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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08화 (108/150)

108화

꿈이로군. 루크는 금세 깨달았다. 피부에 닿는 달콤한 공기는 온화한 봄의 흔적이었다. 라 트에빌레를 앞둔 연말에 이토록 포근한 날씨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공기가 아니라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꿈이라 알려주었다.

이곳은 랭커스터 저택 인근의 공원이었다. 루크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드물게 꿈을 꿀 때마다 보았던 풍광은 그에게 매우 익숙했다.

나디아와 함께 라 먼스트로드로 올 때만 해도 루크는 그녀와 매일 이 공원을 산책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느긋하게 산책 한 번 못해봤군.’

매일 산책은커녕 변변한 데이트 한 번 못할 줄이야 알았겠는가?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되짚어보던 루크는 고작 닷새를 잡아먹은 황제와 황녀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기로 했다. 괘씸죄가 적용된 결과였다.

사박거리며 마른 햇빛이 부서졌다. 꿈속이라도 눈이 따갑다. 루크는 감상에 젖었다. 여기서 나디아를 처음 만났다. 건국제가 가까워지면 나디아와 함께 이 풍광을 보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나디아와 이 공원에 오면, 봄날의 부랑자가 자신이었다고 고백하자. 나디아가 놀랄지, 웃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결코 자신을 바보 취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끄러워지기도 하겠지만? 나디아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였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

봄날의 부랑자였다는 고백이야, 버틸 만한 창피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공원은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작은 호수를 끼고 그다지 길지 않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이따금 벤치가 놓여 있어 햇살을 받으며 쉬기에 좋았다. 근방 치안이 좋은 편이라 부랑자도 없었기 때문에 여성들끼리만 산책을 즐길 수도 있었다. 나디아는 점심 식사 후 이 공원에서 산책을 즐겼다. 워낙 랭커스터 저택과 가까운 거리라 혼자 잠깐 거닐다 가기도 했다.

루크가 이걸 알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루크는 걸음을 멈추었다. 벤치에 앉은 나디아가 보였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서 잔잔한 호수를 보고 있었다.

청혼을 한 다음 날부터 루크는 매일 공원을 찾았다. 차마 그녀 앞에 나설 용기가 없어서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는 잠시라도 그녀를 보고 싶어 무작정 찾아간 것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스토커가 따로 없었다. 청혼까지 해놓고도 정작 상대에게는 말 한 마디 걸지 못한 소심함도 창피하다. 루크는 청혼 후 결혼식 전까지 그랬듯이 그녀가 보이는 곳에 주저앉았다.

“역시 답장은 못 받을까….”

귀를 기울이면 나디아의 작은 혼잣말도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녀는 퍽 우울한 듯이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때는 너무 두근거려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공작가로부터 협박 같은 청혼서를 받고서 생각지도 못한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우울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야하고 끈질기고 유치하고 치사할 뿐만 아니라 스토커이기까지 하다는 걸 알면, 이제야말로 질리고 말 것 같았다. 이건 걱정 운운할 핑계도 없지 않은가.

“결혼하면 아예 연락이 끊겨버릴 텐데….”

그리고 낮은 한숨이 뒤따랐다. 루크는 그녀 앞에 나서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말이라도 걸었으면 어땠을까. 이때의 그녀가 무엇을 고민하고, 왜 슬퍼하고 있었는지? 지금은 물어볼 수도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우울한 이유가 결혼이라고 해도 답장이나 연락이 끊기는 걸 걱정하는 걸 보아 다른 고민거리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하긴, 그 애는 아쉬워 하지도 않으려나…….”

체념 섞인 목소리가 안타까웠다. 그가 모르는 나디아, 그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고민이다. 루크는 나디아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정해진 것처럼 그 다음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

“……빌어먹을.”

입에 붙어버린 말버릇을 뱉어낸 것은 제 어깨와 허리에 닿아있는 체온이 없다는 걸 확인한 직후였다. 그를 꼭 끌어안고 잠든 나디아 옆에서는 꿈도 꾸지 않고 자거나, 아예 잠들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라 눈을 뜨자마자 더러운 기분에 휩싸일 이유가 없었다.

루크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아직 잠이 덜 깨어 몽롱하다. 눈을 들어 두꺼운 커튼에 가려진 창 밖을 보았다. 시간을 확인해보지 않아도 이미 점심나절이 지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꿈을 꾸기는 했지만 나디아가 나오는 꿈이었고, 오랜만에 잠들었기 때문인지 컨디션은 근래 중 가장 좋았다.

“잠깐 쉬다가 나디아를 만나러 가려 했는데.”

