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눈을 뜨고 꿈이라도 꾸는 걸까? 자신이 루크의 만류를 힘겹게 뿌리치고 나간지 고작 다섯 시간여가 흘렀다. 살짝 볼 안쪽 살을 깨물어보았다. 찌릿한 고통이 따랐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꿈 맞나 봐….’
어디서부터 꿈이지? 어쩐지 브릿 후작 부인이 너무 쉽게 자신을 받아주었다 했다.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지나친 행운에도 왜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그러나 꿈이 바라던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면 제임스와 마주쳤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제임스를 만나길 바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를 만났던 걸 제외하면 모두 그녀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루크의 만류와 걱정, 브릿 후작 부인이 받아준 일, 그리고 루크와 가족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이 광경도.
안나는 나디아를 정원으로 안내해주었다. 고집스럽게 숄을 건네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정원에 한 발을 들인 순간, 나디아의 눈앞에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정원에는 온 가족이 모여 있었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앤더슨의 일가-비비안, 펠릭스와 일리야의 일가-조지, 피오나, 엘릭까지 모두 함께였다. 그리고 루크까지 말이다. 가족들이 어디 있느냐 묻기는 했지만 루크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녀는 ‘랭커스터 가족’을 말한 거였다.
게다가 루크는 무려 직접 사다리를 타고서 외벽 수리를 하고 있었다.
‘루크가 왜 벽 수리를 하고 있어? 앨런 경은? 다른 사람은?’
루크가 벽 수리를 하고 있는 걸 앤더슨과 일리야, 부모님까지 바라보고만 있는 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나디아의 눈앞이 팽팽 돌았다. 꿈이 아니고서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루크는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말했다. 누군가와 친밀해지는 과정에는 타인의 도움이 지나치면 안 된다고 말이다. 나디아 자신도 가족들과 서먹해진 구석이 있어 고개는 끄덕였지만, 그녀는 솔직히 제 가족들과 루크가 완전히 친해지기는 무리라고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
루크도 소중하고 가족들도 소중하다. 소중한 사람들이 사이까지 좋았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루크를 어려워하는 심정도 이해했다. 억지로 친하게 지내달라고 부탁해봐야 소용도 없다.
동정으로, 강요로 친한 척을 해 봐야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루크가 나쁘지 않다는 건 알아주었고, 나디아 자신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도 전달했으니 가족들은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목적은 이미 달성한 셈이었다. 나머지는 천천히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대단하시네요.”
“역시 단련을 해야 할까요.”
“단련을 해도 무리가 아닐까, 각하 정도 되려면….”
앤더슨과 조지가 평화롭게 대화를 나눴다. 아들과 사위의 옆에서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평화로웠다.
‘고작 다섯 시간 만에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나디아가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못하자 안나가 작게 속삭였다.
“방법을 조금 바꿔 보았습니다. 호의를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 서툴렀던 거죠.”
“…….”
“부인의 가족 같은 분들은 주변에 없던 타입이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하지만 스테이턴에게 패배는 있을 수 없죠…….”
“…….”
“피오나 아가씨의 협력으로 엘릭 도련님, 펠릭스 도련님과 먼저 친분을 쌓았고, 그 과정에서 콜드웰 부인께서 간식을 들고 다가와 주셨습니다. 거기까지면 좋았을 텐데, 외벽 일부가 부서지면서….”
“예?!”
“놀라지 마세요, 부인. 보시다시피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요. 각하께서 엘릭 도련님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벽돌을 잡아내셨습니다. 엘릭 도련님은 무사하십니다.”
“…떨어지는 벽돌을, 잡아요……?”
나디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평소라면 당연히 눈치를 채겠지만, 오랜 패배 끝에 얻은 승리에 취한 안나는 깨닫지 못했다.
“예. 훌륭하게 깨부수셨죠. 살펴보니 외벽이 낡았는지 수리가 필요할 것 같더군요. 아이들 비명소리에 놀란 가족분들이 달려 나오셨고, 곧장 수리하지 않으면 또 위험해질 수 있어서….”
“루크!”
안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디아는 루크를 부르며 뛰어나갔다. 사다리 위에 있던 루크가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했고,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돌렸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숨을 삼켰다.
“위험하오, 나디아! 발 밑을 봐!”
“나디아, 뛰지 마! 넘어져!”
앤더슨이 놀라며 소리쳤지만 나디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저에게 습관처럼 웃어 보이는 루크에게 다짜고짜 외쳤다.
“손!”
“응?”
루크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손 보여줘요!”
“나디아, 진정,”
“손!”
크게 외치며, 나디아는 사다리를 꽉 붙잡았다. 수리해야 할 외벽은 그가 손을 뻗으면 닿을 높이로, 그리 높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나디아는 혹시 사다리가 흔들려 그가 떨어질까 봐 걱정이었다. 옆으로 넘어질 수도 있고 겨울바람에 흔들릴 수도 있는데 왜 아무도 잡아주지 않았던 것인가.
“지금 내려가겠소. 나디아, 뒤로 물러나요.”
