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어느 쪽이 좋아 보여?”
“…….”
“역시 사파이어가 좋을까?”
“…….”
“하지만 에메랄드도 포기하기 힘든데….”
셀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고민을 하는 듯 심각한 얼굴이었다. 둥글게 다듬어진 손톱 끝에는 호화로운 귀걸이 두 쌍이 놓여 있었는데, 선명한 사파이어와 에메랄드 주변을 작은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귀걸이였다. 디자인은 똑같지만 보석의 색만이 다르다. 루크가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사파이어든 에메랄드든 내겐 다 어울린다는 뜻이지?”
“……예에.”
“그럴 줄 알았어. 둘 다 가져야겠어.”
산뜻하게 결정을 내리자 시녀가 재빨리 귀걸이 두 쌍을 호화로운 보석함에 담았다. 고민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가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녀들은 태연했다. 루크가 보기에도 셀리아는 처음부터 둘 중 하나를 고를 마음이 없었다. 마음에 든 물건을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그녀에게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고민도 하지 않았으면 되었을 텐데.’
셀리아는 두 쌍의 귀걸이를 두고 저울질하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루크는 그녀의 쓸데없는 고민에 어울리느라 날려버리고 있는 시간이 매우 아까웠다. 루크가 말했다.
“장신구 구매도 공식적인 일정에 포함됩니까?”
“어머, 당연하지.”
“전하께서 부르기만 하시면 궁에 앉아 고르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그러면 네가 따라와주지 않을 거잖아.”
“…….”
“고집스럽게도 성가신 조건을 다는 바람에 말이야.”
셀리아가 깔깔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루크는 눈을 돌려 주변을 훑었다. 보석점은 처음 방문한 가게였지만 그는 며칠 전 이 거리에 와본 적이 있었다. 랭커스터 가에 안겨줄 선물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라 먼스트로드에는 번화가가 여럿 있었지만, 귀족들의 수준에 맞출 만한 물건을 갖춘 가게가 모인 고급 상점은 모두 이 거리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귀족은 물론이고 황족이 직접 가게를 방문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보통은 허가를 받은 가게에서 엄선한 물건을 들고 궁을 찾아가니까.
그러나 황태자 레너드가 향수 가게에 즐겨 방문하듯 황녀 셀리아 또한 직접 진열된 물건을 보고 고르는 행위를 즐기는 듯했다. 가게 주인과 점원들이 황녀의 방문에 익숙한 것을 보면. 참 성가신 남매였다. 나름 몰래 움직이느라 최소한의 호위만 데리고 다니는 레너드와 달리 셀리아는 자신의 시녀들까지 주렁주렁 달고 움직였다.
시중을 들어줄 시녀가 없으면 불편하니까.
루크는 셀리아가 드레스, 구두, 장신구를 고르며 무의미한 고민을 이어가는 모습을 다섯 시간째 지켜보고 있었다. 가게를 옮길 때마다 흑곰 기사단이 주변에 재배치되었다. 실로 인력 낭비였다.
“궁에 계시는 편이 안전할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알잖아? 위협이야 새삼스러울 뿐이고, 하나하나 겁을 먹어서야 아무것도 못 해.”
“…….”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사람을 불러다 끌고 다니는 주제에 할 말인가. 루크는 눈으로 험악한 말을 쏟아냈다. 셀리아는 진열장에 팔을 괴고 그를 보며 웃었다. 상체를 기울인 탓에 가슴 윗부분의 곡선이 유혹적으로 드러났다. 남자라면 당연히 눈이 갈 노출이었는데도 루크의 눈길은 그곳을 스치지도 않았다. 셀리아는 검지로 입술을 스치며 은근하게 눈을 휘었다.
“게다가 모처럼 제국 최강의 기사님이 지켜주고 있는데, 궁에 틀어박혀서야 아깝지.”
“…….”
“라 트에빌레를 준비하기 위해서인지 내가 갈 만한 파티를 열어주는 사람도 없고.”
연말 최대의 축제였다. 보름간 이어질 연회를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기사는 낮에 열릴 검술 대회를, 귀족들은 밤에 열릴 무도회를 준비한다. 셀리아가 사들이는 장신구며 드레스도 라 트에빌레 준비의 일환이었다. 보름간 같은 드레스를 돌려 입을 수는 없었으므로, 여러 벌의 드레스와 그에 맞는 장신구, 구두를 사들여야 했다. 셀리아는 이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내가 더 아름다워지는 과정인 걸.’
어떻게 즐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셀리아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스스로 보아도 자신의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다. ‘모후를 닮아 아름답다’는 찬사는 사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셀리아는 자신이 훨씬 젊고 아름다운데 왜 어머니보다 못하다는 뉘앙스로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버지를 보고 있노라면 어머니만 빼닮았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를 드리게 되지만 말이다.
‘내가 봐도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수가 있어? 셀리아는 루크를 흘긋 보았다. 그는 이 공간에서 홀로 이질적이었다. 빈틈없이 차려입은 갑옷과 허리춤에 매단 커다란 검, 보석점이 아니라 전장에 서 있는 양 무섭게 굳은 얼굴이 그러했다. 그는 도통 웃는 법이 없었다.
