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18. You raise me up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대가일까. 최근 제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종종 갖게 된 레너드는 눈앞의 광경이야말로 고민 없이 살아온 29년 인생에 대한 대가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늘 그래왔듯이 성가셔지면 잘라내고, 필요 없어지면 외면할 수 없는 이 골칫덩이는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 것인가.
‘말려볼 걸 그랬나…….’
그러나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었으니, 이 상황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셈이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레너드는 겨우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게 소용없을 거라 충고했잖느냐.”
“소용이 없지는 않았어요!”
“……물컹했다며.”
친구의 아랫도리 사정을, 그것도 여동생이 쥐어 보았다는 과정을 통해 알고 싶지는 않았다. 레너드는 이성애자였으므로 같은 사내의 아랫도리를 굳이 그려보지 않았다. 비위가 상한 레너드는 눈물로 엉망이 된 셀리아의 얼굴을 냉랭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이었다. 모처럼 일찍 일과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려던 레너드는 다짜고짜 들이닥친 이 골칫덩이가 진심으로 짜증스러웠다. 소용이 없을 거라는데도 부왕의 응원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더니, 본격적으로 유혹해보겠다 선언한 직후 바로 이 꼴이다.
‘그렇다고 바로 몸으로 덤빌 줄이야.’
고작 닷새 간이었는데 어지간히 초조해졌던 모양이다. 소문은 예상보다 반향이 커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정작 루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은 했다.
소문을 낸 셀리아도 이 정도로 소문이 빠르게 불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레너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라 먼스트로드는 아닌 척해도 야수 공작 이야기라면 귀를 쫑긋 세웠다. 멸시하고 조롱하는 듯해도 스테이턴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화제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황제가 사랑하는 황녀와의 비도덕적인 사랑이라니,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초조해진 셀리아는 불확실한 감정이나 체면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어서 가장 자신있는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걸 무참하게 무시당했으니, 제아무리 씩씩하고 오만한 황녀라도 울음을 터뜨릴 만했다.
레너드 자신도 제 외모에 자신이 있지만, 셀리아는 도가 지나쳤다.
애초에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매혹적인 미인이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 줄곧 어여쁘다, 아름답다는 찬탄만 듣고 자란 셀리아에게는 일반론이 통하지 않았다.
아첨과 아부를 걸러 들을 판단력은 황족의 소양이지만, 지나치게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셀리아만 탓할 수는 없다. 그런 환경이었다. 셀리아의 자부심은 레너드가 제 미래를 당연하게 여기는 자신감과도 일맥상통했다. 차이가 있다면 레너드는 끊임없이 위기감을 상기시켜 준 루크의 존재가 있었고, 셀리아에게는 라이벌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남자가 있을 수는 없단 말이에요!”
“셀리아, 아까도 말했듯이 남자라고 다 욕망에 약하진 않아.”
“거짓말! 남자는 모두 아랫도리 사정에 휘둘리게 되어 있다고요. 아름다운 여자라면 세우고 보잖아요? 열세 살 어린애든 일흔 노인이든.”
“……일단 나도 남자라는 걸 고려해주지 않으련? 남자도 나름 섬세한 부분이 있어.”
“스스로 조절할 수도 없는 기관에 휘둘리는 동물이 섬세…?”
화를 내며 울던 와중에도 진심으로 의아한 얼굴이라 레너드는 상처를 입었다. 편견이라 잘라 말할 수도 없는 현실이 더욱 그랬다. 레너드는 기묘한 상처를 받고 말았지만, 오히려 셀리아는 진정이 된 듯했다. 그녀는 눈가에 남은 물기를 부드럽게 닦아내었다. 레너드가 물었다.
“이렇게까지 창피를 당했으니 어리석은 시도는 그만둘?.”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오라버니.”
“…….”
셀리아는 눈물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얼굴로도 매우 멍청한 소리를 한다는 양 레너드를 한심하게 응시했다.
“스테이턴 공작은 화가 많이 났을 거다. 공식적으로 네게 창피를 주지는 않을 테니 소문을 내지는 않겠지만 지금쯤 아바마마께도 항의를 하고 네 호위 건을 거절했을 거야. 스테이턴 공작에게 빌미도 주었으니 아바마마께서도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으실 테지.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생각이란 걸 해보세요.”
“…….”
나 요즘 여기저기서 무시만 당하는 것 같은데. 착각이 아닌 것 같은데. 레너드는 “나는 어른이다, 나는 어른스럽다.”를 속으로 되뇌며 가까스로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제게 물러날 곳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소문이 어떻게, 얼마나 나 있는지 다 아시면서.”
“……아.”
“다음주면 몰브티 왕국에도 퍼질걸요. 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헛소문일 뿐이다. 고작 헛소문을 가지고 우리 모드리야에 트집을 잡을 수는 없어.”
“그건 오라버니 입장이죠. 시집을 가서 그 나라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 제 입장은 달라요. 제국이 평생 날 지켜주나요?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뒤에서 수군거릴 테죠.”
남자를 유혹하다 실패하고 성추행까지 감행했던 여동생은 언제 울었냐는 듯 냉정하게 말했다.
“저도 계산 밖이었어요. 야수 공작 소문을 지우는 김에 살짝 유리한 여론을 만들어두려고 했던 건데 그게 도리어 발목을 붙잡을 줄은…….”
“스테이턴을 아주 얕봤구나. 황실만큼이나 오래된 가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할 화젯거리지.”
“얕본 적 없어요. 오히려 얕보지 않았기 때문에 만전을 기한 거라고요.”
“그래, 그럼 네 실수는 실패를 상정하지도 않았다는 점뿐이로군.”
