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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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를 하고서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었다. 고작 수 초를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당장 나디아를 끌어안지 않으면 신경 어딘가가 뚝 끊어질 것만 같았다. 문을 열자마자 나디아가 보였다. 정확히는 나디아만 보였다. 그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나디아의 얼굴을 즐겁게 감상하는 동시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어? 진짜 루크…?”
루크는 대답 대신 나디아를 끌어안았다. 나디아가 당황스러운지 두 팔을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거렸다. 그러다 아주 살짝 그의 등과 어깨 사이를 톡톡 두드린다.
‘아, 이거야.’
이 손길이 그리웠다. 루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가 깊이 들이켰다.
콧잔등으로 그녀의 목을 문지르고 귓불과 머리칼 사이의 체향을 한껏 들이켰다. 겨우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입술이 어깨 근처에 멈추었고, 생크림같이 부드러운 살갗에는 키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어? 루크, 지금?.”
“그리웠소, 나디아.”
입술을 한 번 가져다 댔으면 쉽게 뗄 수 없는 것이 또 나디아의 피부였다. 그는 그대로 긴 목을 타고 올라가며 턱과 귓불 사이까지 촘촘하게 키스했다.
“잠깐만요, 루크, 여기서는 안, 읏!”
“보고 싶었어….”
“그건 저도, 마찬가지지만….”
뺨까지 올라왔으면 입술을 빼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루크는 바쁘게 말하는 나디아의 입술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무언가를 발랐는지 평소보다 색이 붉었다. 그러나 볼록한 아랫입술은 터질 듯 탄력적일 테고, 실크처럼 부드러울 것이다. 아, 역시 키스하지 않을 수 없지….
“안 된다니까요!”
“으븝.”
입술이 막혔다. 그러나 손바닥도 좋았다. 뺨에 닿은 가느다란 손가락 끝과 살짝 촉촉한 손바닥을 핥고 싶었다. 주름이 진 마디를 핥으면 화낼까. 발가락은 빨면 종종 부끄러워하며 화를 냈지만, 손가락은 괜찮지 않을까. 손가락이 안 되면 손바닥만이라도. 손바닥에는 다른 사람들도 키스는 하는 모양이니까….
그래도 허락은 구해야 나디아가 싫어하지 않겠지. 루크는 나디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새빨개져서는 눈물을 그렁거리고 있었다. 보드라운 솜털이 보이는 뺨만이 아니라 귓바퀴, 목덜미까지 새빨갛다. 루크는 겨우 제정신이 들었다.
“아직 브릿 후작부인께서 계신단 말이에요…!”
“?아.”
루크는 눈만 옆으로 돌렸다. 브릿 후작 부인이 싸늘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입술은 떼어냈지만 루크는 아직 나디아를 끌어안고 있는 채였다. 놔주어야 한다는 걸 머리는 알고 있는데 손바닥이 멋대로 눌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그의 의지 바깥의 일이었다. 움직이려고는 했는데 몸이 꿈쩍도 안 하는 걸 어떻게 하나.
브릿 후작 부인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선 잘했어요. 단호히 거절할 줄 알아야 해요.”
“감사합니다….”
나디아는 기어 들어갈 듯 작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리고 각하, 며칠 만에 부인을 만나 반가우신 건 이해하겠지만?.”
“이해해주시니 다행이군요, 할머님.”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요! 제발 다른 사람들의 눈이라는 걸 의식하고 살라고 몇 번을 말했어요?!”
“이해해주시는 김에 잠깐 부부의 시간을 갖게 자리 좀 피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람? 말을?.”
브릿 후작 부인이 손에 쥔 부채를 꽉 틀어쥐었다. 습관대로 부채를 루크의 머리통에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루크가 마치 인질처럼 나디아를 끌어안고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다. 나디아는 루크의 가슴을 두드리며 빠져나오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루크가 풀어줄 마음을 먹지 않는 한 탈출은 불가능해 보였다.
“루크, 후작부인께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저 이제 오늘 수업도 다 끝난 참이니까 같이 돌아가면 되잖아요!”
“나도 돌아가 느긋하게 당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불가능하오, 나디아.”
“예? 아, 그렇지. 바쁘시지…. 오늘도 돌아가셔야 하는 건가요?”
루크는 이번에도 곧장 대답하지 않고 나디아를 빤히 보았다. 루크 자신도 굉장히 솔직한 성격이지만 나디아도 다르지 않았다.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실망이 떠올라 있었다. 애써 아닌 척하려고 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를 밀어내던 손바닥으로 그의 옷깃을 붙잡고 있다. 실망으로 내려가는 입꼬리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 루크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말았다.