컨디션과는 별개로 목은 잠겨 있어 마치 긁는 듯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이면 하루 일곱 시간은 자 주어야 한다는 걸, 다시 말씀드려야 하나요?”

“……안나….”

루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일어나자마자 잔소리를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안나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닫아 두었던 커튼을 열어젖혔기 때문이었다. 겨울 햇살이 눈을 찔렀다.

겨울이지, 봄이 아니라. 몽롱한 가운데 헐벗은 가지가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성인이 되신 후로는 가급적 생활 태도 면에서는 지적을 드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그랬나?”

“나름대로는요. 하지만 각하께서는 이따금 본인이 인간이라는 걸 잊으시는 듯해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이번만큼은 내 잘못이 아니다.”

“쉴 시간이 있었음에도 취미 생활에 투자하느라 밤을 새신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

“취미 생활?”

안나는 비스듬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손으로는 따뜻한 물잔을 내밀었지만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차가웠다.

“잠든 부인의 얼굴을 구경하시는 게 취미 생활이 아니면 뭡니까?”

“…….”

“조금이라도 주무시라 들여보낸 침실에서, 날이 밝도록 기둥처럼 서서 부인 얼굴만 구경하다 나오시니 기가 찰 수밖에요.”

“…….”

“먹지도, 자지도 못하셨으니 예민해지실 만도 합니다. 제이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루크는 건조한 목으로 물 한 잔을 단숨에 넘겼다.

“나디아는 알고 있나?”

“무얼요? 각하께서 황녀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요?”

“…….”

“아니면 황녀가 각하의 옛 연인이라는 소문?”

“안나, 제발. 일어나자마자 토하고 싶지 않다.”

“모르고 계십니다. 애초에 브릿 후작저와 랭커스터 저만 오가실 뿐, 다른 사람은 만나지도 않으셨는데 허튼 소문을 접할 틈이 있었겠나요.”

안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용케도 여기까지 소문을 내 주었다 싶다니까요.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으라는 듯 귀에 쑤셔박아 버리는데 도리가 없지요.”

“……여긴 황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으니. 그 얘기는 됐다.”

“그래요, 헛소문이야 각하께서 부인과 사람들 앞에 나서기만 해도 해결될 테니까요.”

“나서기만 하는 걸로는 모자라지 않겠나?”

루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셀리아가 이끄는 대로 라 먼스트로드의 상점가를 쏘다녔다. 이따금 가게를 방문한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 그는 셀리아의 옆에 서 있기만 했다. 그들은 저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그를 흘긋흘긋 보았다.

셀리아와 같은 공간에 서 있기만 했을 뿐인데 그 소문이 났다. 그렇다면 소문을 없애기 위해서는 적어도 아주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안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평소 그대로만 보여주셔도 충분합니다. 오히려 그 이상 노력하지는 마세요. 각하께서는 연기가 극단적으로 서투르시니, 연기하려고 하셨다가는 의심만 사게 될 겁니다.”

“…….”

“그리고 그 이상으로 하셨다가는 스테이턴 가의 위엄에 문제가 생깁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부부의 모범이라고 생각한다만.”

“……예에, 지극히 정상적이시라 걱정스러운 겁니다. 하지만 극약 처방이 필요한 시점이지요.”

안나가 자애롭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리지 않을 테니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해주세요. 부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요.”

“나디아의 명예….”

루크는 앓는 소리를 흘리며 머리칼을 헤집었다. 나디아가 소문을 모른다고, 소문을 일소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모르는 동안 땅에 떨어진 나디아의 명예를 회복해야만 했다. 소문이 반전되면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나디아가 아니라 셀리아가 되겠지만, 그는 제 탓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부정적으로 오르내리게 된 나디아에게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이래서 이 도시가 싫어.”

생각지도 못한 일들로 너무 많은 말을 한다. 저 하나라면 괜찮았지만, 이제는 나디아가 있다. 안나나 제이, 스테이턴 영지민과는 입장이 다르다. 나디아는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까지 함께 감당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하셔도 소용없지요. 부인은 브릿 저택으로 가셨습니다. 식사하신 후에 오늘은 부인을 데리러 직접 가시지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어련하시겠어요.”

비아냥거리듯 말하면서도 안나는 착실하게 루크의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어느새 거뭇하게 턱을 덮은 루크의 수염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제이가 하소연하듯 털어놓은 이야기대로 루크는 손가락으로 연신 수염을 문지르면서도 면도할 마음은 없는 듯했다.

길이가 좀 짧기는 하지만, 한창 야수 공작이라 불렸던 시절의 험악한 인상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 새끼 얼굴도 봐야 하니까 말이야.”

남편이 부인을 보지 못하는 동안, 남의 부인과 한 시간이나 대화를 나눈 ‘친구분’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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