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나디아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는 무척 연약하게도 그녀의 손에 제 뺨을 기대었다.
“당신이 말한 근거대로라면 나야말로 자격이 없는 사람이오. 말주변도 없고 지나치게 크지. 귀족답지 못하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 영지에 틀어박혀 의무를 외면했고, 야수 공작이라 손가락질도 당하고 있지. 그럼에도 할 일은 지나치게 많아 당신을 성가시게 만들 거요.”
“아녜요! 루크는!”
“그에 비해 당신은 따뜻하고 다정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지. 사려깊고 다정해. 작은 상처에도 걱정해주고, 마음을 써줄 줄 아는 사람이오. 말을 못 한다고? 그건 당신이 다정한 말만 해주려고 단어를 신중히 고르기 때문이야. 꼭 필요할 때는 아무리 무서워도 용기를 낼 줄 알고, 위험도 감수해. 또 뭐라고 했지. 아, 그래. 몸.”
“그, 그만….”
“이 황홀한 몸 때문에 난 인간이길 기꺼이 포기했소. 당신 자는 얼굴을 보면서, 읍.”
“제발 그만해요!”
나디아는 견디지 못하고 루크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뺨, 귀, 목까지 뜨거워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몸에 대한 찬사까지 낱낱이 들었다가는 얼굴이 터지고 말 것이다. 나디아는 기어들어갈 듯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부탁이니까 그만해요…….”
“얼마든지 더해줄 수 있소. 아무래도 당신은 당신 장점을 모르는 것 같아.”
“으으으, 제발요!”
“몇 날 며칠을 말해주어도 모자라오.”
“?그건, 그건 루크라서 그래요…. 루크는 날 너무 좋게만 봐요!”
루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누구에게 할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커다란 남자를 연약한 강아지처럼 취급하는 바람에 랭커스터 가의 사람들마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녀가 알까. 아버지의 멱살을 쥐었다는, 누가 보더라도 오해할 상황에도 그를 믿어준 건 나디아가 자신을 좋게만 봐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성급하고 멍청한 남자를 말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모자라다고, 부족하다고 말했다.
다른 누구보다 나디아가 스스로를 모자라다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누군가 그녀를 모욕한다면 살려두지 않겠지만, 그 대상이 나디아 자신이어서야 도리가 없었다.
나디아는 그를 원망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루크는 문득 치밀어오르는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하고 젖은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야말로, 날 너무 좋게만 봐.”
울리고 말았다. 그가 가진 이름 때문에.
*
루크는 이후에도 끈질기게 나디아를 설득했다.
공작 부인이라는 자리 때문에 노력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지운 짐 때문에 당신이 변할 이유는 없다, 넌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는 진정으로 나디아 자체만을 바랐다. 그의 옆에 머물러주기 위해 나디아가 나디아답지 않게 변하려 노력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그를 불러대는 빌어먹을 황실 때문에 귀찮게 만들고 말 텐데 그 이상의 부담을 지울 수는 없었다.
루크의 설득에도 나디아는 끝내 수긍해주지 않았다. 그의 말은 믿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에게 한정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자신이 부족할 테고, 그러니 그를 창피하게 만들고 말 거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나디아의 말처럼 루크는 그녀의 일에는 객관성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었기에 더욱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침대 위에서라도 고집을 무너뜨려 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시도만 했다. 루크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딴 생각을 해…….’
그 사랑스러운 사람을 안으면서 딴 속셈을 품기는 무리였다. 이성을 잃고 나디아를 짓뭉개버리지 않도록 이성을 끌어다 모으는 게 고작이었다. 매끄러운 피부에 손을 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고 만다. 아름답다, 예쁘다, 황홀하다 등등 찬사는 있는 대로 끌어다 지껄였지만 그외의 사람 말은 모조리 잊어버렸다.
겨우 이성을 그러모아 한 마디를 하려 하면 나디아의 달콤한 신음이 귓가를 파고들어 흩어졌고, 또 정신을 차리면 나디아의 허벅지가 그의 허리를 감아 당겨 무너졌다. 애초에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밤부터 아침까지 끈질기게 이어진 설득에도 루크는 번번이 실패했다. 나디아는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안나의 도움을 받아 몸단장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조르는 광경은 어제나 그제나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나디아가 조금 더 단호해졌다는 점이었다.
나디아는 루크를 비롯한 안나와 랭커스터 가족이 자신을 좋게만 봐 주어 어리광을 부리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래서는 좋아질 수 없다고도 말이다. 버릇이 나빠져서 아주 못된 와이프가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귀여운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루크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어리광을 들어주려고 해도 거절만 하는 사람의 버릇을 어떻게 망쳐 놓겠는가?
제발 버릇이 나빠져서 못된 와이프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고도 잠깐 생각했다는 건 평생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었다.
그리고 부인을 좋게만 보는 게 뭐 어떤가.
‘전혀 나쁠 것 없지.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현상 아닌가?’
일방적이라면 어느 한쪽이 불행해질 여지나마 있겠지만 그들은 그렇지도 않았다. 서로의 좋은 점만 보여 곤란하다니, 어디 가서 고민이랍시고 말을 꺼냈다가는 자랑하냐며 뭇매만 벌 테다. 나디아가 부족하다면 자신은 인간으로서 모자라다. 나디아에게만 반응하는 아랫도리와 근육밖에 없는 멍청이였다.
