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98화 (98/150)

98화

17. 동경과 경멸

나긋한 손길이 뒷목을 감는다. 머리칼 사이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파묻히면 버거운 숨이 뺨에 닿는다. 부푼 입술을 한 입에 삼키고 허리를 끌어당기면, 삼키지 못한 신음이 달콤하게 흘러들어온다. 기대로 떨리는 허리가 사랑스러워 쓰다듬고, 매끄러운 뺨에 입을 맞추었다.

‘힘들면 말하시오, 나디아.’

‘힘들지 않아요….’

말과 달리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과 헐떡거리는 가슴이 가련했다. 기사도 따라오기 힘든 제 체력에 그녀가 맞출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나디아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기분 좋아요? 루크.’

‘……보다시피.’

느릿하게 깜박거리는 눈꺼풀을 따라 녹색 눈동자가 사라졌다 드러나길 반복했다. 루크는 나디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입술에 닿아 짠맛이 났다. 어리광을 부리듯 땀에 젖은 이마를 제 목덜미에 비비는 몸짓이 사랑스럽다.

‘루크가 좋으면, 나도 좋아….’

오, 신이시여. 루크는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커다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사람을 이토록 달콤하게 만들어놓으면 어쩌란 말입니까. 잡아 먹으라고요? 황홀해 죽으라고요….

“각하.”

제이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달콤한 회상에 빠져있던 루크가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제이의 시선이 루크의 중심을 재빨리 훑었다. 다분히 무례한 시선이었지만 피해자도 가해자도 신경쓰지 않았다.

“굳이 여쭈지 않겠습니다만, 때와 장소를 가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빌어먹을.”

“황궁입니다, 각하.”

“빌어처먹을.”

“…….”

“제이, 지금 몇 시냐.”

“오후 1시 3분을 막 지났고, 정확히 14분 전에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지.”

나디아와 있으면 1분이 1초처럼 흘러서 안타까운데.

“입궁하신지 3시간 지났습니다….”

“사람을 불러놓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자에게는 3시간도 지나친 인내 같은데.”

“어쩌겠습니까, 여인은 준비에 시간이 걸린다는데요.”

“시간 아깝게. 이러는 중에도 나디아는….”

성마르게 이마를 문지르는 손가락 사이로 짙어진 눈동자가 사납게 빛났다. 루크는 로렌스 하버의 보고를 떠올리며 이를 으득 갈았다.

‘제임스 밀리언, 조사한 바로는 브릿 후작 부인의 먼 친척입니다. 친손자는 아닙니다만 어렸을 때부터 드나들며 친분을 쌓았다고 합니다. 부인은 종종 심부름을 시키는 모양이고요.’

‘알 만하군, 부려먹혀 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셨겠지.’

‘부인께서는 친구라 소개해주셨지만 제가 보기엔 영….’

로렌스 하버는 떨떠름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상쩍은 짓이라도 했나?’

‘아, 아닙니다.’

‘……수상쩍은 말이라도?’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 왜, 사람을 보면 딱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영 찝찝한….’

‘단순히 네 녀석의 느낌만으로 나디아의 친구를 의심하라?’

‘그, 그런 건 아닙니다만, 피오나 아가씨도 별로라 하셨다고….’

‘나디아는 친구라고 네게 소개했어.’

‘그…… 수상쩍은 부분은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냥 친구라면 5시를 기다려 만나러 올 것 같지는….’

‘…….’

‘않습니다만….’

‘…….’

‘겨우 닷새째이긴 합니다만….’

‘……우선 주시해라. 절대 나디아를 혼자 두지 말고.’

‘넵!’

‘그 새끼랑 단둘이 둬서도 안 된다. 자리를 피해달라고 해도 멀리 가지 말고 숨어서 엿들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래봬도 은신에는 자신있습니다!’

‘…믿겠다.’

로렌스 하버, 이 어리숙한 신입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는 불안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없는 것보다야 나았다.

고작 닷새였다. 나디아는 부지런히 브릿 후작 부인의 저택을 드나들었고, 루크는 그녀와 대화 한 번 나누어보지 못했다.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나가서, 잠들고 난 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루크는 잠든 그녀를 깨울까 봐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면서도 부득불 그녀가 잠든 방으로 기어들어갔다.

잠든 얼굴이라도 보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곤히 잠든 얼굴만 바라봐도 하루의 피로가 씻겨 내려갔다.

남편인 자신은 나디아의 목소리 한 마디 듣지 못하는 닷새 동안, 제임스 밀리언은 나디아가 돌아가는 시간에 맞추어 그녀를 기다렸다. 로렌스 하버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나디아가 의심하지 않도록 그녀가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만 신사적으로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그리 길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10분 남짓. 그러나 그 10분 남짓한 시간이 루크는 신경이 쓰여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10분씩 닷새째이니 50분, 무려 1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나디아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을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웃어 주었을까.

생각하니 끝도 없었다. 루크는 자신이 이토록 속이 좁은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

루크 자신도 나디아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신경이 덜 쓰였을 것도 같았다.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랬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 새끼가 나디아와 1시간- 무려 하루의 24분의 1이나 보내는 동안 그는 그녀와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말 한 마디도!

닷새나!

