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거절합니다.”
“…고려해보는 척도 안 하나?”
“싫습니다.”
“이봐….”
레너드는 골치 아픈 듯 이마를 감싸 쥐었다. 거절할 줄은 알았으나 예의상 고민하는 척은 할 줄 알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셀리아가 아직도 싫은가. 그래, 싫어할 만은 하지. 그 애는 언제나 버릇이 없었으니까….”
“딱히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애는….”
자식의 일이라면 일단 감싸고 볼 부모가 보기에도 셀리아의 행동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오죽하면 셀리아를 스테이턴 공작가에 시집보내려 했던 황제조차 혀를 내두르며 그녀를 떼어놓았을까. 그러나 루크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담담하고 산뜻했다. 레너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뭐야. 자네도 미인에게 약한가. 하긴, 그 애라면 보기만 해도 화가 풀릴 테지. 자네가 보기에도 미인인 거로군? 하하….”
“…….”
“……아닌가?”
“대충 어떻게 생기셨는지는 알겠습니다만, 인상이 흐려서.”
“…….”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떠올려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만 정확한 이목구비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미인인지 아닌지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
“절 싫어하시는 것 같아 웬만하면 피해드리는 게 시끄럽지 않, 실례, 조용할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그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시끄럽게 구는 게 싫어서 피해 다니려 했을 뿐, 루크에게 있어 셀리아는 ‘싫다’는 생각조차 할 가치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만한 인상조차 주지 못했다고 말이다. 레너드는 이 대화를 셀리아가 직접 듣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쪽으로 승부욕이 강한 셀리아가 들었다면 당장 죽어도 잊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면서 덤벼들 것이었다.
황후를 닮아 제국에서 가장 빼어난 미인이라는 수식을 셀리아는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걸 무시당했으니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셀리아에게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제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남자들을 비웃는 걸 무척 좋아했다.
아직 결혼 전이니 대놓고 즐기지는 않았으나 셀리아가 자신의 추종자들과 어떤 식으로 즐기고 있는지는 레너드도 알고 있었다. 처녀이기만 하면 문제가 없으니 그런 건 괜찮았다. 문제는 셀리아의 취향이었다. 그녀가 직접 다가가 고르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애처가로 소문이 난 신사였다. 혹은 어떤 숙녀를 오랫동안 짝사랑했다고 알려진 기사이거나 신에게 정절을 맹세한 사제도 있었다.
즉 자신을 보지 않는 남자를 주로 노렸다. 셀리아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황녀가 아니었다면 꽤 논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트러블은 없었다. 다행히도.
‘내 여동생이지만 참으로 뻔뻔하기도 하지.’
‘늠름하고 잘생긴 기사님’의 정체를 듣고 셀리아는 눈을 반짝거렸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야수 공작이 딱 제 취향의 미남이었다는 걸 알았으니 놀랍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그 길로 바로 황제에게 달려가 그를 호위로 달라고 간청할 줄은, 레너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그는 제 양심의 존재를 깨닫고 상식이 정상에 가까워진 참이라 더욱 그랬다.
황제는 셀리아의 간청을 기쁘게 받아주었다.
‘몰브티 왕국에 시집을 가도 도움이 되지만 스테이턴 공작가를 황실에 끌어들이는 쪽의 이득이 더 크다는 계산이시겠지. 지금의 부인과는 아직 자식도 없고, 결혼이야 취소시키면 그만….’
결혼을 취소시키는 방법은 그야말로 온건한 축에 속했다. 황제는 셀리아가 루크를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면 태연하게 랭커스터 남작의 딸을 죽여버릴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부인이 있다면 죽여 없애면 그만이고, 고작 남작의 딸을 죽인다고 후환이 생기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몰브티 왕국과의 거래도 마찬가지다. 몰브티 왕국은 일방적으로 혼약이 깨졌다고 해서 불만을 말할 입장이 아니었다. 보상이나 좀 주고 말겠지….
‘…….’
콩알만 한 양심이 쓰라렸다. 하지만 레너드 역시 스테이턴 공작가를 확실히 엮어두는 것이 더 큰 이득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못했다. 셀리아가 워낙 강경한데다 루크 또한 싫어하여 추진하지 못하였으나 둘이 서로 붙어주기만 한다면 남작가 따위는 고려할 바가 아니었다.
자꾸 떠오르는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의 눈물 젖은 얼굴을 무시하며 레너드가 이어 말했다.
“싫지 않다면 문제될 것 없지 않나. 맡아주게. 셀리아가 지금 죽어서는 곤란해.”
“저 말고도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어쩌나. 셀리아가 자네 아니면 절대 싫다는데….”
저 부자는 제멋대로 구는 딸 하나 어쩌질 못하는 건가, 라고 전패의 남자가 생각했다. 시종 웃고 있던 레너드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정색했다.
