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올바른 길? 그게 뭔데.’
라고, 곧바로 말해주어야 했다. 나디아는 마차에 올라 온전히 혼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참아왔던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이상해. 왜 자꾸…… 속이 뒤틀리는 것 같지?’
상냥하게 웃는 제임스를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울컥 치솟아서 참기 위해 힘껏 주먹을 틀어쥐어야 했다. 공작 부인이 낮부터 폭력 사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혼자라고 생각해도 혼자가 아닐 수 있으므로 제임스가 피해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디서 소문이 날지 모른다…… 고, 이상한 방향으로 교육의 성과를 발휘했다.
나디아는 그와의 대화를 거슬러 더듬었다. 말도 안 되지만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부분에서 그에게 화를 낼 만한 말을 들었을지 모른다.
‘아니야, 모르는데 왜 화가 나.’
대화도 특별할 부분이 없었다. 그저 간단한 안부와 별 것 아닌 대화-날씨나 식사에 관한-, 주변 사람들의 안부……. 친구로 지냈던 오랜 시간이 무색할 만큼 그와 대화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디아는 그만큼 육체적으로 지쳤고, 정신적으로는 루크가 모자랐다. 루크가 모자라서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루크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앤더슨에게 깨워달라고 할까. 방법을 찾느라 바빠서 제임스와 대화할 주제를 성의있게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나디아도 잘못이라 반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 만나게 돼서 더 물을 것도 없는 걸.’
처음 만났을 때는 껄끄러운 한편 반가운 마음이 분명 있었다. 껄끄러운 마음이 더 커서 스스로도 인지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만났을 때는 솔직히 말해서 귀찮았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와 훈련, 공부, 긴장으로 그렇지 않아도 녹초가 되었는데? 혼자 가도 충분한 거리를 굳이 데려다주겠다고 나타나는 사람이 귀찮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임스 앞에서는 브릿 후작 부인과는 다른 의미로 긴장을 놓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내심 그를 귀찮아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 때문에 나디아는 그가 말할 때마다 치미는 거부감과 울화를 애써 눌러 참았다.
분명 제임스 밀리언은 자신을 신경 써주고 있었다. 그녀의 처지를 걱정해주고 염려해주는 다정한 친구였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는 나디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사람이지만 어쩐지 예전과 달랐다.
대체 제임스의 어떤 부분이 이토록 속이 뒤틀리는 것일까? 그는 분명 자신이 동경하던, 제가 되고 싶은 이상형의 사람 그 자체였는데……. 그의 매너도, 상냥한 표정과 말씨도 그대로인데 이제는 더 이상 멋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한 마디는 해줄 걸. 걱정거리 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 허세라도 부려줄 걸.”
당연히 걱정거리는 산더미 같았다. 코앞으로 닥쳐온 라 트에빌레를 잘 보낼 수 있을지, 브릿 후작 부인에게 어떻게 하면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 그리고 당장 오늘 밤 루크를 만날 수 있을지. 루크에게 어울리는 공작부인이 될 수 있을 것인지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제임스에게 상담하고 싶지는 않았다.
‘달라지고 싶은 건 똑같지만 제임스처럼 되고 싶은 건 아니라서 그런가?’
예전에는 그의 나무라는 말과 책망하는 눈빛에 상처를 받았지만, 지금은 화가 났다. 나디아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다.
‘내일도 기다리고 있을까? 오지 말라고 하면, 아니, 제임스도 브릿 부인께 볼일이 있는 걸 텐데 그걸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부담스러운데. 하버 경에게는 미안하지만 방까지 데리러 와 달라고 해 볼까.’
로렌스 하버는 다른 흑곰 기사단에 비해서는 인상이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기사의 기백이 다르기는 한지 제임스는 그를 무척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내일부터는 미안하지만 조금 고생해달라고 부탁드려야겠다. 나디아는 그에게 부탁하며 무슨 답례를 챙겨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레이나는 잘 지내는구나.”
등을 기대며 나디아가 중얼거렸다.
레이나, 레이나 밀리언.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불행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디아는 가라앉은 눈으로 창밖의 거리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어머니 부탁이 아니었다면 뭣 하러 그 답답한 애랑 같이 다녀주겠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저 주제에 일리야 언니나 앤더슨 오빠 같은 가족이 있는 걸. 걔가 어디가 좋아서 싸고 도는지 몰라도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사랑받잖아.
-답답해서 숨 넘어갈 것 같아.
-잘 됐지. 결혼하면 그 멍청한 얼굴 안 봐도 되잖아. 어머니도 결혼 후까지 걜 돌봐주라고 부탁하진 않으시겠지.
-나나 일리야 언니가 없으면 혼자서는 어디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모자란 애를 달고 다녀야 하는 내 심정이 되어 봐!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친구의 속내는 충격적이었다. 나디아는 우울하게 또렷한 목소리를 되새겼다. 더욱 상처가 되었던 사실은 그 대화를 나디아가 듣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도 레이나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나디아를 보며 물었다.
-내가 사과해야 되니?
