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일리야가 챙겨 준 샌드위치를 급히 입에 욱여넣고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황궁에 도착했다. 시간이 아슬아슬했지만 셀리아는 몸단장에 긴 시간을 쏟았고, 혹시 성질을 부릴 경우를 대비해 레너드를 데려다 놓았다.
석찬 시간에는 가까스로 맞추겠다고 생각하며 입궁한 루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레너드도, 석찬도 아니었다.
끝내 나디아를 보지 못하고 돌아온 루크는 무척 예민해져 있었다.
배가 고프고 잠도 모자랐다. 타고난 체력이 좋아 지치지는 않았으나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 것이다. 그의 신경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다. 이럴 때 건드리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데, 레너드를 닮아 그런지 셀리아 또한 그의 신경을 긁는 재주가 아주 뛰어났다.
“서 있지 말고 앉지 그래. 다리 아프지 않아?”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불편한 심기를 읽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 셀리아는 모르는 척 웃으며 손짓했다. 맞은편에 놓인 빈 의자는 주인이 없었다. 루크는 대답 대신 셀리아 황녀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나디아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랭커스터 저택으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이 궁은 황녀가 머무는 처소의 응접실이었다. 쓸데없이 오랫동안 대기시키며 신경을 긁던, 지루해 견딜 수 없던 루크가 나디아와 보냈던 밤들을 반복해 떠올리며 괴로워하던 장소다.
그러나 그와 제이가 앉았던 작은 소파는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었고, 긴 카우치가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빈 잔과 의자, 은근하게 불을 밝히는 촛불. 응접실이라기보다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위한 신방 같지 않은가. 오래지 않은 과거 나디아와의 첫날밤을 위해 준비했던 신방보다 오히려 더욱 그럴듯했다.
셀리아는 루크의 시선이 한 바퀴 돌아 다시 제게 쏟아지자 싱긋 웃었다. 퍽 유혹적인 미소를 보고도 루크는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거리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전하.”
문장은 청유형으로 끝을 맺었지만 허락을 구하는 공손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루크는 욕설을 뱉지 않은 자신을 매우 칭찬해주고 싶었다. 나디아에게 털어놓았다면 “잘 참았어요, 루크.”라고 말하며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을 텐데. 허리를 숙여 안기는 그의 어깨를 벅차도록 끌어안아 주었을 텐데.
하지만 만나지 못했지.
셀리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보이는 그대로야.”
“석찬은?.”
“그걸 믿었던 건 아니지? 단순히 황실 석찬이었다면 따로 준비할 일도 없을 뿐더러 아침까지 일정이 잡힐 리도 없잖아.”
“공식 일정이 아니라면 돌아가겠습니다.”
“공식 일정이야. 아바마마께서 공인해주신 시간인 걸. 난 오늘 제국을 위해 예배당에서 밤새 기도를 드릴 거고, 넌 나를 지키는 거야.”
“여긴 예배당이 아닙니다만.”
“어차피 바로 옆에 붙어있어. 거기 있으나 여기 있으나.”
황궁에는 신앙생활을 위한 예배당이 마련되어 있다. 셀리아는 신앙심이 깊지 않지만, 이미지를 위해 자주 예배당을 찾았다. 제국을 위해 기도하는 아름다운 황녀, 얼마나 완벽한 울림인가.
물론 오늘처럼 밀회를 위한 핑계로 써먹기도 좋았다.
“……제가 유부남이라는 걸 모르시진 않을 테고.”
“모를 리가 있니. 그렇지 않아도 그게 참 성가시던 참이야.”
“제 결혼을 전하께서 성가셔 하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어울리지 않게 돌려 말하지 말자, 루크.”
“…….”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 어울리지도 않고 잘 하지도 못하잖아. 닷새나 시간을 주었으면 너도 생각을 해 봤을 거 아니야.”
“……하.”
그래도 예의상 표정 관리 비슷한 것이라도 하고 있던 루크의 얼굴에서 일말의 포장마저 사라졌다. 그는 눈앞에서 웃고 있는 여인이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재주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셀리아는 표정이 사라진 루크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표정이 없다 여겼던 얼굴이 한 꺼풀 벗은 듯 냉랭하고 어둡게 가라앉았다.
루크는 셀리아와 거리를 두고 선 채로 의자에서 일어서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셀리아는 무겁게 떨어지는 치맛자락을 들고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어때?”
“…….”
“나 예쁘지?”
대답을 해야 하나. 루크는 이제 셀리아의 목소리가 숫제 짐승이 컹컹대는 울음소리로 들렸다.
이 길로 황제에게 달려가 더는 웃기지도 않는 수작에 놀아나주지 않겠다고 뒤집어 엎어줄 것이다. 닷새나 어울려주었으면 충분했다. 충심을 의심하라면 하라지. 예민해진 루크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참을 만큼 참았다.
황실은 스테이턴 가문은 두려워한다. 야수 공작이라 조롱하듯 부르고, ‘변방 시골에서 지내 상식과 교양이 모자라다’는 뉘앙스로 무시해도 루크는 내버려 두었다. 곁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제 한 몸을 바칠 각오와 희생은 보여줄 수 없었지만, 무시를 감수하는 것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득이다.
스테이턴은 고작 곁가지 소문에 흔들릴 만큼 허약하지 않으므로.
안나와 제이에게 매일 보고를 받았다.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가 마치 마른 들에 붙은 불길 같았다. 야수 공작이라 조롱하던 말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마치 황녀와 공작이 어린 시절부터 안타까운 사랑을 키워 온 연인으로 둔갑했다. 루크가 수염을 길러 마치 야인처럼 망가졌던 이유도 황녀와의 애달픈 사랑으로 마음 고생을 했기 때문이라는 추측까지 나돌았다.