“싫어요! 사다리가 흔들릴지도 모르잖아요. 잡고 있을 거예요.”
“흔들리지 않아, 그러니….”
“루크는 나더러 뛰지도 말라고 했으면서!”
“그건….”
나디아가 워낙 앞만 보고 달려왔던 데다, 그녀의 발밑에는 외벽 수리를 위한 공구와 자재가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다리를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 입을 다문 나디아에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루크는 그녀가 왜 이러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우선 그녀가 시키는 대로 내려가기로 했다.
랭커스터 가족들이 그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안나와 제이는 익숙한 얼굴이다. 그들은 이와 비슷한 광경을 종종 보았다.
나디아는 루크가 땅을 딛을 때까지 사다리를 꽉 잡고 있다가, 그가 내려오자마자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두 손으로 잡고서 앞뒤를 살폈다.
“나디아?!”
“왼손이에요?”
“왼손?”
“벽돌에 맞았다면서요!”
“뭐? 아, 그거.”
왼손의 손바닥, 손등, 소매를 걷어 손목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상처는 없었다. 나디아는 그의 오른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루크가 냉큼 손을 위로 올려버려 잡을 수 없었다. 나디아가 눈을 치켜떴다.
“?다쳤죠.”
“살갗이 살짝 벗겨졌을 뿐이야, 나디아.”
“거짓말.”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거짓말은 안 해도 기준은 다르잖아요. 이제 안 속아요.”
“속인 적도 없지 않소….”
“등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뭐라 그랬어요. 긁혔을 뿐이라면서요.”
“……그건.”
맹세컨대 당시 상처는 깊지 않았다. 꿰맬 필요도 없었고, 뼈가 부러지거나 장기를 다치지도 않았다. 시간만 흐르면 낫는 상처를 루크는 모두 긁힌 상처라 분류했다. 나디아가 아니었다면 약도 바르지 않고 내버려뒀을 것이다. 나디아가 손을 내밀었다.
“손, 보여줘요.”
“…….”
“안 보여줄 거예요? 평생 손 들고 있을 거예요?”
“정말 살짝 까졌을 뿐이오, 나디아. 엘릭이 다치는 것보다는?.”
“그야 당연히 그건 다행이에요, 잘했어요, 고마워요. 자, 손.”
“…….”
이길 수가 없다. 나디아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루크는 오른팔을 들어올린 채 잠시 고민했다. 오른손으로 떨어지는 벽돌을 격추시켜 부순 것까지는 좋았는데, 제 손등을 살펴볼 생각은 당연히 해보지도 않아서 어떤 상태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혹시 피가 났다면 나디아도 놀랄 것이고? 겨우 자신을 편안히 대해주는 랭커스터 가족이 제게 미안해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긁힌 등을 보고도 울었는데….’
나디아를 애지중지하는 가족들 앞에서 그녀를 울리고 싶지도 않았다. 가족들 앞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도 나디아가 울리진 않겠지만? 루크가 고민하는 와중에도 나디아는 물러서지 않고 꿋꿋하게 기다렸다. 루크는 금세 제 처지를 이해했다. 그녀가 요구하는 걸 그는 결코 거절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말조차 무시할 수 없는 처지에, 녹색 눈동자 가득 저를 향한 걱정만 담고서 하는 말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손만 내놓으라니 다행이지….’
루크는 오른손을 내어주었다. 나디아가 그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세상에, 손등….”
“피도 안 났잖소, 봐.”
“다 까졌잖아요! 얼마나 따가운데!”
누가 들으면 다친 사람은 루크가 아니라 나디아인 줄 알 것이다.
벽돌을 주먹으로 깨부셨는데도 루크의 손등은 피부가 살짝 벗겨진 정도였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이니만큼 부딪친 부위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지만, 솔직히 멀쩡했다. 상처가 났다면 일리야가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디아의 눈에는 그가 마치 중상이라도 입은 듯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디아, 난 정말 괜찮소….”
“괜찮다고만 하는 거 좋은 습관 아니래요!”
“그, 그렇소? 하지만 정말 괜찮을 때는 뭐라고 해야….”
“아프다고 해야지!”
“아프지는, 않소만….”
아, 안 돼.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려 했다. 루크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스테이턴 성이었다면 이미 헤벌쭉 벌어진 입을 어쩌지 못했겠지만, 이곳은 랭커스터 저택이었다. 혹시 나디아를 놀리는 거라 오해하면 곤란하니까….
“자기 몸은 아끼질 않고…. 다치면 바로 약을 발라야죠, 왜 사다리 같은 걸 타요.”
“나중에 바르려고 했어, 정말이오.”
“이리 와요. 어머니, 약 상자 늘 두던 곳에 있죠?”
나디아가 루크를 끌어당겼다. 루크는 버티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자연스럽게 걸음을 떼었다. 그녀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표정근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응?’
루크는 제 뺨을 찌르는 다수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
“…….”
“…….”
루크는 깨달았다. 랭커스터 저택에서 이루려던 승리는 지금 이 순간 완벽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들은 오해 없이,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첫 승리는 어딘지 창피한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