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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93화 (93/150)

93화

16. 나도 나를 모르는데

루크는 고작 살갗이 조금 벗겨진 상처에 정성스럽게 약을 덧바르는 나디아를 관찰했다. 좁게 모은 미간과 굳게 다문 입술은 그녀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귀한 기회로군.’

빤히 쳐다보면 나디아는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거나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잠든 얼굴이 아니면 얼굴을 자세히 뜯어볼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적었다. 라 먼스트로드에 온 후로는 그녀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적기도 했다.

이마는 모친에게서, 눈동자는 부친에게서 물려받았다. 사랑스러운 사람의 얼굴에서 그 가족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흥미롭고 유쾌했다. 세월이 흘러 조금 더 친해지면 그들이 가진 습관이나 버릇도 알 수 있을까. 집중할 때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버릇은 그녀만의 것일까. 놀랐을 때 짓는 표정이 똑같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

나디아의 아름다움을 수식할 어휘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둥근 이마나 우아한 눈썹이나 오뚝한 콧날과 장밋빛 뺨 같은 식상한 어휘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그가 국어 공부를 게을리했기 때문이거나, 결국은 왕도가 최고이기 때문일 테다. 그래, 나디아에게는 최고가 어울리지….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웃는 얼굴이었다면 더 좋았겠으나 나디아는 울어도 찡그려도 예쁘다. 고작 까진 상처로 걱정을 받는 게 민망했으나 그마저도 자신을 위한 마음이라 생각하면 사랑스러웠다. 가슴 안쪽과 다리 사이가 찌르르 울리며 뿌듯하게 차올랐다.

아프기는커녕 약을 바르는 손길이 간지러울 상처였지만 나디아는 마치 뼈가 드러난 상처라도 되는 양 심각했다.

‘나디아에게는 큰 상처일 수 있겠지, 아마도….’

루크는 애써 이해해보려고 했다. 나디아는 그가 입는 상처에 매우 민감하고 예민하게 굴었다. 나디아는 마음이 여리고 착했지만 특히 아픈 사람을 지나치지 못했다. 부랑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접근할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었다.

‘잠깐, 그건 위험한 거 아닌가?’

만약 부랑자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나. 최소 상해, 최대? 루크는 이를 악물었다. 나디아가 다쳐 쓰러지는 상상만으로도 전신의 피가 식어내리는 듯 끔찍했다. 그는 그녀의 선량한 마음을 사랑했지만, 타인을 돕기 위해 그녀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됐다.

무작정 남을 돕지 말라 말하여도 설득력이 모자랐다. 무슨 근거를 들어 나디아를 설득할까 고민하던 루크는 이내 다른 방법을 찾았다.

‘위험한 새끼를 못 만나게 하면 되겠지.’

나디아의 도움을 받은 부랑자는 루크 자신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녀 앞에 쓰러진 부랑자는 그가 먼저 도와주면 될 일이니까.

처치는 금방 끝이 났다. 상처에 발린 약과 붕대가 아까웠다. 아깝고 민망했다. 그러나 그 혼자서는 풀지도 못할 붕대였다. 나디아가 풀어주면 소중하게 보관해둘 예정이었다.

나디아는 그의 오른손을 잡고, 손등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놀랐어요.”

“미안하오, 나디아. 엘릭 위로 떨어지는 벽돌을 보니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서 그만….”

“…….”

“다음부터는 도구를 쓰겠소. 다치지 않도록.”

나디아는 붕대를 피해 그의 손목을 매만졌다. 여전히 고개는 들지 않았다.

28년을 살면서 몰랐던 사실이지만 혹시 손목이 성감대였던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는 안타까워 어루만지는 손길마저 흥분되는 게 말이 되나.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거예요?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어요.”

“운이 좋았소. 놀랐을 엘릭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사고도, 계기가 되어준 셈이고….”

불행한 사고가 아니었다면 랭커스터 남작 부부가 자신을 편하게 여겨주었을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아녜요.”

나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매가 촉촉하게 젖어 일렁거렸다. 루크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나디아, 우는 거요!?”

“아녜요, 루크. 마법이 아니라, 운이 아니라 루크가 노력해준 결과가 나온 거예요.”

“운이고 마법이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소.”

“중요해요!”

“…….”

“중요하고 대단해요. 저라면 못했을 거예요, 루크.”

