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고집을 부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나디아는 어젯밤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외로 끈질기구나, 루크….’
나디아에게 루크는 어른스럽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의견을 먼저 묻고 존중해주며 싫어할 만한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나디아는 루크가 이토록 반대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가지 말라고 강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또 루크다웠다.
갑작스럽게 털어놓은 속내에는 숨기지 못한 열등감이 묻어 있었다. 루크도 알아차렸으리라.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 해주었던 것일 테다. 상처를 받을까 봐 굳이 지적하지 않고서 말이다.
‘아니, 그러고 보면 관계 중에는 은근슬쩍 끈질…… 끈질겼나?’
그걸 끈질기다고 표현해도 되나. 한 번도 루크를 끈질기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다. 힘들다고 울면 곧장 페니스는 빼주지만, 잠들 때까지 가슴을 주무르고 유두를 빨며 은근하게 손바닥으로 다리 사이를 어루만졌다. 손가락이 그곳을 얕게 파고들기도 했지만 안까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자도 된다고 말은 하지만? 그런 애무를 받으면서 잠드는 건 며칠 밤을 샌 상태가 아니면 힘들었다. 결국엔 나디아 자신도 흥분해서 그를 끌어안으면 또….
‘낮, 낮! 낮이야! 낮!’
벌건 대낮에 떠올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브릿 후작 부인과의 티타임 도중에는 말이다. 나디아는 브릿 후작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후작 부인이 그녀의 머릿속까지 들여다보지는 못하겠지만, 떠올린 것만으로 죄책감이 들었다. 감사하게도 무리한 부탁을 받아들여 주셨으니 집중해야 한다.
비록 한 시간 반 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시지만 말이다…….
“여기까지인가요.”
“네, 네?!”
“어디 보자, 두 시간이 채 안 되는군요.”
“네?”
“말 없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고 있었어요. 집중력 말이에요.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네요.”
“네…… 네?! 제가 딴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브릿 후작 부인은 독심술사인걸까? 그렇다면 자신이 방금 떠올린 생각을 모두? 얼굴이 새빨개진 나디아를 브릿 후작 부인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 보듯 보았다.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취미는 없어요.”
“……?!?!”
“……이것도 문제겠군요.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점.”
“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집중력을 잃었다는 건 굳이 표정까지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깨와 등, 허리에서 힘이 빠져 자세가 무너졌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셔서 화가 나신 줄 알았어요….”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아야 방법도 나오죠. ‘라 트에빌레’까지는 고작 2주밖에 안 남았어요.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죠.”
“그, 그렇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쁘진 않아요.”
남작의 딸이었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손가락질을 받을 일은 없는 수준이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역시 브릿 후작 부인은 나디아에게는 고만고만한 남편을 얻는 편이 훨씬 행복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표현에는 그런 의미도 있었다.
“최악은 아닐 뿐이지만.”
“…….”
“2주는 짧지 않지만 사람 하나를 바꾸기엔 턱없이 모자라요. 어린애도 아니니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줄 수도 없는 노릇이죠. 오히려 어린애라면 나았을까. 안 좋은 습관이 들지 않았을 테니까. 세부적인 건 끝도 없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
“당신의 위치를 당신이 아는 거예요.”
“예? 아, 알고 있는데요….”
“제국에 단 넷밖에 없는 공작가의 안주인이에요. 황족을 제외하면 당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있지도 않아요. 하지만 누구나 남 눈치 보느라 바쁜 사람이 나보다 윗사람이라면 짜증이 나겠죠. 안 그래요?”
“그, 그렇….”
제 입으로 날 인정하려니 짜증이 나겠다고 말하는 것은 나디아라도 가슴이 아팠다. 나디아는 어물거리며 말을 흐렸다. 브릿 후작 부인은 그 모습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우아하게, 하지만 얕잡아볼 수 없는 사람으로 보여야 해요.”
“……저에게 가능할까요?”
“못할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당장 일어나 꺼지라는 뜻이었다. 나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달라지기 위해 매달렸다. 가지 말라 붙잡는 루크도 뿌리치고서 고집을 부렸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당신이 흉내 내야 할 가장 훌륭한 예시를 보여줄 수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지요….”
“예시요?”
“그래요. 속은 둘째치고 겉으로 보기에는 그만한 견본이 없을 텐데.”
나디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흉내 내야 할 예시라면 브릿 후작 부인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보다 더 우아한 귀부인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조만간 만날 일이 있겠죠. 만난다면 주의깊게 관찰해서 흉내라도 내보도록 하세요. 당신이 지향해야 할 최종점일 테니까.”
“그분이 누구신가요?”
브릿 후작 부인은 아주 옅게 웃었다. 아니, 웃는 것처럼 보였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이 싸늘했다. 나디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황녀 셀리아 전하.”
*
“셀리아 전하께, 그렇군요.”
“좀 놀라주지 그러나.”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반응이라 웃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레너드는 턱을 괴고 비뚤게 루크를 보았다. 매끄럽게 잘생긴 얼굴에는 표정이랄 만한 것이 떠올라 있지 않았으나 심드렁한 기색은 선명했다. 레너드가 덧붙여 말했다.