그럼에도 나디아가 반드시 브릿 후작 부인에게 가서 ‘빌어먹을 가르침’이라는 걸 받고야 말겠다면.
“좋소, 나디아.”
“이해해주는 거예요?”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나디아의 앞에 섰다. 나디아가 기대에 부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루크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당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내게도 부족한 부분이오. 정 가야겠다면 같이 가겠소.”
“네?!”
“각하?!”
주군의 실패를 구경하던 제이와 안나가 깜짝 놀랐다. 제이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제정신이십니까? 소환장이 왔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난 못 봤다.”
“그리고 브릿 후작 부인과의 사이도 썩….”
제이가 말꼬리를 흐리며 나디아의 눈치를 살폈다. 브릿 후작 부인에게 가야 하는 나디아에게 알려주기에 썩 좋은 정보는 아니었다. 안나가 이어 말했다.
“의외로군요, 각하. 어린 시절에는 곧 죽어도 얌전히 앉아 계시지는 못하셨으면서….”
“이제 어리지 않다. 필요하다면 닷새든 열흘이든 앉아서 버틸 수 있지.”
“그야 가능하신 건 압니다만, 그 고집 센 선대마저도 포기하셨던 예절 교육을 이제 와 받으시겠다 말씀하시다니 놀라워 그렇습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는 법이다.”
“네에, 뭐어, 배움에는 그렇지요….”
배움이 목적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누가 봐도 루크의 동행은 목적이 달랐다. 고목나무 같이 커다란 이 남자의 목적은 명백히 부인의 뒤를 따라다니겠다는 거였다. 28세, 곧 29세가 되면서 어린아이가 부모 뒤를 쫓아다니듯 부인 뒤를 쫓아다니려 하니, 정신연령으로 따지면 딱 예절 교육이 필요한 연령인 셈이었다.
“제이가 지적해 주었지만 각하, 브릿 후작 부인과는 사이가 썩 좋지 않으시지요.”
“……나쁘지는 않다.”
“각하께서는 나쁘지 않다 생각하시겠지만 후작 부인은 어떨까요.”
“…….”
“명백히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부인께서 간곡히 부탁해 얻어낸 기회를 물리고 싶어지실지 모르죠.”
브릿 후작 부인과 친분이 깊은 안나의 말이기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윽, 그럼 같이 가기만 하겠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후작 부인께서는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며칠을 보낼 수도 있는 분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크윽….”
“부인께서 며칠을 들여 얻어낸 결과를 헛수고로 만드시려면, 뭐어, 늦은 배움에 도전해보시지요.”
나디아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디아는 루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루크….”
촉촉하게 젖은 녹색 눈동자에 담긴 애원은 루크를 아는 그 어떤 공격보다 강력했다. 한 방에 무너졌다.
“그럼 각하, 내일까지 매너에 대한 책이라도 찾아놓지요. 어린아이가 아니시니 독학으로도 충분하시죠?”
“다녀올게요, 루크.”
안나는 의기양양하게 나디아를 데리고 브릿 후작 부인의 저택으로 향했다. 무너진 루크에게 제이는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슬슬 패배에도 익숙해지지 않았습니까? 힘내십쇼.”
“…….”
딱히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의도는 위로였다.
“후작 부인께서도 부인께는 약해지지 않으실까요. 안나도 따라가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셨다면 나디아가 바라는 대로 해주실 분이다.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
그가 걱정하는 건 단 하나다. 나디아가 상처받는 것. 자신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
‘상처받을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루크는 어째서 나디아가 자신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짧은 대화로도 나디아의 자기비하는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가끔 자책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그토록 심할 줄은 미처 몰랐다. 누구에게나 단점은 있다. 단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디아는 자신의 단점을 증오하고 있었다. 타인의 실수에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자신의 실수에는 자비가 없었다.
하루만 나디아와 자신의 눈을 바꾸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의 눈에 비친 나디아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누구지?’
나디아의 영혼을 꺾어버린 개새끼는.
가족은 아니었다. 랭커스터 가는, 루크 자신이 이런 말을 하기도 민망하지만 하나같이 나디아라면 죽고 못사는 사람들이었다.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피붙이가 아닌 비비안과 조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디아를 보는 눈동자가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따뜻했다.
토라져도, 말이 느려도, 행동이 어설퍼도 비난하지 않고 웃으며 기다려 줄 사람들이다. 경우에 맞지 않는 어리광을 부린다고 해도 기뻐할 것 같아서, 오히려 나디아가 버릇없이 자라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디아는 제 행동이 잘못이라 여겼다. 따라가지 못하고, 부족하고,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라 특성일 뿐이라 말해줄 가족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말인즉슨, 누군가 나디아에게 꾸준히 ‘잘못’을 주지시켰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면 미움을 받을 것이다, 잘 해내지 않으면 질릴 것이다, 그리고 버릴 것이다.
미워할 거라고.
아마도 나디아에게는 소중했을 누군가가. 루크는 그 점을 용서할 수 없었다. 누구인지 몰라도 그녀를 의도적으로 상처입힌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