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우아하게 걸어나온 셀리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주름이 깊어질까 금세 폈지만 아름다운 얼굴에는 불편한 심기가 솔직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어야 할 사람 대신 자리에 앉아있는 레너드에게 말을 걸었다.
“루크는 어디 가고 오라버니가 여기에 있어요?”
“말버릇이 나쁘구나, 셀리아. 루크는 하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이름을 막 불러서도 안 되고.”
레너드 자신조차 루크에게 대놓고 하대는 하지 않았다. 레너드는 소파에 앉은 채 다리를 꼬며 지적했다. 셀리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새삼스럽게 존대라도 하란 말이에요?”
“……네가 스테이턴 공작에게 지나치게 친밀하게 군다는 뒷말이 돌아.”
“어머, 그거 잘됐네요. 우리가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해주면 일이 더 편해지죠.”
사실은 특별은커녕 우리라는 단어로 묶이는 것조차 루크는 용납하지 않을 사이였다.
루크가 없는 자리라서 다행이다. 자신과 셀리아가 ‘우리’라는 단어로 묶였다는 걸 안다면 무시무시하게 쏘아보았을 게 틀림없었다. 루크의 험악한 기세를 날 것 그대로 마주했다가는 유리처럼 섬세하고 연약한 제 심장은 견디지 못할 게 뻔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날 노려 봐.’
황실 석찬을 위해 셀리아가 준비하는 사이, 루크는 우연히 마주친 레너드를 붙잡고(레너드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자신은 볼일을 보러 다녀오겠다고 도망쳤다.
금방 돌아오겠다, 석찬 전까지는 시간을 맞추겠다고 말했지만 뻔한 행선지를 생각해보면 아슬아슬할 것 같았다. 레너드는 루크가 돌아올 때까지 적당히 시간을 끌어 줄 요량이었다. 소문이 제 예상보다 너무나 빠르게 퍼지고 있어 괜히 미안해진 탓이었다.
내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니지만. 레너드는 내심 투덜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루크가 돌아와야 할 시간이 다 되어간다.
셀리아는 눈을 천천히 깜박거렸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릴 때마다 예쁜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제 오라비를 시간 들여 관찰했다. 레너드는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태연하게 받아치면서도, 어딘가 거북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훤히 보였다. 셀리아가 말했다.
“이상하네요, 오라버니. 재미있어 해주지도 않으시고.”
“…….”
“지금쯤 웃으면서 루크는 이렇다느니, 사람들이 뭐라고 떠든다느니 즐기고 계셔야 하잖아요. 루크를 골탕먹이는 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쯤으로 여기시던 분이. 친구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일방적으로 골탕먹이는 관계였잖아요, 둘은. 제가 들은 일화만 열 손가락이 넘어가는데. 그것도 직접 제게 말씀해주셨죠.”
“…….”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셀리아의 말처럼 레너드는 루크를 골탕먹이는 데 큰 공을 들이고 있었다. 멀리 거슬러갈 것도 없이 가장 최근 레너드는 루크가 불태워버릴 게 뻔한 편지에 동봉할 허브를 고르는 데에 장장 세 시간을 들였다. 고약한 냄새가 좋을지, 향긋한 꽃 냄새가 좋을지 고민하느라 힘들었다. 셀리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헌데 즐기시기는커녕 나무라시다뇨. 최근 커다란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셨나요? 회개하실 만한 계기라도?”
“딱히 회개할 만한 인생을 살진 않았다만.”
“아, 그렇게…… 생각하시면 편하긴 하겠어요.”
“……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비아냥거리는 건 그만둬라, 셀리아. 난 네게 화풀이나 당해주려고 여기 앉아있는 게 아니다.”
레너드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정색했다. 웃는 낯으로 말하던 셀리아의 얼굴도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주변을 향해 손짓하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녀들과 시종들이 물러났다.
레너드가 물었다.
“소문을 부풀리는 건 네 수작인가?”
“수작이라고 말씀하시면?.”
“쓸데없이 말 늘어놓지 말고. 오늘은 나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맞아요. 제가 했어요.”
셀리아는 순순하게 인정했다. 그녀는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흰 어깨와 선명한 쇄골이 드러났다. 단순히 석찬을 위한 드레스치고는 노출이 많았다. 레너드는 여동생의 얼굴에 서린 짜증과 초조함을 읽어냈다. 셀리아는 노출이 많은 의상을 즐기지 않았다. 제 매력을 한껏 살릴 정도로만 노출할 뿐, 총명하고 정숙한 황녀 이미지를 해칠 만한 차림새는 피했다. 실질적인 사생활이 그리 깨끗하지 않아 더욱.
“2주, 아니 사흘이면 충분하다더니.”
레너드가 툭 던졌다. 비아냥거릴 심산은 아니었으나 웃음이 섞이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셀리아가 사납게 제 오라비를 노려보았다.
“아직 닷새밖에 안 됐어요! 제대로 유혹하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왜 그리 짜증을 내?”
“내가, 이 내가? 루크 따위한테….”
“셀리아! 스테이턴 공작가는 네가 무시해도 되는 집안이 아니다.”
“누가 스테이턴 공작가를 무시했어요? 난 루크를 말한 거예요!”
