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그러나 여동생과 다름없다는 개인적인 호감과 달리, 제임스 밀리언이 보기에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신분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특별한 구석이 없으며 착해빠진 성격을 제외하면 장점이라고 할 만한 부분도 없었다. 사람들은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라고 하면 그녀에 대한 평이나 감상이 아니라 “가족들이 유난스럽게 싸고 도는 막내.”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못나지 않았지만 특출나게 아름답지도 않고, 무엇보다 눈에 띄지 않았다. 나디아는 가족들과 동행한 무도회에서도 대개 벽의 꽃 노릇만 했었다. 앤더슨과 두어 곡, 제임스가 참석했다면 그와 한 곡 정도. 제임스 외에 그녀에게 춤 신청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난스러운 사랑을 독차지하며 보호받은 덕분에 나디아는 순진하고 착하게 자랐지만 애초에 사람들은 순진한 사람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유머 감각이 뛰어나지도 않고 성가신 보호자까지 주렁주렁 달려있는 순진한 처녀는 친구로든 애인으로든 사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나디아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는 나디아가 설마하니 저 말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할 수 있을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자신이 ‘구제’해주지 않으면, 나디아는 평생 혼자 살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딱히 눈에 차지는 않지만 자신밖에 없을 테니 선의로 결혼해줄까 고민하고 있었다. 방치해놓고 있어도 어차피 저 말고는 손을 내밀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잠시 라 먼스트로드를 떠났던 사이에 덜컥 시집을 가버린 것이다. 그것도 제국에 넷밖에 없는 대귀족 스테이턴 공작가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리고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는지 모른다. 기이한 패배감과 배신감이 들끓었다. 저와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던 소꿉친구가 이제는 그가 평생 바라왔던 신분과 부를 갖게 되다니, 그가 고작 후작 부인의 비위나 맞추려고 동분서주하는 동안.
조모님이라 부르고 있어도 브릿 후작 부인은 그를 손자라 여겨주지 않는다. 눈치 빠르게 말귀를 알아들어 부려먹기 편한 젊은 시종 정도로나 여기고 있을까. 그마저도 그를 대체할 심부름꾼은 브릿 후작 부인에게 얼마든지 있어서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제임스는 자작 위(位)에 그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더 높은 자리가 어울린다. 그가 활약하지 못한 건 제한된 신분 탓일 뿐, ‘제국의 검’이라느니 허황된 아부와 과장으로 추앙받는 스테이턴 공작보다 뒤떨어지는 부분은 없다.
게다가 나디아에게도 자신이 더 낫다.
스테이턴 같은 대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나디아는 어울리지 않았다. 브릿 후작 부인의 도움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제임스는 그녀가 곧 지쳐 나가떨어질 거라고 확신했다. 하급 귀족 사이에서도 어울리지 못했던 나디아가 아닌가. 무리하게 깨금발을 해 보아야 상처만 깊어질 게 뻔했다.
‘노력을 해 봐야 모두 소용없는 짓인데.’
제임스는 돌아다니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결혼을 했던 스테이턴 공작이 라 먼스트로드에 돌아와, 셀리아 황녀를 호위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남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교계 사람들답게 단순한 호위에 많은 추측이 붙어 살을 더했다.
셀리아 황녀 전하는 조만간 타국에 시집을 가기로 되어 있는데 유부남이라고 해도 스테이턴 공작이나 되는 자가 고작 호위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껏 라 먼스트로드를 멀리했던 스테이턴 공작이 장시간 머무르며 호위를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야수 공작이라는 치욕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던 스테이턴 공작은 사실 절세의 미남이었고, 갑작스러운 결혼의 주인공이었던 남작의 딸과 함께 있는 모습은 한 번도 목격되지 않았다. 행운을 거머쥔 공작부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스테이턴 공작과 셀리아 황녀의 동행이 시작된 지 고작 닷새 만에 소문은 우스울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의도를 느끼겠으나 대부분은 의도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싼 소문이 라 먼스트로드 전역에 파다한데도 나디아는 이번에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를 과보호하는 랭커스터가 상처가 될 만한 소문을 전달해줬을 리가 없었다. 스테이턴 측은 굳이 말해줄 이유가 없다.
‘불쌍한 나디아. 스테이턴 공작이나 되는 자가 무슨 바람이 불어 나디아와 결혼했는지 몰라도 역시 변덕은 잠깐뿐인 거야.’
높은 사람들은 저들끼리 어울리게 되어 있었다. 멀다 해도 분명 피가 이어진 손자를 한낱 심부름꾼 부려먹듯 부리며 곁은 내어주지 않는 브릿 후작 부인처럼 말이다. 스테이턴 공작은 나디아에게 잠깐 홀려 결혼을 했지만 다시 돌아와 정신을 차린 게 틀림없다.
제임스는 나디아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상처를 받으면 이 연약한 여자는 무너져버리고 말 것이다.
어차피 그들 안에 들어갈 수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노력하는 꼴이란.
질투, 배신감, 동정이 뒤섞였다.
