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눈이 마주쳤지만 먼저 만나러 올라가는 것도 모양새가 영 이상했다. 루크는 어떻게 해야 제임스 밀리언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것은 나중에 나디아에게 말할 때 수상하거나 어색하지 않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의 짧은 고민은 소용없었다. 제임스 쪽에서 먼저 그를 알아보고 부리나케 달려왔기 때문이다. 제임스와 루크는 서로를 일방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우선은 초대면인 상황이라, 로렌스 하버가 어색하게나마 소개해주는 형식을 취했다.
“나디아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각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디아에게?”
“예.”
웃는 얼굴이 서글서글했다. 언뜻 사교성 좋은 청년으로만 보였지만, 남편 앞에서 당당하게 이름을 부르며 친분을 과시하거나 어떤 말을 들었는지 부연은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속이 마냥 해맑지는 않은 것 같았다. 루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직은 친구였다. 이미 거슬리기 시작했지만, 아니, 존재를 안 순간부터 거슬렸지만, 범인으로 판명되기 전까지는 적대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들었는지 궁금하군. 내 부인이 친구에게 나에 대해서 뭐라 말했을지.”
“하하, 짐작하고 계시는 그대로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 짐작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는 뜻일세.”
“아시다시피 나디아는 거짓말에 참 서투니, 각하께서 그녀의 진심을 알고 계신다면 그대로일 겁니다.”
끝까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을 작정이라 이거지. 루크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짜냈다. 황태자는 물론, 황제 앞에서도 이만큼 힘내서 노력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루크는 나디아를 위해서라면 없던 비위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거슬린다고 생각하며 봐서 그런지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모든 부분이 거슬렸다. 예를 들면 성실한 청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나 눈치를 살피는 갈색 눈동자나, 예의를 지키는 척하지만 나디아는 존중하지 않는 단어 선택 같은 것들이 그러했다.
“그래? 그렇다면 더 묻지 않겠네. 다만 이상하군. 나디아는 내게 친구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거든.”
“그건…….”
“이렇게 훌륭한 친구가 있었을 줄이야. 진작 소개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루크는 억지로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렌스 하버는 미소를 목격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루크는 로렌스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작부인과 있을 때는 헤벌쭉 벌어져 모자라 보이는 미소였다면 지금은 마치 20년 이상 성직에 종사한 성직자처럼 자비로운 미소였다.
내가 보고 있는 사람이 스테이턴 공작 맞나. 로렌스는 눈을 껌벅거렸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스테이턴 공작과 똑같이 생긴 성직자가 서 있었다. 눈 뜨고도 꿈을 꿀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용서해줄 것 같은 자애로운 미소를 보고 힘을 얻었는지 제임스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아시다시피 각하.”
자꾸 뭘 안다고 하는 건지.
“나디아는 지금 무리하고 있습니다. 워낙 정신이 없으니 각하께 제 이야기를 할 정신이 없었을 겁니다.”
“…….”
“각하께서도 최근 바쁘신 듯하니 아무래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겠지요.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나디아는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나디아가 힘들어한다고? 진짜냐? 루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로렌스 하버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그는 나디아가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랭커스터 가에 있는 마차를 모조리 부수더라도 그녀가 브릿 후작 부인에게 가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해두었다. 말이라도 타고 가려 한다면 다 팔아 버려도 좋다고 말이다.
아뇨, 아뇨, 아닙니다! 로렌스 하버는 결연하게 고개를 미세하게 내저었다. 고개를 흔들면 제임스에게 들킬 테니 눈알만 열심히 굴렸다. 나디아는 체력적으로 힘들어하기는 했지만 브릿 후작 부인에게 가는 걸 정말 좋아했다. 제임스의 말처럼 안쓰러울 만큼 힘들어했다면 로렌스는 벌써 마차 바퀴부터 빼내어 팔아버렸을 것이다.
신입의 결연하고 절박한 부정을 확인한 루크가 다시 제임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초면에 무례한 줄은 압니다. 하지만 전 나디아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습니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하네.”
“감사합니다.”
루크의 미소가 더욱 자애로움을 뽐냈다. 로렌스 하버는 자애 뒤에 숨은 살의를 읽고 바싹 긴장했지만, 제임스는 안심하고서 생각해두었던 말을 쏟아냈다.
“공작부인의 자리는 나디아에게는 너무 벅찬 역할이 아닐까요? 황실의 고귀한 분이라면 모를까, 그 애에게는 다른 행복이 어울릴 겁니다.”
“다른 행복이라면?”
“억지로 발돋움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만나는 거겠지요.”
예를 들면 나 같은.
로렌스 하버는 이제 제임스 밀리언이 정녕 미친놈으로 보였다. 남편의 면전에 대고서 부인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강조하며 웃는 사람이 미친놈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비록 루크가 그 미친 소리를 듣고도 자애롭게 웃고 있다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그 밑에는 살의가 들끓고 있었다. 저걸 왜 못 느끼지?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더니.’
경악에 찬 로렌스 하버와 달리 제임스는 제 예상이 맞아떨어졌다고 환호를 부르고 있었다.
스테이턴 공작은 셀리아 황녀에게 마음이 기울어 나디아가 성가셔진 게 틀림없다. 처음에는 걱정하는 척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공작은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도리어 흥미를 보였다.
‘데리러 왔기에 혹시나 했더니.’
