의 화제는 가족이나 조카, 간식, 요리, 혹은 시시콜콜하고 지루한 일상이 전부였다. 이따금 봉사 활동이니, 승마니 이야기를 하지만 제임스는 흘려들었다. 게다가 상대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셀리아 황녀다.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는 뻔하지 않은가.

‘먼저 이혼을 해야 하는데…. 아니면 적어도 결혼 무효, 행방불명….’

행방불명이 된다면 나디아는 밀리언 자작부인이 되지 못하겠지만, 뭐 어떤가. 어쨌든 제임스는 나디아를 책임져 줄 작정이었다. 지루해져서 다른 여자 몇 명쯤 만날지도 모르겠지만.

스테이턴 공작도, 셀리아 황녀도 뜻은 분명했다. 남은 사람은 나디아 하나였다.

불행히도 나디아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둔했다. 지금도 저만 사라지면 되는 상황인 걸 모르고 애처롭게 남편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정작 남편은 그녀가 사라지길 바라고 있는데 말이다.

‘예전이라면 내가 말하는 걸 다 들었을 텐데….’

결혼을 하고서 이성 관계에 눈을 떴기 때문일까. 나디아에게는 전에 없던 경계심이 생겼다. 제임스가 말을 걸어도 흘려듣거나 집중하지 않아 대답도 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사흘째 찾아갔을 때에는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공작 부인으로서 정숙해야 한다는 주의라도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나디아에게 상황을 알려주고, 이혼하도록 종용하면서 내가 거두어준다는 걸 알려줄 사람….’

직접 말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제임스의 머릿속에 적당한 사람이 떠올랐다.

여동생 레이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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