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00화 (100/150)

100화

*

나디아는 브릿 후작 부인이 눈앞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팔, 다리, 어깨, 허리 안 아픈 곳이 없다.

‘육체적으로 힘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소 쓰지 않던 근육에 힘을 주어야 했다. 23년간 잘못된 자세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더 쉽게 피로해졌다. 브릿 후작 부인은 올바른 자세를 요구하면서도 그녀가 타인이 보기에 어떻게 보일지를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표정, 눈빛은 말할 것도 없고 손끝, 머리끝까지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비록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곳이라 하더라도 방심하지 않도록.

‘후작 부인께서는 쉽게 해내고 계신데….’

겉으로 보기에 후작 부인은 딱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계신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완벽했다.

혼자 있더라도 방심하지 말 것. 말은 쉽다. 말만 쉬웠다.

브릿 후작 부인은 스스로 말하였던 것처럼 무척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나디아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를 떠올리며 그녀가 불같이 화를 내거나 체벌을 사용할 줄 알았지만, 브릿 후작 부인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디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화를 내거나 체벌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볼 뿐이었는데, 그 고요한 눈빛이 이토록 무서울 줄 몰랐다. 딱히 실망도, 비난도 담기지 않은 눈길이 “넌 여기까지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실망시키기 무서워서 한계까지 애를 쓰고 버티게 된다.

그러다 보니 수업이 끝날 즈음에는 언제나 녹초였다.

“배고프다….”

수업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였다. 점심 식사를 배불리 하고 왔다면 아직 배가 고플 리가 없건만, 곧 브릿 후작 부인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질 않았다. 오늘도 안나가 억지로 권해 삼킨 수프 한 그릇이 전부였다.

집에 돌아가면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지만, 막상 도착하면 입맛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아침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하는 바람에 나디아는 본의 아니게 살이 좀 빠졌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날씬해진다면 좋을 것 같다.

‘잘하고 있는 걸까?’

오늘로 닷새 째였지만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아 풀이 죽었다. 브릿 후작 부인은 딱히 혼을 내지는 않았지만 칭찬도 해주지 않았고 말이다. 나디아는 차가운 테이블에 뺨을 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셀리아 황녀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고, 시간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말했던 밤 이후로 루크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디아는 아무리 바빠진다고 해도 정말 얼굴 한 번 보지 못할 줄은 몰랐다. 새벽 늦게까지 깨어있는 앤더슨은 두 번이나 루크를 보았다고 하는데, 나디아는 아무리 버티려고 해도 새벽 1시를 넘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 긴장과 근육통으로 녹초가 되었던 몸 상태도 한 몫을 했다.

루크는 자신이 브릿 후작 부인에게 다니는 걸 끝까지 반대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 하고 있는 일이니 그에게 투정을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루크 보고 싶어, 끌어안고 투정부리고 싶어, 키스하고 싶어어어어어.’

루크라면 “그러게 내 말을 들었다면 힘들 일은 없었을 거다.”라고 말하는 대신 안아주며 위로해줄 거라고, 나디아는 확신했다. 야하고 끈질기고 치사하고 유치해도 제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일찍 돌아가도 어차피 루크는 없을 건데….’

오늘은 기필코 루크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볼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녁 식사를 거르고 초저녁부터 자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을 이어가면서도 나디아는 여전히 테이블에 이마를 박은 채였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나디아는 재빨리 자세를 바로하고 태연한 척 목소리를 냈다. 혼자 남았다고 소리내어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 문은 얇았고, 그녀가 혼잣말을 했다면 문 건너에 있는 사람이 들었을지 몰랐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나야. 기다려도 나오질 않아서.”

“제임스.”

“혹시 조모님께 혼이라도 난 게 아닌가 했지. 넌 어렸을 때부터 그랬잖아. 가정교사에게 혼이 났다고 혼자 틀어박혀 울고.”

“…내가 그랬나?”

“그랬어.”

제임스는 싱긋 웃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그의 눈이 그리움으로 물들었다. 나디아는 그가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는 눈길이 못내 불편해 화제를 돌렸다.

“후작 부인께서 널 많이 아끼시나 봐.”

“글쎄, 그래봐야 편지 심부름을 하는 정도지. 요즘 부인께 편지를 보내는 분들이 많아졌거든.”

“브릿 후작 부인은 누구나 좋아할 만한 분이시니까.”

“으음, 그것도 대답하긴 힘드네.”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디아의 말처럼 브릿 후작 부인은 사교계 내에서 인기가 좋았지만, 근래 그녀에게 쏟아지는 편지는 대부분 스테이턴 공작부인? 즉, 나디아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고 확신했다. 제임스는 브릿 후작 부인의 편지 내용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보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 그 사람들은 조모님보다 너에게 관심이 많을 걸.”

