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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07화 (107/150)

107화

“빌어먹을!”

“한 번만 더 말씀하시면 쉰 번째입니다, 각하.”

“빌어처먹을!”

“쉰 번째….”

“빌어먹을과 빌어처먹을이 같나?”

“다를 건 또 뭡니까….”

제이는 성질을 부리는 루크를 너그럽게 보아 넘겼다. 이번만큼은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제 주군이 설마 황녀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날이 올 줄은 그 역시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제 아주 심한 욕은 안 하시네요.”

“나디아 앞에서 혹시라도 실수하면 안 되니까. 이런 건 습관이다.”

“황제 폐하께는 꽤 적나라한 욕설을 퍼부으셨다면서요.”

“난 피해자니까 욕 정도는 해줘도 괜찮아. 황제가 아니라 가해자의 부모에게 불평을 쏟아낸 것뿐이다.”

“혹시 그래서 일부러 당해주신 겁니까?”

루크는 대답 대신 콧잔등을 찌푸렸다. 황제에게 실컷 퍼부어주고 오기는 했지만 아직 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셀리아의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간 불쾌감은 마치 벌레가 몸을 타고 오르는 감각과도 비슷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당황하기도 해서 잠시 굳었다.

“방심했다.”

“각하께서요?”

제이가 눈을 깜박거렸다. 피해자 운운하며 기세등등하기에 황녀를 떼어내기 위해 일부러 당해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셀리아 전하는 전혀 단련하지 않은 일반인으로 보였습니다만.”

셀리아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닷새간 노출이 높은 의상을 골라 입었다. 불경하지만 어쩔 수 없이 관찰하게 된 그녀의 몸에는 필요 이상의 근육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반면 저 덩치에도 불구하고 루크는 표범처럼 날렵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일반인에 불과한 셀리아의 습격을 그가 피할 수 없었을 리가 없었다.

루크가 말했다.

“제이, 너 같으면, 너구리인 줄 알았던 사냥감이 갑자기 날개를 펴고 뛰어든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건 또 무슨 비유입니까. 우선 셀리아 전하는 너구리가 아니고….”

“때리려는 줄 알았지, 설마 만질 줄이야 알았겠냐고.”

루크가 참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제길, 몸을 더럽히고 말았어….”

“각하 스스로 말씀하셨듯이 피해자일 뿐이지 않습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아니. 피할 수 있었는데도 피하지 못했다. 나디아에게 미안한 짓을 했어. 이 몸은 나디아의 것인데. 이 더러운 몸으로 나디아를 만날 수 있겠냐.”

만약 농담이라면 가볍게 받아쳐주겠지만 루크는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말주변이 모자라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제이였지만, 그는 때때로 루크가 진심으로 저딴 말을 지껄일 때마다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욕을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말이 수십 가지였겠지만 아쉽게도 그와 루크 사이에는 신분 차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래서 랭커스터 저택으로 귀가하지 않고 스테이턴 저택으로 돌아오신 거군요.”

“다 자고 있을 거 아니냐. 랭커스터 저택으로 돌아갔다면 네가 내 목욕물을 준비해야 했을 거다. 잠든 하인들을 두들겨 깨울 수도 없었을 테니까.”

랭커스터 저택의 하인들은 깨우면 안 되지만, 기사는 목욕물 준비로 시종처럼 부려먹어도 된다는 말인가. 제이는 이 부당한 대우가 이제는 부당하게 느껴지지도 않아서 조금 슬펐다.

“각하께서 두 시간 넘게 목욕하시는 건 처음 봤습니다.”

“빌어처먹을….”

대화가 욕설 뿐이었던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루크는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비벼 닦았다. 나디아가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꼭 머리칼을 말리라고 당부한 덕분에 욕설을 하면서도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젖은 머리칼을 말리지 않으면 감기 걸려요. 스스로 기억하는 한 감기는커녕 잔병도 치러본 적이 없었지만 나디아의 말에 따르는 데에는 조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인들 못할까. 독이라도 기꺼이 마실 수 있었다.

나디아가 없는 자리에서도 부지런히 지시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모습은 칭찬받을 만했지만, 안타깝게도 스테이턴 저택에는 그들의 안주인이 없었다.

“그래도 잘된 일 아닙니까? 비록 약간의…….”

잠깐 말을 멈춘 사이 제이의 시선이 루크의 다리 사이로 흘러갔다. 제이는 이 시선 또한 파렴치한 성추행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피해가 발생했지만, 셀리아 전하의 호위에도 해제되고 라 트에빌레 전까지 공식 일정은 모두 취소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솔직히 황제 폐하께서 거기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분 성격상 호위 해제로 그칠 줄 알았는데요.”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요구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다.”

“정신적….”

네가? 제이는 비아냥거리는 속내가 들키지 않도록 입을 다물었다.

“빌어먹을, 소름이 돋는군.”

