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루크가 다녀갔다고? 언제? 방금?”
“조금 전에 갔어. 안 됐구나, 나디아.”
“으으으.”
나디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쓰러지는 줄 알고 안나가 놀라 부축해주었지만, 무릎에 힘이 빠졌을 뿐이었다. 앤더슨이 말했다.
“새벽까지 깨어있지 그러니. 그러면 만날 수 있을지도….”
“아냐, 오빠. 오늘은 기다리지 말라고 했어. 못 들어올 것 같다고.”
“그래….”
실망한 나디아를 북돋아주려 꺼낸 말이 오히려 독이 됐다. 오늘이야말로 루크를 보고 싶었던 만큼 엇갈린 만남이 더 안타까웠다. 앤더슨이 미안한 듯이 어설프게 웃었다.
“으으으,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만날 수 있었는데! 치사해, 앤더슨 오빠. 오빠만 두 번이나 루크를 만나고!”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진심으로 질투하며 원망해봐야 앤더슨은 난처할 뿐이었다. 그가 루크를 따로 만나 좋을 일이 뭐 있겠는가? 만났다는 표현도 이상하다. 그는 스쳐 지나며 인사나 나누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여동생은 앤더슨이 자신의 파이를 빼앗아 먹기라도 한 듯이 노려보았다. 앤더슨으로서는 억울한 노릇이었다.
루크는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오늘밤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전언을 위해서는 그의 방문을 알려야만 했다. 일리야는 세상을 다 잃은 듯 울상을 짓는 나디아가 안쓰러운 한편, 그 표정이 익숙해 신기한 기분이었다. 조금 전 나디아의 부재를 듣고 루크가 지었던 표정과 똑같았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일리야는 내심 웃고 말았다. 안나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빙그레 웃으며 엎드린 나디아의 어깨에 숄을 걸쳐 주며 말했다.
“지치셨지요, 부인. 식사를 하시기 전에 따뜻한 차를 준비할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속이 더부룩해요. 식사도 안 넘어갈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돼, 나디아. 어제도 컨디션 안 좋다고 저녁 식사를 걸렀잖아.”
“하지만 먹으면 체할 것 같은 걸.”
“……브릿 후작 부인께서 많이 엄격하시니? 너무 힘들면?.”
“아냐, 엄격하시긴 하지만 딱 버틸 만큼만 힘들어.”
힘들지 않다고는 빈말로도 하지 않는다. 힘들어하는 꼴을 다 보여주면서 뻔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딱 5시까지잖아. 더 늦어지는 일도 없으니까 딱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그런 것치고 귀가가 늦는데?”
“……음. 제임스를 만나서.”
“제임스를?”
일리야와 앤더슨이 시선을 교환했다. 제임스 밀리언은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이기는 하지만, 나이 차이가 있어 앤더슨, 일리야와는 그리 가깝지 않았다. 일리야 몰래 쿠키를 집으려던 피오나가 불쑥 말했다.
“난 그 아저씨 싫더라.”
“피오나, 그런 말 하면 안 돼.”
“싫은 걸 싫다 그러지, 뭐….”
“식전에 간식은 안 돼. 내려놓으렴, 피오나.”
“…네에에에….”
“식사 시간에 맞추어 부를 테니, 놀이방에 가 있어. 펠릭스와 엘릭도 놀이방에 있을 거야.”
“흥!”
어른들의 대화에 끼고 싶었던 피오나는 부루퉁하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루크가 부쩍 바빠진 이후 그녀는 제 손에 떨어지는 뇌물이 사라져 뿔이 나 있었다. 엘릭이 벽돌에 맞을 뻔했던 사고 이후에는 완전히 랭커스터 일가에 녹아들어 나설 일 자체가 줄어들기도 했다. 앵돌아진 표정으로 총총 사라지는 피오나의 뒷모습을 나디아가 빤히 바라보았다. 일리야가 물었다.
“왜? 피오나가 뭐 잘못했니?”
“아냐, 아무것도. 그런 거 없어. 피오나가 뭐 잘못만 저지르는 앤가. 그냥 피오나는 자세가 참 바르다 싶어서.”
“아아. 그런 편이지. 얼마나 조숙한지 숙녀라면 허리가 굽어서는 안 된다며 벌써 유난이지 뭐야. 하지만 나디아, 네 자세도 그리 나쁘진 않은데.”
“아냐, 나빠. 나쁘대….”
긴장하고 있던 등허리가 욱신거렸다. 저절로 아래로 처지는 어깨가 가장 문제였다.
“브릿 부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던가요? 자세만 나쁘다고?”
안나가 물었다. 나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 나빠서 뭐 하나 말하기가 힘들다고….”
“…….”
“그, 그래도 혼내지는 않으세요.”
안나의 표정이 너무 차가워져서 저도 모르게 변명을 덧붙이고 말았다. 안나는 곤란한 표정의 나디아를 보고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말했다.
“브릿 부인께서는 엄격하신 분이라 그래요. 부인께서는 그리 나쁘지 않아요.”
“고마워요, 안나….”
황량해진 마음에 안나의 위로는 단비 같았다. 나디아가 안나에게 매달리듯 안기자, 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고작 시녀장에게 안기는 공작 부인이 흔치는 않겠지만 뭐 어떠랴. 이 자리에는 일리야와 앤더슨밖에 없었다. 안나가 말했다.