‘아깝게. 잘난 얼굴을 하고서.’
저런 미모를 수염 속에 방치해 두었던 과거만 보아도 루크가 제 외양에 영 관심을 두지 않는 성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셀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내 중에는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는 모양이니, 루크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셀리아가 제 드레스를 고르며 그에게 옷을 맞춰주겠다고 했을 때에도 그는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라거나 “필요없습니다”라거나 “거절합니다”라는 세 가지 답변을 돌려가며 거절했다.
쪼잔하게도 루크는 셀리아가 그를 멀리했던 과거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땐 몰랐으니까……. 아니, 당연하잖아. 인간의 몰골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남편으로 삼을 생각을 해?’
실리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스테이턴 공작은 셀리아에게 완벽한 짝이었다. 황제는 넌지시 약혼을 맺으려 하였지만, 스테이턴에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셀리아부터가 난리를 치며 거절하는 통에 성사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아까운 이야기였다. 가만히 두고만 보았으면 이 남자는 지금쯤 내 것이 되었을 텐데…….
‘앗, 눈 마주쳤다.’
루크의 시선이 제게 흘러오기 무섭게 셀리아는 싱긋 웃었다. 루크는 곧장 미간을 찌푸렸지만, 셀리아는 신경쓰지 않았다. 저래봤자 어차피 저 남자는 그녀의 손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녀는 제 유혹 앞에서 고고한 척하는 남자를 많이 만나보았다. 부인을 목숨보다 사랑한다던 신사도 결국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구두 끝에 입을 맞췄다.
관심없는 척 싸늘하게 외면한 이 순간을, 훗날 후회하며 사죄하게 될 테다. 그러니 지금은 신경쓸 일이 아니지. 셀리아가 말했다.
“있지, 루크. 역시 상처가 되었나 봐?”
“……네?”
“내가 널…….”
셀리아는 깊이 한숨을 쉬며 제 손바닥에 뺨을 기대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은 듯 반짝거렸다. 누가 본다면 진심으로 그에게 미안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널 피해 다녔던 것 말이야.”
“…아.”
그 얘기를 하려고. 루크는 코웃음을 쳤다.
“신경쓰지 않습니다만.”
“…이것 봐, 그러니 이리 냉담하지.”
“…….”
“나도 어렸지 뭐야. 네 모습이 너무 무서워 보였어.”
무슨 말도 안 되는……. 루크는 가증을 떠는 셀리아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셀리아는 단 한 번도 루크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무서워하기는커녕 마음속 깊이 무시했다. 셀리아는 루크가 스테이턴 공작이라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스테이턴이 아니었다면 셀리아는 제 눈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그를 치워버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스테이턴이라서 치우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두어야만 했다.
그건 루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셀리아가 황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딴 헛소리를 듣고 있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지도 않았겠지. 루크는 입을 다물고 눈으로 욕을 쏟아냈다. 셀리아는 그의 눈빛에 담긴 의중을 읽고서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루크. 용서해줄 거지?”
“…….”
“……뻔뻔한 이야기일까? 상처를 입혀놓고서 이제 와서?.”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셀리아의 외면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이 되어 버릴 판이다. 루크는 짜증스럽게 셀리아의 말을 끊었다.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 용서해주는 거야?”
“…….”
빌어먹을, 빌어처먹을…….
“고마워, 루크.”
루크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였지만 셀리아는 그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무어라 말하든 들을 생각도 없었다. 루크는 셀리아가 왜 굳이 여기서 저 말을 꺼냈는지 알 만했다. 점원들은 흥미진진하게 황녀와 공작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이 이 가게를 나서기도 전에 이 대화는 소문이 될 것이다. 대충 황녀와 공작이 드디어 화해를 했다는 식이겠지.
루크는 입꼬리를 비뚤게 당겼다.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자리에 없었어도 셀리아는 제가 원하는 소문을 만들어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닷새간 소문이 퍼질 만한 장소만 골라 그를 끌고 다녔으므로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져 있었다. 거기에 화해했다는 식의 꼬리가 더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이곳은 스테이턴 영지가 아니었다. 라 먼스트로드에 거점을 두고 있지 않았으므로 제아무리 유능한 안나라도 퍼져나가는 소문을 막기는 힘들었다.
고작 닷새째이니 앞으로 아흐레가 남았다. 아흐레만 더 참으면 그는 이 영악한 황녀를 떼어버리고 나디아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일 분이 한 시간 같은 고문이 되겠지만, 그는 스테이턴의 의무를 되새기며 인내할 참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나디아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었다.
루크는 오늘 밤에는 반드시 나디아를 깨워서 대화를 나누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가 오해하지 않도록. 그러나 새근새근 잠든 얼굴을 보면 깨우기가 미안해서?.
셀리아가 귀에 사파이어 귀걸이를 가져다 대며 물었다.
“자, 봐. 어울리지.”
“제 대답이 필요하긴 합니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도 셀리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