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오랜만에 얼굴 보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야?”
제임스, 제임스 밀리언이었다. 나디아는 깜짝 놀라며 얼어붙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을 본 탓이었다. 그녀가 굳어있는 동안 제임스는 성큼성큼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어? 너무 가까운데.’
제임스는 겨우 한 사람이 설 만한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나디아는 뒤로 물러나야 할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 망설였다. 지나치게 가까운 것 같았지만, 제임스는 어떠한 의도가 없어 보였다. 우연히 친구를 만나 반가워하는 것만 같았다.
적절한 거리였다.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거리. 그러나 다시 말해 부적절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가까운 거리라는 뜻이다.
‘너무 의식하게 됐나.’
나디아는 무안해져서는 얼굴을 붉혔다. 괜히 자의식 과잉이 된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뒤로 물러서려는 발을 붙잡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제임스가 그녀의 얼굴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미안해, 제임스. 놀라서…. 오랜만이지.”
“그래, 오랜만이지.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어.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지만.”
“소식? 아, 밀리언 부인께서 어머니 병문안을 와 주셨지.”
“섭섭해, 나디아.”
“으응?”
“돌아왔는데 왜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어?”
“미, 미안해. 정신이 없다 보니….”
아예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가족들과 사이가 어색해지는 바람에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제임스의 모친, 밀리언 부인이 어머니의 병문안을 와 주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디아는 밀리언 부인과는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다. 그녀는 밀리언 부인이 예전부터 불편했다. 호들갑스럽고 쾌활한 밀리언 부인은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제 말만 쏟아내는 경향이 심했다. 그녀는 소문을 좋아하고, 갑작스럽게 스테이턴 공작과 결혼하게 되어 화제의 중심이 된 나디아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질문을 쏟아내려는 밀리언 부인을 건강 핑계로 일찌감치 쫓아내준 마리아가 아니었다면 한참을 붙잡혀 있어야 했을 것이다. 나디아는 밀리언 부인을 상대한 후에는 언제나 제가 말실수를 한 건 아닌지 돌이켜보느라 한참 시간을 써야 했다.
제임스가 말했다.
“랭커스터 부인께서 편찮으셨으니 네 마음도 불편했겠지. 이해해.”
“아냐….”
“여행에서 돌아와 네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게다가 상대는 그….”
“……난 괜찮아.”
“넌 늘 괜찮다고만 하지.”
제임스는 낮은 한숨과 함께 혀를 찼다. 나디아가 입을 다물었다.
“안 좋은 습관이라고 했잖아. 변한 게 없구나, 나디아.”
“…….”
제임스 밀리언은 나디아에게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밀리언 자작은 랭커스터 남작과 매우 절친한 사이로, 어렸을 때부터 교류를 가지며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다. 언제 어디서나 일리야, 앤더슨과 함께 다녔던 나디아는 또래 친구를 사귈 기회가 극히 적었다. 스스로도 낯가림이 심하고 불편해서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어렸을 때부터 친분이 있던 제임스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제임스의 여동생 레이나 밀리언과 함께.
레이나를 떠올린 나디아의 안색이 자연스럽게 어두워졌다. 라 먼스트로드에 돌아온 이후 머릿속 한구석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나디아? 안색이 나쁜데.”
“……괜찮아.”
제임스가 손을 뻗어 나디아의 이마를 짚으려 했다. 나디아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그의 손을 피했다. 제임스의 눈가가 미세하게 굳었다.
“정말 괜찮아,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 알잖아, 나 자주 그러는 거….”
“좋은 습관은,”
“나쁜 습관이지. 잘 안 고쳐지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브릿 후작 부인의 저택에 있어.”
“그야 조모님이니까?”
“어?”
“좀 멀기는 하지만.”
브릿 후작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 여동생의 아들이 제임스 밀리언의 부친, 밀리언 자작이었다. 브릿 후작 부인에게는 시누이의 아들의 아들이 되는 셈이다.
먼 혈연이었지만 브릿 후작 부인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까이해서 나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사소하고 하찮은 인연을 핑계로 브릿 후작 부인에게 접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다행히 브릿 후작 부인은 제임스를 꽤 마음에 들어하였기 때문에, 그는 자주 브릿 후작 부인의 저택을 드나들고 있었다.
“너는?”
“부탁드릴 일이 있었거든….”
“까다로운 분이신데.”
제임스의 다갈색 눈동자가 걱정으로 물들었다. 나디아는 또 속이 거북해졌다.
그의 걱정에는 네가 후작 부인의 ‘기준’을 통과했을 리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나디아는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고작 반년 남짓 흘렀을 뿐인데….’
제임스의 태도와 어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나무라는 말과 표정, 눈빛.
친구라고는 밀리언 남매밖에 없는 나디아에 비해 제임스는 인기가 많았다. 그는 다정하고 올곧은 성품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부유한 밀리언 자작 가문의 후계자였고, 잘생기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중심에 서는 제임스가 무척 부러웠다. 제임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디아는 제임스의 말이 다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올곧고 반듯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자신이 너무나 모자라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
자신을 위해 건네는 충고일텐데도 속이 답답해지고 말았다.