“안, 된, 으읍.”
“이제 바쁘지 않소. 영광스러운 임무에서 해방되었거든.”
“네?! 읍.”
“부인을 만나지 못해 죽어가는 나를 불쌍하게 여기셨는지….”
브릿 후작 부인의 차가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그녀는 눈길로 말했다. 지랄하고 있네.
“황제 폐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셨지.”
쪽쪽쪽. 그만해야지 생각한 후로도 정확히 열 번의 입맞춤을 채운 후에야 루크는 입술을 떼고 씩 웃었다. 나디아는 복잡한 심경인 듯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워서 기뻐하는 걸 솔직히 드러내도 될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 기쁘기는 한데 자신이 걱정되어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지나치다. 지나치게 틈이 없었다. 사랑스럽지 않은 틈이 없어. 안면근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풀어지는 얼굴을 어쩌지도 못하고 루크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폐하는 자비로운 분이시고, 그저 내가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신 것뿐이오.”
피해자는 가해자를 보호하기에 적합하지 않지. 그렇고 말고. 나디아가 원한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수 있는 루크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추행 피해를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소문도 나디아가 모르는 채로 끝나는 게 제일이다. 안나가 말했던 대로 소문을 일소시키기에는 드러내놓고 애정 행각을 벌이는 게 최고였으므로, 그는 자제하지 않을 참이었다.
브릿 후작 부인이 아무리 싸늘하게 노려본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요. 당장 내 저택에서 꺼져요.”
“냉정하십니다, 할머님.”
“냉정이고 열정이고 꺼지래도!”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헉.”
루크의 옷깃을 붙잡고 있던 나디아가 놀라 손을 떼었다. 그가 움직이고자 한다면 옷깃이 아니라 다리를 붙잡고 늘어져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텐데도. 루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디아를 보지 못하는 동안에는 예의상의 웃음도 지을 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루크는 참지 않고 나디아의 뺨에 키스했다.
“루크, 하지 말랬죠!”
“알았소. 안 할게.”
“그리고 놔 줘요.”
루크는 브릿 후작부인의 차가운 시선이 괜찮을지 몰라도 나디아는 아니었다. 끌어안겼을 때는 놀라서, 그 다음에는 루크가 너무 지쳐 보여서 차마 떼어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겨우 자신을 보는 브릿 후작 부인의 눈길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는데 이래서야 처음만 못하다.
“부인께 미움받기 싫단 말이에요….”
“전 구분이 분명한 사람이에요. 사로잡힌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진 않을 거랍니다. 그보다 날 도와주고 싶다면 그대로 남편 뺨이라도 갈겨주면 고맙겠네요.”
“네… 네에?!”
“무리라면 하지 않아도 돼요.”
브릿 후작 부인은 쥐고 있던 부채를 힘껏 던졌다. 루크가 제 주장처럼 두 팔을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면 평소처럼 잡아채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루크는 부채가 날아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쪽은 보지도 않고 발을 헛디딘 척 커다란 몸을 기울였다. 나디아가 깜짝 놀라며 그를 지탱했다.
“읏.”
“루크! 어지러워요?!”
“잠깐 눈앞이 흐려져서.”
루크는 몸을 기울이는 척 나디아를 더 깊이 끌어당겨 안았고, 그 사이 브릿 후작 부인의 부채는 그의 뒤통수에 명중했다.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행복한 얼굴이라 브릿 후작 부인은 그야말로 기가 질렸다.
나디아가 후작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루크 몸 상태가 안 좋은가 봐요. 괜찮으시면 잠시 쉬다 가도 될까요? 부인께 장난치려는 의도가 아니라, 계속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무리해서 빈혈이라도 생긴 게 아닌지, 아니, 의사를 부르는 게 나을까? 의사를 불러올게요, 루크….”
“아니오, 나디아. 잠깐 누워 쉬면 나아질 것 같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환… 환… 자를 내쫓을 수는 없으니까요. 편히 쉬다 가도록 해요. 내가 없는 편이, 편하게 쉴 수 있겠지요. 하인들에게 일러둘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그들에게 부탁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만하죠.”
“감사합니다, 부인! 내일 뵈어요!”
기댄 듯 기울었지만 체중은 조금도 싣지 않은 루크를 지탱하듯 끌어안은 나디아가 열성적으로 인사했다. 그 인사는 조금도 우아하지 않다고 지적해야 했지만 브릿 후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귀엽긴.