고작 닷새 만에.
안나는 이것이야말로 셀리아가 라 먼스트로드 사교계를 얼마나 장악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수치라고 말했다. 브릿 후작 부인이 손을 써 볼 방도도 없이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찔러볼 속셈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황실 상대이니만큼 참을 수 있을 만큼은 참아 넘기고자 했다. 선대가 쌓아온 신뢰와 충의의 맹세를 깨뜨릴 수는 없었으므로?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도 어울려주자고 말이다.
어차피 루크는 나디아를 배신하지 않을 테고, 진실은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네게 잘 보이려고 고르고 골랐어. 난 여기, 쇄골과 어깨가 제일 예쁘거든. 코르셋을 조이지 않아도 허리가 잘록하고 다리도 길고 날씬해. 사실 아무것도 입지 않는 편이 가장 예쁘지만, 그래서는 놀랄 것 아니야.”
가느다란 손가락이 또렷한 쇄골과 봉긋하게 솟은 가슴, 잘록한 허리를 차례로 짚었다.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흰 발등을 약 올리듯 보여주었다. 루크는 무감정한 눈길로 셀리아를 훑었다. 그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노골적이군요.”
“어쩌겠어. 세련된 유혹은 네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걸.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수준을 맞춰주어야 하는 거겠지.”
이 정도는 해 주어야 알아들을 것 아냐. 셀리아는 손바닥으로 둥글게 부푼 윗가슴을 꾹 눌렀다. 무감정한 시선이 의도대로 제 손등에 머무르는 걸 확인하고서 셀리아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너라고 다를까.
‘역시. 내게 반하지 않았을 리 없지. 숙맥이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뿐이었어.’
인정하기는 자존심이 상하지만, 셀리아는 은근하게 사용할 수 있는 유혹의 기술을 모두 써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웃어주거나 우연처럼 스치는 손길, 몸을 은근하게 터치하거나, 남자가 좋아하는 향기를 풍기거나? 기본적으로 제 미모에 반하여 이성으로 충동과 욕망을 억누르는 남자에게는 반드시 통했던 모든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외양이 변하였어도 촌뜨기는 촌뜨기다. 신분과 지위, 부가 아까운 인간.
“아하, 세련된 유혹을 촌놈이 영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그래. 네게 맞추어서.”
셀리아는 루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탄탄한 체격이 더욱 늠름했다.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얼굴은 또 얼마나 잘생겼는지. 외모만 보면 그야말로 셀리아의 이상형 그 자체였다. 그녀는 어깨 부근에 달린 리본을 풀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자, 봐. 네가 손만 뻗으면 날 가질 수 있어. 아바마마도 허락하신 일이니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없어. 안타깝게도 네가 잠깐 결혼하긴 했지만 그런 건 얼마든지 무효화시킬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람은 누구나 성급한 실수를 저지르니까……. 솔직해져, 루크. 넌 지금 남자라면 누구나 탐을 내는 여자를 가질 수 있게 된 거라구.”
“하.”
가만히 듣고 있던 루크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거슬려서 셀리아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가 이어 말했다.
“그래서 천박하게 옷 벗고 덤비기로 한 겁니까?”
“뭐?!”
“이해하기 쉬운 방법이긴 하군.”
“너, 너 뭐라고 했어. 감히 나에게 천?.”
“혓바닥도 머리처럼 꼬였습니까? 더듬지 말고 똑바로 말씀하시죠.”
“너, 너, 감히….”
“왜.”
“반, 반말까지?!”
“황제 폐하께서도 내게 하대하진 않으신다. 신분 지위 무시하고 반말 찍찍 하던 건 그쪽이 먼저였어.”
“지금까지는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오래 볼 생각도 없었고, 쫑알거리는 소리 잠깐 듣고 넘기는 게 말 섞는 것보다 편했거든.”
“너, 너 이?.”
어떤 순간에도 달변이던 셀리아라도 갑자기 돌변한 루크의 태도에는 말문이 막혔다. 그가 내리뜬 눈으로 셀리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옷을 걸치지 않아도 자랑스럽던 몸이었는데, 드러난 부분만큼 수치심이 몰려왔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보라며?”
“그?.”
저를 원하는 눈길이 아니다. 루크는 마치 가축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탐을 낸다고, 너를?”
비웃는 목소리에 울화가 치밀었다. 셀리아는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난 남자가 아니겠군. 누가 말해줬는지 몰라도 자신감이 과해.”
“웃기지 마! 참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섰잖아! 제대로 봐, 남작의 딸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셀리아는 루크의 중심으로 손을 뻗었다. 묵직하고 물컹한 성기에는 조금도 힘이 들어가있지 않았다. 무감하게 내려다보는 눈빛과 똑같았다.
경멸.
루크는 급하게 그녀의 손을 치워냈다. 이런 순간에도 그녀를 밀치거나 손등이라도 때릴 수가 없다는 게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셀리아는 팔이 수십 개 달린 사람을 보듯이 루크를 보았다.
“말도 안 돼…. 너 고자야? 아니면 게이? 내가 남자가 아니라서?.”
“네가 남자였으면 한 대 패주기라도 했겠지.”
“…….”
루크는 더러운 것을 떼어내듯 셀리아를 쳐다보다 등을 돌렸다. 그가 떠난 자리에 혼자 남은 셀리아는 모멸감에 떨며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