브릿 저택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제임스는 공작부인이 되어버린 나디아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제 아래에 두고 언제든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여자를 빼앗겨버렸다는 박탈감 때문에 스테이턴 공작가의 기사조차 보기 싫었다.
하지만 잘 보여야 했다. 냉정한 브릿 후작 부인보다는 정에 약한 나디아를 이용하는 편이 더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소꿉친구, 혹은 속마음을 들어줄 정부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디아는 그의 말은 모두 믿을 테니까 마음대로 조종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소문을 접한 후에는 마음을 바꾸었다.
스테이턴 공작은 셀리아 황녀에게로 마음이 기울었다. 라 트에빌레를 앞두고 셀리아 황녀의 호위를 맡았다는 것은, 공작이 사실상 황녀의 기사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스테이턴 공작가를 완전히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이니 황제로서는 더할 나위 없을 터.
남작의 딸인 나디아는 걸림돌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나 스테이턴 공작은 남작의 딸에게 반하여 결혼까지 감행했던 괴짜이니만큼, 마음이 변했다고 할지라도 조금은 신경 쓸 게 틀림없었다. 제임스는 나디아를 거두어주고, 그녀를 빌미 삼아 스테이턴 공작과 확실한 끈을 가질 계획을 세웠다.
‘역시 널 받아줄 남자는 나밖에 없어.’
제임스는 흡족하게 웃으며 나디아를 응시했다.
별 볼 일 없는 소꿉친구는 특이하게도 다른 남자의 부인이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했다. 스테이턴 공작이 안았던 여자, 한때나마 공작 부인이었다는 여자가 됐다. 결혼한 후에는 이성을 의식하게 되었는지 찾아볼 수 없던 경계심도 보였다.
‘이렇게 예뻐질 줄 알았다면 진작 안아버리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게 너무 분명하게 보여서 손대기가 귀찮았다. 앤더슨과 일리야의 경계를 산다면 성가셔질 게 뻔했고, 무엇보다 손을 대면 반드시 책임져야만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언제든 손을 뻗어도 제 것인데 굳이 일찍 가져야 할 이유가 없었다.
지나간 과거를 아쉬워 해봐야 소용없다. 어차피 다시 그의 손아귀에 떨어질 테다. 그때까지 나디아가 제게 의지하도록, 힘들 때 자신부터 찾도록 자상하게 대해줄 참이었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는 잘 있어?”
“뭐?”
나디아가 걸음을 멈추고 제임스를 마주 보았다. 녹색 눈동자에는 채 아물지 못한 상처가 보였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레이나는 잘 지내?”
“아아, 레이나. 잘 지내. 아무래도 결혼한 후로는 자주 보지 못하지만 말이야.”
“그…… 렇구나.”
“연락해보지 않았어?”
“……워낙 정신이 없었잖아. 레이나도 그렇고 나도 결혼하느라…….”
“그랬지. 레이나도 네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어. 남편을 따라 시골에 내려가지 않았다면 네 결혼식에도 참석해주었을 텐데.”
“……그랬겠지…….”
“그렇지 않아도 파티를 좋아하던 애라 시골 생활을 얼마나 답답해하는지…….”
나디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제임스는 우울로 물든 그녀의 얼굴을 모르는 척했다.
“답답해하겠다. 레이나는 워낙 활발하잖아.”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장소가 있으니까. 그 애에게 시골은 안 맞지.”
제임스는 말에 뼈를 담았다. 그러나 레이나 생각에 빠진 나디아는 그 미묘한 뉘앙스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둔해 빠져서는.’
이런 점을 레이나는 무척 질색했다.
레이나 밀리언과 제임스 밀리언은 나디아의 몇 없는 친구였다. 제임스는 여전히 그녀의 친구이지만, 레이나 밀리언은 나디아가 결혼하기 두 달 전 칼리만 백작과 결혼하며 먼 백작령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날 밤 나디아가 레이나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제임스는 여동생에게 들어서 모두 알고 있었다.
나디아가 제 가족들을 워낙 끔찍하게 아끼기는 하지만, 그녀가 목숨을 버리듯 스테이턴 공작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결정을 하는 데에 레이나와의 일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장소에 있지 않으면 불행해져.”
“……레이나가 지금 불행하대?”
제임스는 눈을 깜박거렸다. 나디아가 레이나의 불행을 바라고 있다면, 제임스도 그녀를 다시 볼 뻔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아니, 말이 그렇단 소리야. 레이나는 편지로 하소연하기 바쁘니까. 언제나 그랬잖아. 얘기를 들어주고 가능하다면 해결해주고.”
하지만 나디아의 녹색 눈동자에는 저를 상처 입힌 소꿉친구를 향한 걱정밖에 없었다.
“너도, 나디아.”
그러니 네게는 그 자리가 안 어울린다는 거야. 제임스는 달래듯이 나디아의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반듯하게 뻗은, 그의 기억보다 훨씬 예뻐진 어깨였다.
“걱정거리가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도 돼. 난 네 편이야. 네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게 도와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