‘이게 말이 되나. 남편은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하는 동안 빌어먹을 새끼는 친구랍시고 1시간이나 대화할 수 있었다는 게….’

이래서 싫다고 한 거였다. 역시 나디아가 만류했어도 아프다고 드러누웠어야 했다. 팔이나 다리를 부러뜨렸으면 되었을 텐데.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 한번 없었던 루크는 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볍게 팔을 부러뜨리겠다고 말했더니 나디아는 그 예쁜 눈을 매섭게 부릅뜨고 다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다치기만 해 보라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루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끄으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나디아가 보고 싶다.”

“각하, 소리내서 말씀하셨습니다.”

“빌어먹을, 나디아를 보러 가야겠어.”

“참으십시오, 안 됩니다.”

“제기랄, 제이, 너도 기사단에 합류해!”

“싫습니다. 저까지 가면 누가 각하를 막습니까?”

“너라고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시도에 의의를 두는 거죠….”

진심으로 가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루크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가 온다고 해도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를 마당이었다. 그러나 제이의 존재 자체만으로 루크는 스테이턴의 의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제이는 이미 루크를 막고 있었다.

“이 추운 날에 밖에서 고생하기도 싫고요. 꼴보기 싫다고 하신다면 하버와 교대할 겁니다.”

“안 돼. 내가 제일 교대하고 싶으니까. 나도 못하는 걸 네가 하게 둘 것 같으냐?”

“…….”

라 먼스트로드에 데리고 온 20명의 흑곰 기사단은 황녀의 호위를 위해 궁에 배치되었다. 루크가 궁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황녀의 처소 주변을 경호했다. 물론 루크가 퇴궁하면 그들도 사라지지만, 흑곰 기사단이 지키는 한 감히 황녀를 습격할 수 있는 암살자는 없을 것이다. 독살이 아니라면 셀리아를 죽일 방법은 없다.

제이는 흑곰 기사단에 합류하지 않고 루크의 곁에 남았다. 그건 루크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제이는 루크가 튀어나가지 못하는 제어 장치인 동시에 셀리아의 속셈을 망치는 걸림돌이었다. 셀리아를 떠올린 루크가 이를 아득 갈았다.

‘미친 것들.’

예감이 그저 예감으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라 먼스트로드는 루크의 상식 이상으로 미친 도시였다. 미치는 게 당연했다.

황제와 황녀가 나란히 미쳤으니까.

“돌아가면 곤란해, 루크.”

“……오셨습니까, 전하.”

제이가 급히 예를 갖추었다. 루크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비뚜름한 눈으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방향을 보았다.

셀리아 황녀의 응접실은 주인의 성격을 반영하듯 우아하고 고상하게 꾸며져 있었다. 어느 하나 값비싸지 않은 물건이 없었고,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게 없었다. 세심하게 고른 가구와 장식물, 촛대,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라는 그림까지. 공기를 떠다니는 향기마저 세련되었다. 그야말로 꽃의 도시에서 태어난 황녀의 거처답다.

그리고 셀리아 황녀는, 이곳에 완벽하게 어울렸다.

윤기가 흐르는 밝은 금색 머리카락이 허리 너머까지 굽실거리며 흘러내렸다. 섬세하게 손질한 머리카락을 진주로 만들어진 핀으로 장식했다. 작은 얼굴에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꽉 들어차 있다. 지성으로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와 오뚝한 코, 여리게 물든 뺨과 오동통한 입술은 놀랍도록 조화로웠다.

얼굴만 보면 얌전한 숙녀처럼 보였지만, 가느다랗게 뻗은 긴 목과 훤히 드러난 쇄골, 길게 뻗은 팔다리와 낭창한 허리, 풍만한 가슴은 요사스러운 색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녀는 제가 가진 무기를 충분히 활용할 줄도 알았다. 드레스는 그녀의 장점인 긴 목과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하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천박하지 않지만 도발적이었다.

사내라면 누구든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는 미모였지만, 루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어머, 재미없긴.”

셀리아는 꽃망울이 터지는 듯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셀리아 황녀에게 반한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목소리만이 아니라 눈빛, 향기, 몸짓……. 모든 것이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저절로 성기에 피가 뭉쳤다.

그녀는 제이에게 은근한 눈웃음을 흘리고는 루크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몸을 기울여 부푼 가슴을 팔에 밀착시켰다. 루크가 미간을 찡그렸다.

“기다리게 해서 짜증났니?”

“떨어지십쇼.”

“정말?”

“…….”

루크는 대답 대신 직접 움직여 팔을 떼어냈다. 셀리아는 확 일그러진 루크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보고 또 보아도 저게 ‘그’ 수염 속에 숨어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짜증스럽게 찌푸려진 미간과 싸늘한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까지, 너무나 완벽했다.

‘정말이지, 딱 내 취향이야.’

루크는 셀리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를 유혹하려 작정하고 꾸민 이 미모를 보고도 태연하다.

정복욕이 불타올랐다. 결혼을 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정절을 맹세한 성직자도 결국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게다가 이 완벽한 남자 옆에 붙은 여자는 그녀와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경쟁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 그런 건 그녀에게 방해물이 아니었으니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셀리아는 만족스럽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라 트에빌레’ 전까지 기필코 이 목석을 쓰러뜨리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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