“황녀가 암살당할 뻔했다는데.”
“새삼스럽군요. 한두 번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야.”
한두 번이 아니기는 했다. 황족과 암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황족의 사망 원인은 암살이 가장 많았다. 사고사도 자연사도 실상을 알고 보면 암살인 경우가 셀 수도 없다.
레너드 본인도 암살의 위협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무얼 먹어도 음독 여부를 의심해야 하고, 어딜 가든 호위가 따라붙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호위가 그의 곁에서 떨어지는 법은 없다. 레너드에게는 사생활이 없는 셈이었다.
언제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게 당연한 인생이었다. 다행히 레너드는 웬만해서는 수치심도 느끼지 않아서 딱히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는 누가 보고 있어도 잘 배설하고, 잘 발기했다. 사생활이 없는 게 죽는 것보단 낫다.
“부르신 이유가 그겁니까?”
“아아, 뭐. 그것도 있고.”
“또 뭡니까.”
“기분 나쁜가, 지금?”
“……특별히 좋을 건 또 뭡니까.”
“이상하군. 편지에 기분이 좋아지는 허브를 넣어놨는데.”
“네?”
“어차피 내 편지는 다 불태웠을 것 아닌가?”
“…….”
불태울 걸 알면서도 계속 편지를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태우면 기분이 좋아지는 허브였다네. 내가 직접 조합했지.”
“……독성은 없습니까?”
“설마! 아무리 짜증나도 그리 어설픈 독살을 시도할 리가.”
짜증이 나기는 했다는 소리였다. 루크는 원래 레너드를 이해할 수 없는 인종이라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그 정도가 심해졌다. 싫으면 그만두었다면 될 일이고, 자신의 편지를 무시하는 게 괘씸했다면 오늘처럼 정식으로 불러다 화풀이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미 이렇게 성가신데 황제가 되면 어떨지….’
예상이 되기 때문에 끔찍했다.
“하려면 제대로 했을 테고, 어설프게 찔러만 봤다가 자네가 아니라 자네 부인이 위험해지면 곤란하지 않은가?”
“곤란만 하시면 다행일 겁니다만.”
“이거 봐. 이러니 장난을 칠 수가 있나.”
무엇보다 고작 장난으로도 부인에게 해를 입힌다면, 루크는 미련없이 제국을 향한 충심을 버릴 것 같았다.
스테이턴 공작령은 잃어서는 안 될 중요한 영지다. 게다가 크고 윤택한 영지를 잃어버리는 손실도 손실이지만, 스테이턴 공작가가 마음을 먹고 반역을 저지른다면 현 황실은 그를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그 어떤 타국보다 위협적이다.
“물론 단순히 소식 하나 전하자고 부른 건 아닐세. 자네도 말했다시피 황족에게 암살 위협이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 다만 시기가 시기라.”
“……?”
“자네 정말 영지밖에 관심이 없군….”
“아닙니다. 전 스테이턴에 속한 모든 것에 관심을 둡니다.”
“…….”
“계속 말씀하시죠.”
“…셀리아는 내년에 몰브티 왕국에 비로 가기로 되어 있다네. 내년 여름이니 얼마 남지 않았지. 이런 중요한 시기에 시집보낼 황녀를 잃어서야 황실도 손해가 무척 커.”
“당연한 소리를 굳이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셀리아도 그걸 알고 있네.”
“…….”
“영악한 내 여동생은, 몰브티 왕국과의 협정이 제국에 꽤 유용하고? 시집을 갈 만한 황녀가 자신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 게다가 몰브티 왕국에서도 셀리아를 원해. 알다시피 그 애는 꽤 미인이잖나.”
미인, 이라고 하기는 하던데…. 제이가 읊은 주변의 평가일 뿐 루크는 단 한 번도 셀리아를 보고 미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보고 예쁘다거나 미인이라거나 귀엽다고 생각한 것도 나디아가 처음이었다. 루크는 복도에서 스쳐지나갔던 셀리아를 떠올렸다. 막상 떠올리려니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루크에게 셀리아는 이목구비의 형태나 이미지보다 눈빛으로 선명하게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혐오가 담긴 눈빛으로.
그런 걸 오래 기억하는 취미는 없었다.
여자의 얼굴 형태를 떠올리려 하자 자연스럽게 나디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고 싶다. 어떻게 해도 셀리아의 이목구비를 떠올리지 못한 루크가 포기하고는 말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황녀가 시집을 가든 말든, 암살 위협을 당하든 말든….
셀리아가 죽어 국장이라도 치르게 되면 일정에 변경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직 죽지 않았고, 일정 변경은 나중에 고려해도 되는 문제였다.
넓게는 황녀, 좁게는 자신의 여동생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발언이었지만 레너드는 따로 문제삼지 않았다. 셀리아와는 나름 가까이 지내고 있었지만, 그 또한 루크와 입장이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다만 지금은 죽어선 곤란했다.
“셀리아가 자네를 호위로 지명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