“황명을 받들게, 스테이턴. 자네가 제국의 귀족이라면.”
“……거기까지 갑니까?”
“셀리아는 내가 아니라 부왕께 간청했거든. 내 선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됐어.”
“…….”
“물론 시집갈 때까지 내내 호위해달라는 것은 아닐세. 자네도 바쁠 테고, 마냥 셀리아의 어리광에 어울려달라 할 수는 없지. 셀리아는 라 트에빌레가 끝나는 즉시 몰브티 왕국으로 보내겠네.”
“여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무려 스테이턴 공작을 호위로 부려 먹으려면 셀리아도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이건 셀리아가 제안한 걸세.”
레너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가 셀리아를 영리하다고 평하는 이유는 마냥 고집만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기한을 두면 루크도 무작정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제국을 떠나는 순간 셀리아의 죽음은 몰브티 왕국의 책임이 된다. 어느 쪽이라도 황제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루크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암살 시도가 정말 있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요는 셀리아의 지명이었다. 기간 제한이 붙은 이상 루크는 거절할 수 없게 됐다. 표면상 예의바르게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 휘말리다니.’
빌어먹을 능구렁이 부자, 아니 이번에는 부녀였다.
“언제까집니까.”
“라 트에빌레가 끝날 때까지는.”
“잊으신 겁니까? 제겐 부인이 있습니다. 지금 저더러 부인을 내팽개치고 황녀 전하의 호위나 하란 말입니까?”
“아.”
잊지는 않았지만 고려하진 않았다.
“스테이턴 가를 무시하시려는 게 아니라면….”
“알았네, 그럴 수는 없지. 라 트에빌레 전까지만 부탁하겠네.”
셀리아의 유혹이 성공하면 스테이턴 공작부인은 그저 남작의 딸이 된다. 셀리아는 물론이고 황제마저 계획이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고려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들의 계획에 비관적인 사람은 레너드 한 사람뿐이었다.
레너드는 다리를 꼬며 등을 뒤로 기대었다. 루크는 어지간히 짜증이 났는지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그나마 태자를 앞에 두고 있다는 인식은 있는지 욕설까지 뱉지는 않았다. 저 얼굴이 부인을 앞에 두고 어떻게 변하였나. 레너드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랭커스터 남작가와 자주 얽히고 있는데도 레너드는 정작 루크의 신부와 인사 한 마디 나누어본 적이 없었다. 저 남자를, 그렇게? 비위 상하는 얼굴을 하게 만든 여인이 이젠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 새벽에도 정작 부인 얼굴은 구경해보지 못했으니….’
사실 저 남자에게 결혼하라 부추긴 게 자신이라는 걸 알면, 그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루크의 성격상 부인에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을 것도 같았지만, 레너드는 루크가 거기까지 말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본디 첫사랑 상대에게는 멋지게 보이려고 필사적으로 허세를 부리게 되는 법이다.
청혼을 떠밀려 했다는 꼴사나운 고백을 자진해서 했을 리가 없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루크가 저 지경으로 빠져버린 것일까. 궁금하다면 직접 만나보면 그만 아니겠는가? 앤더슨을 불러내면 기회는 쉽게 만들 수 있었다. 루크가 셀리아에게 붙잡혀 있을 테니 그에게 저지당할 걱정도 없다. 레너드는 일그러진 루크의 얼굴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입니까?”
루크가 불쑥 말했다.
“뭐?”
“?호위 말입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면 됩니까.”
“보통 아침부터 밤까지겠지. 셀리아의 일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역시 못합니다, 빌어먹을!”
루크가 울부짖듯이 외쳤다. 이번만큼은 레너드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레너드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루크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셀리아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호위하라고?
“잠깐, 루크. 진정하게. 호위라고 해도 자네에게 숙식까지 하라고는 하지 않네, 셀리아가 거처 밖으로 나갈 때만 호위해주면?.”
“사람을 붙이겠습니다. 셀리아 전하를 암살하려는 자들을 잡아 족치면, 아니, 죽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이유이기는 한데.”
“이틀만 주십쇼. 라 먼스트로드를 다 뒤져서라도 잡아 죽여드릴 테니.”
“진정하게!”
당장 튀어나갈 듯이 루크가 몸을 들썩거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도중까지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돌변할 줄이야. 레너드가 살살 달래듯 말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황명일세, 루크.”
“…….”
“무엇이 문제인가? 자네도 납득해주고 있지 않았나?”
“……까.”
“뭐?”
“종일 나디아를 못 보지 않습니까.”
레너드는 루크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눈을 부릅뜨고 냉랭한 남자의 얼굴에서 농담기를 찾아보려 하였으나, 루크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심지어 심각했다.
충격을 받은 레너드에게 루크는 뻔뻔스럽게도 턱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보고 싶어서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