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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09화 (109/150)

109화

브릿 후작 부인은 조용히 나디아를 관찰했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지적해주겠지만 아직까지는 입을 댈 만한 실수가 없었다.

‘배우는 속도가 빠르네.’

의외로 나디아는 학습 능력이 나쁘지 않았다. 기억력이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몸으로 흉내내는 걸 잘하는 것 같았다. 눈썰미도 나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제는 기품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바싹 긴장하고 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았다.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덕분에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몇 배는 더 미인으로 보였다. 자세와 표정을 가다듬었을 뿐인데 말이다. 애초에 재료도 나쁘지 않았다. 브릿 후작 부인이 생각하기에 사람의 외모란 이목구비의 조형보다는 분위기였다. 분위기는 타고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후천적 교육과 성격에 의해 만들어진다.

화술은 아직 모자라지만 크게 실수를 하지 않는 한 괜찮았다. 공작 부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그녀를 에스코트할 스테이턴 공작이 입을 열 때마다 큰 실수를 터뜨려줄 테니 나디아가 주목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쪽은 안나 책임이니까 난 모르는 일이야.’

초면부터 시비를 걸기는 했으나, 브릿 후작 부인은 나디아보다 루크가 더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쪽은 잘라낼 수도 없는 스테이턴의 가주라 뭐라고 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녀는 후계자를 철저하게 교육시켜야 한다고 여러 번 주장했다. 그러나 선대는 “스테이턴은 영지에 머물 것”이라며 영지 운영에 필요한 교육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다고 그녀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았다. 안나는 선대의 주장에 토를 달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난 녀석이라 곁에 있으면 풍파가 많을 텐데, 사람들 앞에 내놓자마자 홀랑 벗겨먹힐 것 같은 순둥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젊었을 때처럼 참견이 심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참을 수 없었던 걸 보면 사실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셈이다.

‘대체 어딜 보고 반했을까?’

다시 말하지만 브릿 후작 부인은 나디아를 좋게 보는 편이다. 올곧고 솔직한 사람을 진심으로 싫어할 만큼 브릿 후작 부인은 꼬인 사람이 아니었다. 저를 향한 호감을 훤히 드러낸 녹색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브릿 후작 부인은 몸을 뒤집어 배를 보여주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짐승이 약점인 배를 보여주는 건 충성과 신뢰의 증거라고 하던가.

온후한 분위기와 다정한 성품은 수수하지만 확실한 장점이었다. 귀족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장점이었다. 흔해 보이지만 사실은 흔하지 않다.

양심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토록 선한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브릿 후작 부인의 머릿속에서 그건 강아지를 발로 걷어차는 행위와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장점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듣기로 루크는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여 다짜고짜 청혼부터 한 모양이던데…….

짐승처럼 감 하나만은 좋은 녀석이니, 첫눈에 나디아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걸 꿰뚫어보았는지도 모르지. 이따금 인간이라는 게 오히려 믿기지 않는 루크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루크 그놈이라면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나디아는 어째서? 루크 그놈의 어딜 보고 저리 반한 것인가?

“듣자하니.”

브릿 후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수를 놓고 있던 나디아가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면서도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기특하다, 고 저도 모르게 생각한 브릿 후작 부인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제 의지와 달리 정이 들 것 같은 게 영 불안했다. 나디아는 가만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 돼.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보여….’

인정하면 지는 것 같으니까 절대 인정하지 않을 테다.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고는 인정하지 않을 거야. 안나에게는 무조건 비밀이다….

“결혼 전에는 루크를 전혀 몰랐다고 하던데.”

“…네. 루크가 말하기로는 결혼 전에 만났었다고 하는데 저는 전혀 기억에 없어요.”

“그 애를 보고도 기억하지 못했다고요?”

나디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크를 욕할 셈은 아니지만 그는 면도 전이나 후나 잊기 쉬운 인상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타입이다.

“네. 저희 가족들 누구도 스테이턴과는 인연이 없었으니까요….”

“그건, 그랬겠지만….”

“하지만 루크는 만난 적이 있다고 하니 제가 잊어버리고 만 거겠지요.”

“만난 게 아니라 그 애가 일방적으로 당신을 보았던 것일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솔직히 그 꼴을 어떻게 잊냐고요. 한 번 보면 잊어버릴 수도 없지. 어딜 봐서 대귀족이고 공작이야….”

“전 나쁘지 않았어요. 지금도 물론 멋지지만 전에도 멋있었는걸요.”

첫날밤에 기절하고 말았다는 건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다. 나디아는 그동안 배운 대로 브릿 후작 부인을 흉내내며 싱긋 웃었다. 브릿 후작 부인은 그 순한 얼굴을 미묘하게 바라보았다. 제 표정을 흉내내고 있을 텐데, 나디아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제 것과 달리 가시 하나 없이 부드러웠다.

루크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행복한 모양인지 그녀의 주변만 봄바람이 부는 듯했다.

“……그 애의 어디가 그리 좋아요?”

“루크요?”

“솔직히 말해서 공작이라는 지위와 스테이턴이라는 배경, 부를 떼어내면 그 애의 어디가 그리도 좋은지 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내 손자 뻘이지만, 무식하고 과격하고?.”