“실연으로 우는 여동생에게 꼭 그리 잔인한 말씀을 하셔야 해요?”
“……네가 언제 사랑했고 언제 상처를 받았지?”
“방금요. 가련하게도 오라버니를 찾아와 울었잖아요?”
레너드는 코웃음을 쳤다. 실연의 상처는 무슨, 셀리아는 울었지만 그건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레너드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가련한 여동생은 가진 적도, 본 적도 없어서 모르겠구나.”
“눈 앞에 있잖아요.”
“안 보여.”
“냉정하시기는….”
셀리아도 레너드와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레너드는 다시 한 번, 이 여동생이 자신과 무척 닮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꼴사나운 실패 직후라 싫지만? 루크를 상대로 실패만 거듭하는 부분까지도 어쩌면 닮았군.’
레너드에게는 다른 형제도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단연코 셀리아였다. 정이 깊다는 뜻이 아니다. 가장 닮았다는 뜻이며, 닮았기 때문에 파악이 쉬웠다. 반대로 잘 알기 때문에 어느 선 이상으로는 정을 주지 못했다. 거울처럼 닮은 남매를 보고 있노라면 제 단점까지도 보였다.
셀리아가 가장 먼저 아버지가 아닌 레너드를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저는 포기 못 해요. 본인을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요.”
“다른 방법?”
“저랑 결혼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죠. 소문은 차고 넘칠 정도로 퍼져 있으니까 적당한 상황을 만들어 쐐기를 박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잠깐, 셀리아. 루크가 결혼했다는 걸 잊고 있는 건?.”
“아니죠, 당연히. 이제부터 그 부인을 치워 버려야 하는데.”
“뭐?!”
피로가 단숨에 날아갔다. 레너드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저도 조금은 알아봤어요. 랭커스터의 팔푼이에 대해서는.”
“스테이턴 공작부인이시다. 말을 조심하도록 해.”
“?정말 이상해지셨네요, 오라버니.”
셀리아가 의심스럽게 레너드를 쳐다보았다. 제 여동생이 죽을 위기에 처하든, 울며 하소연을 하든 성가셔하는 비인간적인 냉정함은 똑같은데 기이하게도 도덕적인 사람처럼 굴었다. 레너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지만 모르는 척 시침을 뗐다. 셀리아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강압적인 결혼이었잖아요? 살살 구슬리고 위협하면 아무리 멍청해도 말귀 정도는 이해하겠죠.”
“셀리아, 아무리 몰브티 왕국에 시집가기 싫어도 이건….”
“그 여자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예요. 이어붙여 줄 적당한 남자도 있고요. 듣자하니 오라버니께서 그 결혼에 꽤 관여를 하셨던데, 혹시 그 여자와 아는 사이에요?”
“……아니, 전혀. 인사 한 번 나눈 적 없다.”
그 여자의 오라버니와는 술잔을 나눈 사이지만. 레너드가 시선을 굴렸다.
“그 여자가 먼저 이혼을 요구하면 루크, 그 고지식한 남자가 뭘 어쩌겠어요? …저로서도 나름 온건한 방법을 택한 거예요. 다짜고짜 죽이는 것보단 낫죠.”
“살벌하긴.”
“이제 와서 뭘 모르는 척을 하세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오라버니도, 루크도 처음부터 아바마마가 여기까지 생각해두었다는 걸 모르지 않잖아요. 루크가 예정대로 내게 푹 빠져주기만 했다면 죽이든 가두든 상관없었겠지만….”
“…….”
“아바마마는 여전히 어느 쪽이라도 좋으실 거예요. 당장은 루크의 요청대로 호위직에서 해제시켜주겠지만, 제가 밀어붙인다면 그것대로 내버려두시겠죠. 정 안 되면 헛소문 같은 건 무시하고 예정대로 몰브티 왕국에 시집보내면 그만일 테니까. 그러니까 고작 한 번 실패했다고 물러날 수 없어요.”
셀리아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레너드는 그제야 깨달았다.
셀리아가 고고한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루크를 유혹했던 까닭은 그녀가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순순하게 제 혼담을 받아들이고 있는 줄 알았건만, 그녀는 처음부터 몰브티 왕국에 팔려가듯 시집가기 싫었던 것이다.
몰브티 왕국의 왕비보다 모드리야 제국의 공작 부인의 형편이 더 나아서 ‘선택’한 게 아니었다.
“용서할 수 없어….”
“셀리아?”
“나를 모욕한 그 남자를 반드시 손에 넣어서 평생을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살게 하고 말 거예요.”
“……셀리아?”
“반드시 이혼을 시키고? 나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평생 괴롭혀주고 말 거야. 오늘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라고요! 그러기 위해 심약한 토끼 하나 위협하는 건 일도 아니지. 이혼당하고 울어버려라. 그렇게까지 굳건하게 정절을 지켰던 부인에게 버림받으면 꼴이 참 볼 만할 거야….”
그건 좀 구경하고 싶었다.
“두고 보자,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셀리아가 이를 으득 갈았다. 어째 고상을 떨고 있을 때보다 활력이 넘친다. 레너드는 심한 꼴을 당하고도 포기할 줄을 모르는 여동생의 근성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셀리아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왜.”
“……루크가 정말 고자는 아니겠죠?”
남편이 고자인 건 좀 곤란한데. 셀리아가 중얼거렸다. 레너드는 대꾸할 힘도 없어서 손만 내저었다. 이 골칫덩이가 신이 내린 고난인지, 쉬웠던 인생의 대가인지 몰라도 당장은 눈 앞에서 치우는 게 급선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