루크는 화풀이하듯 머리칼을 타올로 벅벅 긁었다. 제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각하, 수염이 꽤 자라지 않았습니까? 면도 도구를 가져올까요?”

“음.”

손가락으로 턱 부근을 더듬으니 거칠한 수염이 만져졌다. 나디아를 만나지 못한 시간의 증거였다.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버려두지.”

“제가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제이가 픽 웃으며 짓궂게 권유했다. 루크의 속내야 뻔하다. 나디아를 만날 때까지 내버려두었다가 그녀에게 면도해달라고 조를 참일 테다. 수염을 기르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나이다운 모습이 보기 싫진 않았다. 루크는 지친 듯 침대에 몸을 누였다. 푹신한 이불이 늪처럼 그의 몸을 끌어 당겼다.

“저녁에 나디아를 만났더라면….”

이다지도 지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는 인내심이 닳아버린 스스로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멋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핏줄에 새겨진 의무를 잊지 않으려 했다. 특히 황제에게 트집을 잡힐 만한 행동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스테이턴을 선대가 물려준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거짓된 충성이나마 필요하다.

닷새나 만나지 못해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 따위 상대하지 말고 곧장 뒤돌아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나디아를 깔아뭉개는 셀리아의 낯짝을 보고 있노라니 분노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구 때문에 잠든 나디아의 얼굴만 겨우 보고 버텨야 했는데.’

나디아가 뺨을 쓰다듬으며 힘내, 라고 말해주었다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조금은 어른스럽게 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루크는 눈을 감았다.

어때? 나 예쁘지?

질문처럼 들렸지만 셀리아는 긍정 외의 대답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루크는 단 한 번도 셀리아가 예쁘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상적인 조형을 이룬 이목구비 따위 그에게는 그 어떤 감흥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눈은 눈이구나, 코는 코구나, 입은 입이구나. 그 정도였다. 기능에 문제가 없다면 어떻게 생겼든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나디아는 달랐다. 루크가 사람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낀 건 오직 나디아밖에 없었다.

“나디아 보고 싶다….”

“날이 밝으면 만나러 가실 수 있습니다, 각하.”

“곧….”

목소리가 가물거리며 이내 흩어졌다. 제이는 픽 웃으며 루크의 머리에 걸쳐진 타올을 걷어냈다. 루크는 이미 깊은 잠에 빠진 뒤였다.

닷새간 루크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

아무리 인간 같지 않은 체력을 자랑하는 루크라고 해도 익숙하지 않은 황궁에서 종일 긴장한 채로 버티는 게 쉬웠을 리 없다. 야산과 전장이라면 몇날 며칠을 새더라도 끄떡없었겠지만, 라 먼스트로드? 그 중에서도 황궁은 취약한 장소다.

심지어 그는 닷새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겉으로 보이기에는 멀쩡했다는 것이 인간답지 않은 점이었다.

셀리아는 루크를 유혹하기 위해 ‘세련된 기술’을 여럿 시도했는데, 그 중에서는 그를 기다리게 하며 애태우는 방법이 많았다.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므로, 상대가 루크가 아니었다면 십중팔구 통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이가 알기로 루크는 셀리아를 기다리는 동안 오로지 나디아만 생각했다.

제이는 진심으로 펄쩍거리는 아랫도리를 목격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 광경으로 제 주군이 부인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는 걸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제일 고되지 않았나? 정신적으로는…….’

어쨌거나 셀리아가 저 좋을 대로 휘둘러준 통에 루크는 제대로 식사시간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의 임무는 셀리아의 호위였으므로, 그녀가 먹고 쉬는 동안에도 그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것이다. 느긋하게 식사를 즐길 시간 따위가 있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셀리아가 루크의 식사 사정을 살뜰하게 챙길 성격도 아니다.

새벽에나마 수면을 취해 휴식하면 좋으련만, 루크는 그나마의 시간조차 잠든 나디아를 바라보는 데에 모조리 쓰고 말았다. 그러니 지칠 만도 한 것이다.

루크가 정말 정신적인 피해 보상을 요구한다면, 그건 ‘성추행으로 인한 충격’이 아니라 ‘닷새나 나디아를 제대로 만나지 못하게 피를 말렸기 때문’이어야 했다.

‘꼴값이다, 꼴값이야.’

이래서 나이에 맞는 경험이 중요한 거다. 뒤늦은 첫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하루하루 목격하고 있었다.

혀를 차면서도 제이는 착실하게 루크의 머리 밑에 베개를 끼워넣고, 이불을 덮었다. 침실을 나서기 전에는 막 떠오르는 햇살이 주군에게 닿지 않도록 두꺼운 커튼을 꼼꼼하게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부인을 만나러 달려가겠다고 했지만, 제이가 보기에 그건 아무래도 오후나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꿈에서나 만나고 계시겠지. 제이는 침실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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