정말 중요하지 않았다. 운이든 노력이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결과만 좋으면 되는 일이었다. 나디아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하면 그딴 건 먼지만큼의 가치도 없었다. 루크는 왼손을 뻗어 나디아의 눈가를 닦아냈다. 눈가에 닿은 엄지에 눈물이 묻어났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울었던 거였다.

‘아, 이, 멍청한 새끼. 다치지 말았어야지….’

고작 벽돌 따위를 쳐냈다고 피부가 벗겨지다니, 단련이 부족했던 게 틀림없었다. 더 단련했더라면 엘릭도 구하고, 나디아도 울리지 않을 수 있었다. 돌을 쳐내고도 멀쩡한 피부가 사람의 것인지는 차치하고.

“당신이 노력해준 만큼 나도 힘낼게요. 나도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거예요.”

“뭐?”

“공작부인 자리가 나에게는 많이 과분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내 가족과 어울리려고 해준 노력만큼, 나도….”

“?과분하다니?”

“과분하죠. 신분이 맞지 않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전 공작가에 대해서도 아는 게 너무 없잖아요.”

“…….”

“누구나 말할 거예요. 운 좋게 공작부인 자리를 차지한 행운아라고….”

“나디아.”

“……난 아직도 어린애처럼 간식이나 좋아하고, 그래서 살도 잘 쪄요. 방심하면 입던 드레스도 못쓰게 되어 버릴 거예요. 낯가림이 심해서 모르는 사람하고는 말도 잘 못하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질 못해서 익숙한 사람만 찾고요. 그러다 보면 더 멀어지고, 무서워요.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상대방이 절 답답하게 여긴다는 게 느껴져요. 내가 봐도 답답하니까….”

“나디아!”

“?미안, 미안해요, 루크.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브릿 후작 부인 앞에서 한 번 진심을 토해냈기 때문일까?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꾹꾹 눌러왔던 것들이 울렁거리며 마구 쏟아지려 했다.

루크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았을 본심이었다.

루크가 절대 스며들 수 없을 것 같던 자리를 차지한 것을 보니 마음이 복잡하게 엉켰다. 고맙고 미안한 동시에 너무나 부러웠다. 자신이라면 저럴 수 있었을까. 자신을 피해다니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다가가고, 호의를 보내고, 끝내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도저히 불가능했다.

루크는 원래도 멋있었지만, 그가 한층 더 완벽해 보이자 그렇지 않아도 모자랐던 자신감이 바닥났다.

오해를 푸는 걸 도와주고 싶었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오해를 가중시키기만 했다. 자신의 가족이었는데 설득은커녕 그녀조차 사이가 어색해져서…….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창피까지 당하게 할 수는 없어요….”

나디아는 천천히 루크의 손에서 제 손을 떼어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읊을 뿐이었는데 어쩐지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루크가 무엇이라도 말해준다면 좋겠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려 그렁거리는 눈가를 숨기고, 애써 밝게 덧붙였다.

“사실 루크가 이렇게나 잘생겼다는 걸 알게 되면 더 놀라지 않을까요?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걸요!”

“더 말하면 화낼 거요.”

목소리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나디아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루크를 화나게 만들었다, 고 떠올리자 맺혀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릿했던 시야가 뚜렷해지며 루크의 표정이 똑바로 보였다. 차가워진 목소리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다. 나디아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 농담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 믿어주기는 할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루크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고, 말했다.

“누구도 당신의 자격을 논할 수 없어.”

“…….”

“나 때문에 억지로 떠안은 자리요. 성가신 자리라 어쩔 수 없이 당신을 고생시킬지도 모르오. 하지만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자신을 낮추지 마시오. 변할 필요도, 노력할 필요도 없어.”

고작 그런 것……. 나디아는 루크의 목소리가 귀 근처를 웅웅 떠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까이에 루크의 눈이 보였다. 짙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에 낯선 고통이 서렸다. 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당신은 완벽해.”

“…….”

“완벽한 사람이오, 내게는.”

“…….”

“그러니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 당신이, 당신을 상처입히는 말은.”

눈가에 물기라고는 없었는데도 그가 우는 것 같았다. 나디아는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됐다. 그를 비난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모두 사실이었고, 사실 그녀는 혼자서는 더한 말도 했다. 소심한 열등감으로 가득한 속내를 알고서 제게 실망하고, 비난한다면 또 모를까, 어째서.

왜 루크가 더 상처를 받은 것 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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