속이 답답해지는 자신에게 실망하여 더 깊은 자괴감을 품게 되는 굴레.
“부인?”
“?하버 경!”
“네, 네?!”
반가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로렌스 하버가 펄쩍 뛰어오를 듯 깜짝 놀라며 나디아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가 나디아와 제임스 사이를 가로막으며 눈을 부라렸다. 제임스가 물러섰고, 나디아가 그를 말렸다.
“친구예요, 하버 경.”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만 저도 모르게….”
부인께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전 죽거든요. 틀림없이 죽거든요. 로렌스 하버가 안도하며 물러섰다. 나디아는 그가 말을 이을 틈을 주지 않고 재빨리 덧붙였다.
“저희 늦었죠!”
“네?”
“서둘러야겠죠! 루크가 기다릴 테니까!”
“네? 예, 그야 각하께선.”
부인께서 눈앞에 없으면 안절부절못하실 분이기는 한데요. 로렌스 하버는 분위기를 맞추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죠?”
“네, 네? 아, 네! 그렇죠.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렇대, 제임스. 남편이 기다려서 어서 가봐야겠어.”
스스로 생각해도 손발이 맞지 않는 변명이었다. 어색하게 웃는 나디아에게 제임스가 말했다.
“바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응….”
“랭커스터 저택으로 방문할게. 가깝기도 하고.”
“……으응.”
“조심해서 가, 나디아.”
제임스는 기꺼이 나디아의 어설픈 도주를 모르는 척해주었다. 선선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제임스의 웃는 얼굴은 무척 선하고 깨끗했다. 나디아는 안도와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나디아가 마차에 오르고, 문을 닫은 로렌스 하버는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
제임스 밀리언이었다. 로렌스 하버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무해하고 선한 미소를 만들어 걸며 시선을 돌렸다. 로렌스 하버는 우웩 소리를 냈다.
저런 게 친구라니. 저런, 속이 시꺼먼 인종은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었다.
‘보고해야지.’
*
랭커스터 저택에 복귀한 나디아를 반겨준 사람은 단연 안나였다. 안나는 호들갑스러운 축하 대신 담담하게 그러실 줄 알았다고 말해주었다. 나디아에게는 그 어떤 축하보다 깊이 와닿았다. 그녀가 단 한 번도 제가 실패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감동스러웠다.
“목표는 ‘라 트에빌레’겠군요.”
“……그러고 보니 곧 열리겠군요.”
“부인께서 활약하시기에 충분한 무대겠어요.”
“…….”
안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의심 한 점 없는 신뢰에 나디아는 또 한 번 감동을 받았지만, 동시에 견딜 수 없이 부담스러웠다.
라 트에빌레.
연말을 장식하는 황실의 행사는 자잘하게는 다양했지만 개중 가장 크고 화려한 행사는 단연 라 트에빌레였다.
라 트에빌레는 보름에 걸쳐 열리는데, 낮에는 검술 대회를 열어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를 선발하고, 해가 저물면 성대한 무도회를 열었다. 황실이 주최하는 만큼 규모도 크고 호화로워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다.
그러나 랭커스터 가는 단 한 번도 ‘라 트에빌레’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요…. 자신이 없어요, 역시.”
“어째서요? 라 트에빌레는 매년 열렸을 텐데….”
“아버지가 가지 말라셨어요. 그런 곳에서는 필히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고요. 실제로도 많은 사고가 일어나요.”
사고가 일어나면 하급 귀족은 보호받을 수 없다. 특히 미혼 여성의 경우, 신분이 높은 신사의 눈에 들면 저항할 길이 없었다.
낮에는 검술 대회에서 피를 보고, 밤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무도회가 이어진다. 축제의 들뜬 공기는 그렇지 않아도 분별력이 모자란 사람들의 이성을 단체로 마비시켰다.
이성은 얇은 실처럼 무력하고 하찮다.
그러다 보니 랭커스터 남작처럼 오래 살고 싶은 하급 귀족은 자진해 라 트에빌레에 참여하지 않았다. 랭커스터 남작이 성실하기만 할 뿐 무해하다는 평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라 트에빌레에 참여하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셨는데, 갑자기 공작가와 연관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해보셨겠지….’
나디아의 소심한 성격은 명백히 부친 랭커스터 남작에게 물려받았다.
“안나.”
“말씀하세요, 부인.”
외출복을 벗고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은 나디아의 어깨에 안나가 두꺼운 숄을 걸쳐 주었다.
“혹시 아버지가 어디에 계신지, 아니지. 일리야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어제는 제가 돌아왔을 때 맞아주었는데 오늘은 어디에 갔는지….”
나디아의 질문을 듣고 안나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안내해드리려고 했어요, 부인.”
주름이 진 우아한 얼굴에 이제껏 보지 못했던 짓궂은 기색이 스몄다. 평소 어른스러운 태도로는 상상할 수 없던 얼굴이지만 의외로 매우 잘 어울렸다. 즐거움은 쉽게 전염된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안나를 따라 웃으며 물었다.
“언니에게요?”
“예, 부인. 가족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