브릿 후작 부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나디아가 볼을 붉히며 말했다.
“루크, 봤죠? 봤어요? 부인이 저한테 웃어 주셨어요!”
“그런 거 못 봤소만.”
“아녜요, 살짝 웃어 주셨어요. 처음이라고요! 어떡해, 나 너무 가슴이 뛰어….”
“……할머님 때문에 말이오?”
루크는 나디아를 끌어안고 있는 제 팔을 쳐다보았다. 안고 있는 건 자신인데 정작 나디아의 신경은 브릿 후작 부인에게 쏠려 있었다. 할머니에게도 질투가 치솟을 수 있다니, 루크는 자신의 새로운 일면이 나날이 놀라웠다. 나디아는 볼까지 예쁘게 붉히며 말했다.
“그럼요! 어쩜, 우아하고 멋있어…. 부인은 제 우상이에요. 아, 물론 안나도 멋있지만요….”
“……나는?”
신음보다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안겨 있는 나디아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사랑하는 남편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물론 제일 멋있어요!”
“…….”
“어, 어디가 멋있는지 말해줄까요?”
“유치한 줄 알고 있지만, 어차피 당신에게는 다 들킨 참이니 굳이 사양하지 않아도 되겠지.”
루크는 부루퉁한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팔을 내려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허리가 붙으며 나디아의 상체가 자연스럽게 조금 뒤로 기울었다. 나디아는 그의 얼굴을 붙잡은 채로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엄지로 그의 얼굴을 덮은 거뭇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꽤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습관될 것 같아.’
나디아는 이대로 그가 수염을 다시 길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면도를 못 해주는 건 아쉽지만.
“다 멋있어서 굳이 하나씩 말하기가 힘든데… 제일 먼저 다정하고….”
“그리고?”
“키도 크고요. 아, 물론 잘생겼고요. 힘도 세고….”
“힘은 좀 센 편이지.”
“믿음직스럽고, 영지를 사랑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도 멋있고요.”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기도 새삼스럽다. 나디아는 너무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루크의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계속하기로 했다. 그의 얼굴은 보기 좋게 풀어져 있었다. 나디아는 쉬지 않고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일하느라 당신을 내버려두어 밉진 않고?”
“……으으음, 그야 보고 싶기는 했지만 밉진 않았어요.”
“난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 잠도 잘 수 없었소.”
“…….”
저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디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밤새 다녀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왜 깨우지 않았는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솔직히 깨웠다고 한들 일어날 수나 있었을까 싶었다. 그가 못 자는 동안 자신은 너무 깊이, 푹 잘 잤다.
“저, 저는 꿈에서 루크를 봤어요…!”
루크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나디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비식 웃고는 말했다.
“꿈에서 무얼 했는지 말해주겠소?”
“예에?!”
“내가 당신을 만나지 못하는 동안, 꿈속의 나는 당신과 무얼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오.”
“루크였는데요…?”
“놀랍게도 나디아, 나는 할머님만이 아니라 꿈속의 나에게도 질투할 수 있게 된 모양이오.”
정말이지 놀랍게도 한 조각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주겠소? 꿈속의 나와 한 일은 실제 나하고도 해줘야 하오.”
나디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루크를 보다가, 볼을 발갛게 붉혔다. 거짓말인 줄 알고 놀리려 했던 루크가 그녀를 빤히 보았다. 어, 진짠가. 그런데 왜 부끄러워하지. 나디아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요.”
“응?”
“포도잼을 바른 바게뜨를 먹었어요….”
살찌지 않았다고, 더할 나위 없이 예쁘다고 말했는데. 먹는 꿈을 꾸었다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가? 그녀가 왜 부끄러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루크가 물었다. 잘 먹으니 보기 좋기만 하다. 더 통통해졌으면 좋겠다.
“맛있었소?”
“…몰라요. 먹어본 적 없어요.”
“바게뜨를?”
나디아의 얼굴은 더 빨개지지 못할 정도로 빨갛게 타올랐다. 대체 이 대화의 어디에 부끄러워할 요소가 있단 말인가.
말하지 말까? 하지만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해 봐야 다 들킬 것이다. 자신의 거짓말은 언제나 형편없었으므로. 사라지고 싶은 창피함을 내리누르자 숨어있던 기대감이 꿈틀거렸다. 실제 나하고도 해줘야 한다는 말을 그가 지킨다면.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고 바게뜨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루크는 그대로 나디아를 안아올려 스테이턴 저택으로 직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