“나? 아, 내가 부인께 신세를 지고 있다는 걸….”

“적어도 빈번하게 드나들고 있다는 건 다 알지.”

“……정말 소문이 빠르구나.”

“새삼스럽게.”

평생 중 반년을 제외하고는 라 먼스트로드의 일원이었다. 유명 인사의 일거수일투족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대단한 소문이 된다. 나디아는 비교적 소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소문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듣고자 한다면 얼마나 많은 소문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남일이기만 했을 때에는 그렇구나, 하고 말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당사자가 되고 보니 이런 걸 어떻게 다 알았을까 의아해졌다. 브릿 후작 부인의 말이 떠올랐다. 혼자 있을 때에도 방심하지 말라던.

혼자라고 생각해도 사실은 누가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정말 몰랐어? 아무도 네게 알려주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요즘은, 피곤해서.”

“랭커스터는 여전하군. 앤더슨 형님도 일리야 누님도.”

나디아는 가만히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여전하다는 그의 말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길을 느낀 제임스가 약간 당황하며 변명했다.

“나쁜 뜻은 아니었어. 네 가족들이 여전히 널 사랑한다는 뜻이었지.”

“…….”

“너만 모른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목소리가 저절로 싸늘하게 튀어나왔다. 예전이었다면? 나디아는 생각했다.

같은 상황에 놓이고 보니, 자신이 얼마나 제임스의 말 한 마디에 당황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떠보듯 던진 말에도 나디아는 수십 가지 상황을 상상하고 걱정했다. 가족들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만큼, 그에게 듣는 정보가 유일한 진실이라고 여겼던 탓이었다.

“왜 이리 날카로워. 너 정말 많이 피곤하구나?”

“……아냐, 아니, 응…. 피곤해서 예민해졌나 봐. 미안해, 제임스.”

나디아는 왜 자꾸 제임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거슬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딱히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이건 다 루크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를 끌어안고 잠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딱 5분, 아니 1분만 루크를 끌어안고 있으면 힘이 날 것 같은데….’

고작 닷새로 지쳤다고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그를 보지 못한 닷새는 그녀가 보냈던 어떤 닷새보다 길었다.

“괜찮아, 나디아. 무리하고 있으니 지칠 만하지. 얼마나 힘들겠어. 너도 힘들 거 알아. 조모님을 찾아뵐 이유가 부쩍 늘기는 했지만, 네가 걱정되니까 나도 널 보고 싶었던 거고 말이야.”

“으응….”

진심 어린 걱정에 나디아는 제임스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그의 말과 표정이 거슬린 것은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제 입장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고 말아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그가 운 좋게 공작에게 시집을 가서(과정은 전혀 행운이 아니었지만) 돌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힘들기는 해도 무리는 아니야. 계속 얘기해 줘. 아, 이제 그만 일어날까.”

“에스코트하죠, 부인.”

“금방인 걸. 혼자 가도 되는데.”

나디아는 제임스가 내미는 손을 모르는 척 외면하며 혼자 일어섰다. 그녀의 말처럼 굳이 에스코트가 필요없는 거리이기도 했지만? 나디아는 제임스가 부담스러웠다.

닷새나 매일 그녀를 기다렸던 것도 부담이었지만, 지나치게 친밀하게 구는 태도나 거리가 특히 불편했다. 자연스럽게 외면하고 거절하는 것도 어려웠다.

“예의차리지 마, 쑥스럽게.”

“쑥스러워 할 필요 없는데.”

“얘기나 계속 해줘. 내가 브릿 후작 부인을 찾아와서 폐를 끼치고 있는 건 아니지?”

나디아가 한발 앞서 복도를 나섰다. 제임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틀어올린 머리카락 덕분에 어깨와 목덜미가 깨끗하게 드러났다. 등이 곧게 뻗어 가느다란 목과 어깨가 돋보였다. 뒷모습만 보면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디아는 무안할 때 어깨를 움츠리며 웃는 버릇이 있었다.

“제임스?”

발소리가 나지 않아 의아해진 나디아가 뒤를 돌았다. 제임스는 깜짝 놀랐다.

‘나디아가 이렇게 예뻤나?’

얼굴이야 예쁜 편이었지만 특출나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나디아는 어디 하나 눈에 띄는 구석이 없었다. 돈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제임스는 비뚤게 생각했다. 얼마나 돈을 들여 관리했으면 그저 그랬던 얼굴이 예뻐 보이겠냐고 말이다.

그러나 비뚠 감상과 별개로 그는 진심으로 나디아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브릿 후작 부인의 저택을 부지런히 찾은 이유에는 분명 나디아를 향한 걱정이 있었다.

나디아는 그의 여동생이나 다름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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