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당당하게 말하기는 하였으나 제아무리 루크라 하여도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기란 불가능했다. 마음 같아서는 웃기는 소리 작작하라고 비웃어주고 싶어도 차마 그럴 수 없는 것은 신분의 탓이다. 스테이턴은 제국의 귀족이었으므로.
루크는 셀리아 황녀의 호위를 받아들였다. 다만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일정에 한하며, 황녀가 황궁의 처소로 돌아간 후까지 책임지지 않겠다는 전제를 달았다. 황제 또한 많이 양보한 결과였다.
공식적인 일정에 한정된다고 하여도 언제 불려나갈지 모르는 신세가 되는 건 마찬가지다.
“미안하오, 나디아.”
침울하게 사죄하는 루크에게 나디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려 했다. 그에게 말실수를 저지른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또다시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브릿 후작 부인은 셀리아 황녀야말로 나디아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최종점이라고 말했다. 나디아 또한 셀리아 황녀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그녀는 미혼 여성들 사이에서는 동경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타국까지도 유명한 아름다운 용모는 물론 명석한 두뇌와 능숙한 화술까지 갖추어 때때로 병약한 모후를 대신해 황실 업무를 보는 일도 종종 있다고 했다. 황제 또한 셀리아 황녀를 유독 아끼고 사랑한다고.
셀리아 황녀는 내년 여름 몰브티 왕국의 왕세자에게 시집가기로 되어 있었다. 몰브티 왕국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국으로, 왕비가 되면 제국을 등에 업은 그녀는 평생 사치를 부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디아는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셀리아 황녀는 분명 그녀와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좋을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용모, 높은 신분? 루크의 옆에 서도 자연스러울 사람.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영광스러운 임무이니까….’
황족, 황실, 그리고 대귀족. 나디아에게는 낯선 세계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루크. 잘된 일이잖아요….”
“…잘 됐다고?”
“영광스러운 임무니까요.”
루크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그가 오해하지 않도록 서둘러 덧붙였다.
“저도 라 트에빌레까지는 브릿 부인께 다니느라 바쁠 테고, 또….”
“…계속 말해보시오.”
“그리고, 으응!”
좁은 내벽을 두꺼운 페니스가 가르며 들어왔다. 갈라진 입구를 얕게 파고들었다 빠지기를 반복하던 끝이 일순 깊이 파고들자 나디아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이미 루크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쥐고 있어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나디아는 그를 원망스레 보았다. 말해보라고 했으면서 말을 할 수 없게 만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쏘아보는 눈길을 받으면서도 루크는 태연했다.
“불편하진 않소? 역시 베개가 더 필요하겠지.”
루크가 팔을 뻗어 나디아의 머리 위에서 베개를 끌고 왔다. 베개를 나디아의 허리 아래에 받쳐주자 엉덩이가 위로 쑥 올라갔다. 그것뿐인데 자세가 바뀌었다. 나디아는 당황해서 입을 벙긋거렸다.
“잠깐, 루, 루크….”
“자….”
“루크, 이건 너무, 읏!”
“응? 뭐라고 했소, 나디아.”
다정한 음색이었다. 루크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제 납작한 배와 부끄러운 줄 모르고 활짝 벌린 두 다리,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잡은 루크를 찬찬히 보았다.
나디아의 시선이 떨어지는 대로 루크의 시선도 흘러내렸다. 나디아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헐떡이는 숨을 따라 흔들리는 가슴과, 그런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며 여전히 얕게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는 루크의 페니스까지. 채 반도 들어가지 못한 페니스가 애액으로 젖어 있었다.
적나라한 광경이었는데, 눈을 뗄 수도 없었다.
루크는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의 납작한 배를 쓰다듬었다.
“끝까지 넣으면, 여기까지 닿을까.”
“안, 안 돼요. 찢어질 거야….”
“너무 작아, 나디아.”
그가 제 어깨에 걸쳐진 나디아의 오른 다리에 고개만 돌려 입을 맞추었다. 나디아가 바르르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랫배가 당겼다. 강하게 수축한 내벽이 페니스의 끝을 조이자 루크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비뚤게 웃으며 말했다.
“바쁠 테니 잘 되었다고?”
“아, 아니…. 으응!”
“당신은 나와 떨어지게 되어도 아무렇지 않소?”
“아니, 그게, 아닌, 흣….”
마치 그의 페니스 형태를 기억시키려는 것처럼 루크는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나디아는 처음 겪는 경험이라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그와 몸을 섞을 때면 늘 뜨겁게 빠져들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어쩌면 시작부터 달랐다. 침울하게 귀가한 그를 위로해주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키스가 시작되었다. 눈을 마주친 채 입술만 부딪치다 혀를 얽었으나 여전히 느릿하고 평화로웠다.
평화롭게 시작된 부부 관계는 처음으로 대화할 만한 여유를 가져다주었지만? 그 때문에 루크의 사죄와 심술이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는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나디아가 예민한 지점을 문질러 자극했다. 차라리 뜨겁고 빠르게 휘몰아쳤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여유롭게 자꾸 대답을 독촉했다. 흥분하고 싶지 않은데 제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착실히 뜨거워졌다.