스테이턴 공작가를 무시했다면 시집을 가려고 하겠는가? 셀리아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양 레너드에게 항의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본인이었다. 스테이턴 공작 본인을 무시하고 있으면서 무얼 부정한단 말인가.
레너드는 알 만하다는 듯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렸다.
“그가 곧장 네 앞에 무릎꿇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하니?”
“……그는 고자가 분명해요.”
“?셀리아, 단어 선택에 신중해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 나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리 없다?”
“그래요! 오죽하면 내가, 이딴, 어깨를 훤히 다 드러내는 드레스 따위를….”
격앙되어 씩씩거리는 셀리아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루크가 넘어오지 않으리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도 넉넉했고, 소문은 그들의 의도대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소문 속 야수 공작과 아름다운 황녀는 안타까운 오해로 결별했다가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 속에서 재회한 연인이 되어 있었다. 고작 닷새 만에 이루어낸 소문치고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름을 부르며 친밀해 보이더라’는 과장된 사실이 조금, 민감한 시기에 호위가 된 공작을 보며 그 의도에 대한 상상의 나래가 한껏. 상식 있고 교양 있는 궁정 사람들은 ‘두 분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이더라, 친밀해 보이더라’ 정도만 속닥거렸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랬다.
“야수 공작이라는 수치스러운 별명을 지워버리려고 얼마나 돈을 풀었는지 아세요? 파티가 열리지 않으니 만날 수 있는 사람도 한정적이고, 뭐, 그 덕분에 소문을 조작하기는 더 쉬웠지만, 어쨌든 이 나에게 어울리는 남편으로 만들기 위해 닷새간 최선을 다했어요. 당연히 사람들도 긍정적이고요. 다른 건 전부 완벽한데?.”
“완벽한데?”
“루크, 그 남자만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잖아요!”
레너드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아, 그러니…….
“초조하지 않아요, 누가 초조해할 줄 알고. 승패는 정해져 있어요. 나중에 무릎 꿇고서 오늘을 사무치게 후회하는 쪽이 누구인지 두고 보자고요.”
“말과 행동이 다르구나, 셀리아. 초조해하지 않는다며 왜 화를 내?”
“괘씸하단 말이에요! 루크 주제에!”
이래도 무시하지 않는다고. 레너드는 이제는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리 무시하면서 용케 남편으로 삼을 생각을 했다.
“내가 제 팔을 끌어안으면 빼낼 것이 아니라 황송하게 무릎을 꿇어야지! 욕정하면서 발이라도 핥아야지!”
“셀리아, 말 조심!”
“자존심 상해! 짜증나! 저가 뭐라고 날,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보냐고!”
결정타는 석찬 이후에도 일정이 있으니 기다리라고 말했을 때였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속내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예의바르게 굴었다. 말보다 눈빛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해서 문제이긴 했지만, 겉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 순간 루크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제 팔에 매달리려는 셀리아가 마치 역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러서 뿌리치고는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노골적인 거절, 거부였다. 셀리아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것이다.
“나와 밤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고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감히!”
“……일단, 제국의 공작에게 ‘감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것 같구나.”
“야수 공작이라고 무시당하던 주제에….”
“그것도 그가 신경쓰지 않고 내버려둬서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들 수 있었던 것뿐이지.”
“날 보고도! 틀림없이 고자야! 아니면 남자를 좋아하든가!”
“……정말 그가 고자나 동성애자인 게 네겐 더 불리하지 않니….”
여유로운 척했던 주제에 쌓였던 울분이 많기도 하다. 레너드는 최근 제 처지가 참 불쌍했다. 화풀이와 뒷정리만 도맡는 기분이 든다.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까지 신경쓰게 돼서 그런가….’
이래서는 신경이 버티질 못할 것이다.
“두고 봐, 오늘부터는 작정하고 유혹해줄 거예요.”
어떻게 유혹할 작정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레너드는 급격히 피로해져 콧잔등을 꾹 쥐었다. 셀리아의 말처럼 루크를 골탕먹이며 즐거워하기만 했다면 그에게 요 닷새는 즐겁기만 한 날들이었겠지.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웃기지도 않아,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은근히 물러나도 싫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을 거부하는 남자는 본 적이 없었고, 존재할 리도 없었다. 아닌 척 튕겨도 내심 설레여 벌벌 떨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주변은 모두 제 편이었고, 순풍에 돛 단 듯이 순조로웠다. 남작의 딸과 했던 결혼 따위 무효로 만들거나? 없애버리면 그만이고, 예정된 제 결혼이야 보상금 좀 쥐여주면 그만이었다. 낯선 타국에 팔려가는 것보다야 공작가의 안주인이 훨씬 낫다. 루크에게도 남작의 딸보다야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녀가 훨씬 좋을 게 당연했다.
적당히 튕기다 넘어오면, 감히 자신을 상대로 튕길 생각이나 했던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생각했다. 셀리아는 느긋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생겨 먹은 남자인지 몰라도, 적어도 오늘까지 루크는 셀리아 자신을 가볍게 외면할 수 있었다.
제국의 태자를 저 대신 허수아비나 되듯 꽂아두고서, 어디로 갔을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고자, 동성애자가 아니면 취향이 확고한 타입인지도 모른다.
남작의 딸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사람인지 이 눈으로 봐야겠다.
셀리아는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