“상냥하고 다정한 점이요.”

“뭐…….”

얼빠진 브릿 후작 부인을 보고서 나디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들 그런 표정을 지으시더라고요. 안나도, 흑곰 기사단 분들도요.”

“…….”

“루크가 사실은 꽤? 급한 성격이라는 건 저도 알아요.”

모를 수가 없다. 루크도 나디아만큼이나 연기에는 서투른 사람이었다. 나디아가 보이면 입을 다물어 버리지만, 루크는 목소리가 크다. 기사단을 향해 지르는 소리는 멀리 있는 나디아에게도 이따금 들렸다. 욕설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음…….”

나디아가 말을 멈추고 브릿 후작 부인을 흘긋 보았다. 뺨이 붉게 물들이고는 작게 말했다.

“주제 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자주 상기시켜주어야 할까요. 당신보다 신분이 높은 여성은 한 손에 꼽혀요. 당신의 주제는 뭘 해도 좋은 주제이니 쓸데없는 신경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서….”

“네?”

이번에야말로 정말 놀랐다. 브릿 후작 부인은 평소의 얼음장 같던 표정마저 무너뜨리고 입을 떡 벌렸다. 지켜주다니 누가 누굴……. 나디아가 말한 ‘주제’가 무얼 말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디아는 민망한 듯이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이미 결혼했고 무를 수 없으니까 좋은 점만 보려고 했어요. 그게 저한테도 좋으니까요. 그런데 보다 보니까, 루크는 자기 몸을 아끼질 않더라고요. 매일 어딘가 다치고, 구르고…. 뻔히 피가 나는데도 자긴 괜찮대요. 아프지도 않다고 해요.”

진짜 괜찮아서 괜찮다고 한 걸 텐데. 브릿 후작 부인은 선대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매년 계절 하나를 스테이턴 성에서 보냈던 만큼 흑곰 기사단과 스테이턴 핏줄의 괴물 같은 부분을 잘 알고 이해했다.

“자긴 강하니까 괜찮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요.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요. 다치면 누구나 아프잖아요. 오해를 사면 괴롭고요….”

“……그렇, 겠죠.”

아프지 않은 건 아니겠지. 통증의 역치가 높을 뿐이겠지. 오해를? 알면 신경을 쓰기는 하겠지? 브릿 후작 부인은 억지로 납득해보려 노력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가족들의 과보호 속에서 살았잖아요.”

“그건, 유명한 이야기죠.”

“랭커스터에게는 과보호의 피라도 흐르는 걸까요. 저도 랭커스터였는지 자신은 돌보지 않고 괜찮다고 하는 걸 보니까 지켜주고 싶고, 걱정하게 되더라고요. 누가 누굴 걱정하느냐고 핀잔을 줄 만도 한데 루크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고맙다고 해줘요. 그러다 보니까 더 걱정하게 되고, 더 지켜주고 싶어서 쫓아다니게 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됐어요.”

“그 애가 사랑스럽다고….”

“네!”

나디아는 활짝 웃었다.

저보다 훨씬 커다랗고 강한 사람을 보고서 지켜주고 싶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흔할까. 보호받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루크가 나디아의 어떤 부분에 반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있게 대답해놓고서 부끄러웠는지 나디아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긴 하지만’, ‘마음이 그렇다는 뜻이고요.’, ‘어떤 점이 좋냐고 물어보신 거였죠.’, ‘대답이 된 것 같지는 않은데 다시 생각해볼게요.’…… 등등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브릿 후작 부인은 옅게 웃고 말았다.

‘안나, 네 말이 맞아.’

지켜보기는 힘든 부부라더니,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

“각하!”

루크는 말 안장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가 땅에 발을 딛기 무섭게 로렌스 하버가 달려와 말의 고삐를 건네받았다. 기사보다는 종자에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기사 서임을 받기 전까지 오랫동안 종자 노릇을 해 온 덕분이었다.

“혼자 오신 겁니까? 앨런 경은?.”

“부인을 만나러 오는데 보좌관까지 달고 다녀야 하나? 나디아는?”

“곧 내려오실 겁니다. 아직 4시 반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기다리지. 그보다…….”

“아. 그쪽도 저택 안에 있을 겁니다.”

흐려지는 목소리 속에 생략된 말을 로렌스 하버는 단번에 눈치챘다.

오늘로 엿새째. 사람을 성가셔하는 브릿 후작 부인의 성격상 제아무리 먼 친척이라도 며칠씩 부를 리가 없으니 오늘도 왔다면 일부러 나디아를 만나러 오는 게 분명했다.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는 ‘나디아 마샤 스테이턴’이 되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아무래도 그 황제와 황녀가 다스리는 도시이니 비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놈이 하나 둘쯤 더 있을지 모른다. 그 비상식적인 놈이 나디아의 친구일 수도 있고….

“마침 보이네요. 2층의 세 번째 창문 앞에 서 있는 놈입니다.”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로렌스 하버가 말하기도 전에 루크는 2층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창문 앞에 선 남자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루크는 창문 앞에 선 낯선 남자를 보며 씩 웃어 주었다.

아직은 친구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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