“부인께 부족한 건 연기력일 거예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자신감, 자기최면 같은 게 필요하죠.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현실을 알고 있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척 연기라도 해야 유리하답니다. 부인께서는 겸손하고 다정하셔서 그런 연기는 서투르실 수밖에 없어요. 너무 낙담하지 마시고 초조해하지도 마세요.”
“연기라도 하라고…. 그러고 보니 브릿 부인께서도 말씀하셨어요. 흉내라도 내야 한다고요.”
“맞아요.”
“셀리아 황녀 전하를 보여줄 수 있다면 좋았을 거라고….”
안나와 일리야, 앤더슨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일리야가 난처한 눈으로 신호를 보내자 앤더슨이 알아듣고서 말했다.
“시간이 늦었다, 나디아. 식사를 거르겠다면 간단하게라도 요기를 하도록 해.”
“응, 알았어. 아이들을 불러올까?”
“됐어, 내가 갈게. 넌 실내복으로 갈아입으렴. 피곤해 보인다.”
“응……. 어차피 루크도 못 보는데, 일찍 자버려야지.”
나디아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축 늘어진 어깨로 일어나는 그녀의 뒤를 안나가 따랐다.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앤더슨과 일리야는 시선을 교환했다.
루크가 변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나디아에게 홀딱 반해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워낙 소문에 무심한 인물이니만큼, 그리고 셀리아 황녀 측에서 흘린 소문이 부풀었을 거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니 나디아에게 허튼 소문을 전달해줄 필요는 없었다. 제임스의 예상처럼 상처받지 않게 지키려는 게 아니라, 진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오해가 생기더라도 그건 부부끼리 풀어야 할 문제였다. 앤더슨은 섣부르게 입을 나불거려 일을 키우는 실수를 두 번이나 저지를 수 없었다. 하지만 걱정스럽기는 했다. 앤더슨의 얼굴에 드리운 수심을 읽고 일리야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 오빠.”
“걱정…… 을 안 할 수는 없어. 가족 일이잖아.”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는 신분도 높고 덩치도 크며, 위압감이 넘치는 용모를 가지고 있지만 “형님”이라 부르며 호의를 비칠 때에는 가끔 남동생처럼 느껴졌다.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다.
‘은근히 붙임성도 좋고.’
뻔뻔한 면도 있었다.
저보다 한참 작은 나디아에게 질질 이끌려가면서도 헤벌쭉 웃는 얼굴을 본 후로는 이지적인 미남의 얼굴은 위엄을 잃었다. 위엄을 벗겨내고 나니 하는 짓이 잘 보였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꽤 귀여운 사람이었다. 명령을 내릴 것 같은 목소리로 “형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쩐지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지지만 말이다.
셀리아 황녀는 제국, 아니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절세미녀라고 한다. 황제가 총애하는 딸이며 손꼽히는 미녀가 여론전까지 벌이며 유혹하려 덤비는데 루크가 버틸 수 있을지….
그럼에도 일리야는 자신만만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루크에게는 나디아밖에 안 보이거든.”
“……나도 그럴 거라 생각은 해. 하지만 남자라는 동물은?.”
“그러는 오빠도 남자면서.”
“나는 예외야, 너희 오빠니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참 뻔뻔하게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앤더슨은 이보다 더 논리적인 근거는 없다는 듯 당당했다. 일리야는 지적보다 무시를 택했다.
“내기해도 좋아. 아무리 유혹해도 끄떡없을걸.”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
“당연히 감이지.”
“……일리야….”
조금 전까지 일리야가 보냈던 눈빛이 그대로 앤더슨에게 옮았다.
“날 믿어, 오빠. 이건 법칙 같은 거야.”
“무슨 법칙.”
“<백작 부인의 일생>의 법칙.”
“네가 매일 들고 다녔던 그 책을 말하는 거야?”
“맞아. 그리고 첫사랑에 빠진 사람한테는 주변의 무엇도 보이지 않는 법이잖아.”
<백작 부인의 일생>이 어떤 내용인지는 몰라도 법칙 운운하는 말이 썩 믿음직스럽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앤더슨은 이어진 일리야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랭커스터 남매는 첫사랑에 빠진 상대와 결혼했다. 일리야에게 조지는 첫사랑이었고, 앤더슨에게도 비비안이 첫사랑이었다. 나디아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루크에게도.
백작 부인의 법칙 같은 건 몰라도 괜찮았다. 앤더슨은 일말의 불안도 모두 지웠다. 소문이 얼마나 퍼져 나가든지 진실을 알고 있으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황실이 마음 먹고 퍼뜨리는 소문을 이겨내거나 잠재울 방도는 단 하나뿐이었다. 거짓에 흔들리지 않고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라 트에빌레에서 사이 좋은 공작 부부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제가 보았던 광경을 똑같이 보여주고 싶었다. 헤벌쭉 벌어진 그 얼굴을 보고도 허튼소리를 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 보여주면 다른 별명이 붙을지도 모르겠구나.’
팔불출 공작 같은 별명 말이다. 앤더슨은 내심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