소문이 모두 거짓이고, 나디아와 사이가 좋은 줄 알고 잠시 초조해졌었다.
그러나 바람을 피우는 사람 중에는 배우자에게 미안해져서 더 잘해주는 타입도 있다고 한다. 스테이턴 공작은 그런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제임스에게는 더 잘된 일이었다. 일말의 동정도 남겨두지 않는 타입이었다면 나디아에게는 이용 가치가 없다.
하지만 소문이 모두 진실도 아닌 것 같았다.
‘소름 끼치게 잘생기지는 않았는데.’
제임스는 내심 아니꼽게 공작을 관찰했다.
안타깝게 엇갈린 사랑과 재회의 주인공답게 소문 속 스테이턴 공작은 우스갯소리로 ‘짐승 가죽을 벗고 미남이 나왔다’고 말할 정도로 소름 끼치게 잘생긴 기사였다. 그러나 턱을 거뭇하게 덮은 수염 때문에 잘생겼다는 인상보다는 야성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더불어 나이도 제임스 자신보다 더 많아 보였다.
이목구비가 너무 날카로운 인상이라 무서웠고, 덩치는 크지만 남자는 크다고 다가 아니다. 저 덩치로도 역할을 다 못할지 누가 아는가? 다시 봐도 제가 더 낫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스테이턴 공작이 나디아를 성가셔한다는 점이다. 공작은 나디아가 모자라다는 걸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브릿 후작 부인에게 교육을 부탁했다.
나디아를 걱정하는 친구로서 그녀를 떠맡을 의사가 충분히 있고, 그의 의도를 파악할 만큼 영리한 인재라는 걸 어필하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
루크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나디아의 친구로서의 의견인가? 나디아는 공작부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만, 그녀에게는 조금 더 편안한 자리가 맞을 겁니다.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빌어먹을, 알긴 뭘 알아. 한계였다. 루크는 만들어낸 웃는 얼굴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제임스의 어깨를 짚었다. 제임스가 말을 멈추고 루크를 올려다보았다.
“알겠네.”
“예?”
“뭘 말하는지 알겠다고. 그보다 내가 지금 바빠서.”
“예, 예에. 귀한 시간을….”
“죄송하다는 것도 알겠네.”
“죄송…, 예.”
“알겠다고.”
얇은 꺼풀을 뚫고 살의가 미세하게 새어 나왔다. 제임스가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지만, 스테이턴 공작은 여전히 웃고 있어 제 착각이라 여겼다.
꽤 멋들어진 인사를 남기고 제임스가 사라졌다. 루크는 제임스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장갑을 벗어 던졌다. 제임스의 어깨에 닿았던 장갑이었다. 벗어 패대기치고도 화가 안 풀리는지 발로 짓이겨 밟았다. 장갑이 제임스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각하?”
“빌어먹을! 빌어처먹을!”
이제 각하는 ‘빌어먹을’밖에 못하시는구나……. 로렌스 하버는 사납게 일그러져 화를 내는 루크의 얼굴을 보고 안도했다. 웃는 얼굴을 보고는 불안해지고, 화내는 얼굴을 보고는 안심을 한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됐지만 사실이 그랬다. 루크는 자애롭게 웃는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남자였다. 외모와는 별개로 말이다.
“제 말이 맞죠? 저 새끼 이상하죠?”
“빌어먹을, 저게 어디가 친구야?”
“그러니까요!”
“빌어먹을, 넌 말 한마디 안 하고 이걸 어떻게 안 거냐?”
“감이죠. 딱 보면 감이 오잖습니까.”
로렌스 하버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루크는 그를 나디아 곁에 붙여놓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실력은 미덥지 못했지만 감 하나는 끝내주는 신입이었다.
루크 또한 공작 작위를 물려받고 영지를 다스리며 수많은 인간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황실을 제외하고는 지배자였기에 제게 향하는 감정을 계산할 필요가 없었다. 반항하면 죽이고, 충성하면 지킨다. 그의 행동 양식은 지극히 단순했다. 그래도 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저딴 건 친구라 부르지 않는다. 저런 걸 친구라 여기고 있을 나디아의 마음이 아까워.”
“부인께서도 딱히 저 새끼를 신경 쓰시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귀찮아하시던, 헉!”
“왜?!”
“부인께서 데리러 와 달라고 하셨는데!”
“……안내나 해라.”
역시 미덥지 못한 놈이었다. 로렌스 하버는 그대로 두고, 황녀의 호위 임무에서 해제된 기사단원 중 하나를 더 붙여놓아야겠다. 루크는 허둥거리는 로렌스 하버의 다리를 걷어차 주며 머릿속으로 적당한 사람을 골랐다.
‘저 새낀가?’
나디아가 귀찮아한다는 걸 봐서는 범인이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디아의 곁에서 제거해야 할 새끼인 건 틀림없었다. 숨 쉬듯이 나디아를 후려치고 무시하는 발언을 웃는 얼굴로 참아 넘기기는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참지 않았다면 아직은 ‘나디아의 친구’ 새끼의 입을 찢어버렸겠지. 그건 곤란했다. 나디아가 놀라니까. 그래도 아직 친구라서 나디아가 걱정할 테니까.
루크는 나디아가 상처 입지 않게, ‘자연스럽게’ 제임스를 치워버릴 궁리를 짜냈다.
브릿 후작 부인에게 묘책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