말을 할 틈을 주어야 말을 할 것 아닌가. 힘이 들어가 악문 턱과 바싹 긴장한 근육, 꼿꼿하고 단단한 페니스는 그 또한 흥분했다고 알려주었지만, 저를 보는 얼굴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욕망에 초연한 듯 일그러지지 않은 말끔한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다. 나디아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아니란 말이에요….”
“나디아?”
“루크, 이 바보, 으흑….”
눈물을 참으려고 했는데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비겁한 수단을 쓰고 말았다. 하지만 낯선 루크는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는 상냥하게 안아주고, 키스해주고, 사과해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돌변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무서웠다.
‘헉.’
루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짓을.’
셀리아 황녀가 굳이 자신을 호위로 지명한 의도가 무엇인지 루크도 알고 있었다. 뻔뻔스러운데다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생각이다. 역겨운 그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더욱 싫었고, 나디아는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잘 됐다는 말에는 어쩔 수 없이 섭섭했다.
자신에겐 부담스러운 그 자리가 셀리아 황녀에겐 잘 어울리니 잘 되었다는 듯이 들려서.
그래서 아주 조금 심술을 부린다는 게 그만 심해지고 말았다. 나디아는 루크 자신을 배려하여 부담을 갖지 않도록 말해준 것일 텐데. 나디아는 그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는 걸 알면서.
질투해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미, 미안하오, 나디….”
“나도 루크랑 떨어지기 싫어요.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나디아가 울컥 소리치며 그를 쏘아봤다. 루크는 어정쩡한 자세로 굳었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일하러 가지 말라 그래요?!”
“나디아, 미안하오, 내가 다 잘못했….”
“나더러 어떡하라고,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것도 아니면서….”
“…….”
왜 이럴 때조차. 루크는 스스로가 쓰레기 같았다.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힌 채 도전적으로 노려보는 녹색 눈동자가 예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저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다. 수줍게 눈을 내리깔거나 다정하게 웃는 얼굴도 좋았지만, 울먹거리며 쏘아보는 눈길은 또 달랐다.
눈길 한 번에 녹지 않는 눈처럼 뭉쳐있던 섭섭함도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을 정도로 쉬웠다. 애초에 나디아가 잘못하여 생긴 섭섭함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혼자 섭섭해했다가 혼자 푸는 꼴이다. 정말이지 멍청하게 말이다. 루크가 말했다.
“당신이 애원해주면, 안 갈 거요.”
“……황명이라면서요….”
루크는 더 참지 못하고 얼굴을 내려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나디아는 고개를 돌려 그의 입술을 피하려 했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 루크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 샐샐 웃고 있었다. 웃는 게 예뻐서 슬그머니 화가 풀리려고 했다. 나디아는 부러 힘주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오. 정말 가지 말라면 안 갈 거요. 앓아눕지, 뭐.”
“……?”
“죽어가는 사람을 호위로 써먹을 순 없을 테니.”
“네?”
“아프다는데 어쩌겠소?”
당연히 농담인 줄 알면서도 목소리며 표정이 퍽 진지해 헷갈렸다. 나디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루크를 노려 보았다.
‘아무래도 루크는…….’
그녀는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입으로 뱉었다.
“……어른스러운 생각은 아니네요…….”
“…….”
“전, 루크가…… 다정하고 어른스럽다고만 생각했는데.”
“…….”
난생처음 들어보는 평가였다. 루크는 침음을 흘렸다. 나디아 앞에서는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남자이고 싶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 앞에서는 점잖게 말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나디아를 겁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사실은 엄청 야하고.”
나디아의 눈길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몸이 이어져 있었다. 힘을 잃지도 않았다. 제 이야기를 하는 줄 아는지 크게 꺼떡거렸다.
“엄청 끈질기고….”
“…….”
“무모한 아이 같아요.”
“……어른스럽다는 평도 처음이지만, 아이 같다는 평도 처음이군.”
습관적으로 사과하려던 나디아가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루크는 웃고 있었다. 나디아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씩 웃고 있는 루크는 낯설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나도 몰랐소, 내가 이렇게 유치한 줄은.”
“?유치하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알고 있소. 하지만 정말이오, 난…….”
어른스럽지 않고, 다정하지도 않다. 그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사랑을 붙잡기 위해서.
“어쨌든 당신이 싫어하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좋아.”
“싫지 않아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해버린 나디아가 횡설수설했다.
“그게, 저도 어른스럽진 않고, 생각보다 그렇다는 거지, 그냥….”
루크가 픽 웃었다. 나디아는 분명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이유 모를 심술을 당한 셈이었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그녀가 한 말 때문에 루크가 상처라도 받았을까 봐 어느새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어디까지 다정할 셈이지. 어디까지 사랑스러울 셈이지.
“사랑하오, 나디아.”
“?치사해, 갑자기….”
“야하고 끈질기고 유치하고 치사한 남편이 싫지 않다면.”
“…….”
그렇다면.
“계속 해도 괜찮겠소,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