나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날 싫어하는 게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까….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레이나와 싸우고? 아니, 진심을 알게 되고? 친구라고는 제임스밖에 남지 않았다. 가족 외에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제임스밖에 없는데, 그는 여동생의 결혼 직후 여행을 떠나버려 털어놓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청혼서를 받은 것은 그럴 때였다. 그렇지 않아도 심하던 자기혐오가 절정이었던 시기, 가족 외의 모두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할 시기였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지만 가족을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양이 되자. 자신 때문에 가족에게 피해를 끼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자리가 있어.’
아, 그래서. 나디아는 깨달았다. 제임스가 거슬렸던 이유는 그가 눈으로, 뉘앙스로, 언뜻 상냥해보이는 단어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가감없이 솔직한 지적은 늘 마음을 곧장 찔렀다.
“……루크 보고싶다.”
나디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크가 사랑스러웠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용맹하고 듬직한 남자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온몸에 입을 맞추어도 모자랐다. 온종일 끌어안고 있어도 부족했다. 그가 상처입으면 마음이 찢길 듯이 아프고, 그가 웃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행복해졌다.
옮겨붙은 감정은 날이 갈수록 강하게 타올랐다. 어느새 이렇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감정의 시작과 까닭을 그 누가 정확히 알 수 있으랴. 시기도, 이유도 결국 뒤늦은 변명에 불과했다. 지금 나디아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얻은 이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서, 자신이 가장 그와 잘 어울리고, 그의 짝은 자신밖에 없다고…….
인정받고 싶었다. 자기 자신에게도.
*
“나디아는?.”
“안타깝게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조금 늦네요.”
“이런….”
주르륵 미끄러지듯 루크가 문틀을 잡고 주저앉았다. 축 늘어진 어깨는 마치 간식을 눈앞에서 빼앗긴 개 같았다. 일리야는 주저앉은 루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위로를 건네었다.
“30분만 기다리면 올 것 같은데.”
“?바로 돌아가야 합니다. 잠시 빠져나온 거라.”
루크를 따라 뛰어들어온 제이가 끼어들었다. 평온한 루크와 달리 제이는 호흡이 약간 거칠고 안색도 창백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러게 아직 안 돌아오셨을 거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시간도 촉박하고요.”
셀리아가 석찬을 위해 준비하는 틈을 타 빠져나온 거라 시간이 많지 않았다. 사람을 종일 끌고 다녔으면 저녁 식사 후에는 놓아주어야 예의가 아닌가. 항의도 해 보았지만 셀리아는 밤 늦게까지 없는 일정도 만들어냈다. 루크가 항의하면 할수록 더욱 오래 붙잡고 늘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황녀를 때리면? 역시 안 되겠지. 몰래 때려도 안 되겠지. 살짝 손만 봐줘도 안 되겠지…….
“오늘도 늦나요? 저녁 식사는 하셨고요?”
“빵이면 충분합니다.”
“말씀 편히 하시라니까요….”
“그 부분은 이미 합의가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서로 존대하기로.”
뻔뻔한 대답에 일리야는 할 말을 잃었다.
편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일리야와 앤더슨이 가장 난처했던 부분이 바로 존칭이었다. 루크는 편하게 말해달라고 했지만 허락을 받았다고 해서 덜컥 하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키지도 않았고 말이다. 머뭇거리는 그들에게 마리아가 깨끗하게 결론을 내려주었다. 모두에게 존대를 쓰기로 말이다.
일리야는 화제를 돌렸다.
“잠깐 앉아 식사할 여유도 없나요? 끼니는 잘 챙기고 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샌드위치라도 싸줄 테니….”
“괜찮습니다. 그보다 누님.”
“…….”
일리야는 대답 대신 조용히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올해 일리야는 32세, 루크는 28세이니 누님이라 부르는 게 맞지만? 저 얼굴로 말하는 ‘누님’은 이상하게도 파괴력이 엄청났다.
참고로 루크는 앤더슨을 ‘형님’이라 부르게 됐다. 앤더슨은 루크에게서 형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일리야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뭐라 콕 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어딘지 이상한 미묘한 기분.
“말씀하세요.”
“나디아에게는 제가 다녀간 건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어째서요?”
“실망할 테니까요. 그리고 오늘은 아무래도? 새벽에도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라고도 전해주십시오.”
루크는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일리야가 물었다.
“나디아가 돌아올 시간도 아닌데 식사할 시간도 없이 바쁘시면 차라리 좀 쉬시지….”
“저도 이미 쉬시라 말씀을 드렸지만 듣질 않으십니다.”
제이가 혀를 찼다. 루크는 제이의 푸념은 흘려 넘겼지만 일리야의 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우연히 만날지.”
“…….”
“잠깐이라도 끌어안을 수 있다면 식사 한 끼나 하룻밤 잠보다 훨씬 힘이 날 테니.”
저런 부끄러운 말을 창피해하지도 않고 잘도 말한다. 일리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런 사람을 오해하다니, 아이보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어.’
소문은 일리야도 모자라지 않게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일리야를 비롯해 앤더슨, 랭커스터 남작 부부는 물론이요 피오나까지도 소문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디아를 떠올린 것만으로 헤벌쭉 벌어진 입을 본다면, 누구도 그의 진심을 의심할 수는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