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나디아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믿기지가 않았다. 방금 들은 말을 떠올려보았다.
‘매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네?’
‘도중에 포기할 거라면 시작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충고하죠.’
‘네?’
‘가세요.’
내몰리듯 일어나 방 밖으로 걸어나오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내리깐 청회색 눈동자는 그녀를 보지 않았지만 흘러나온 말은 분명 허락이었다.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기뻐서 마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안 돼, 혼날 거야!’
고작 얇은 문을 사이에 두고 있으니 환호성을 질렀다가는 어렵게 얻은 기회를 날리게 될 지도 몰랐다. 나디아는 하고 싶은 대로 소리를 지르는 대신, 구두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최대한 빠르게 걸었다.
어서 돌아가서 안나와 루크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브릿 후작 부인이 받아들여 주었다고, 온전히 자신만의 노력으로 그녀를 설득하였노라고 말이다.
‘완전히 실패한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입 밖으로 본심을 꺼내놓았다. 한 번 입을 열었더니 정도를 모르고 쏟아진 탓에 도중부터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만큼이나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컸다. 이 고백을 듣고도 슬퍼하지 않을, 그녀를 싫어하되 인내심을 가지고 고백을 들어 줄 사람에게 말이다. 마침 브릿 후작 부인은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브릿 후작 부인은 한참 침묵했다. 나디아는 형벌을 기다리는 죄수가 된 심정으로 브릿 후작 부인의 입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청회색 눈동자는 여전히 싸늘했고, 주름이 진 우아한 얼굴에는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실패라고 생각했지만 포기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디아는 내일도 브릿 후작 부인에게 찾아와 부탁을 하고 싶었다. 운 좋게 공작 부인이 되었으면서 인정까지 바라다니 뻔뻔하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긴 침묵 끝에 돌아온 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허락이었다.
물론 브릿 후작 부인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하여서 나디아가 단번에 완벽한 공작 부인이 되지는 못할 거였다. 겨우 흉내나 낼까. 그러나 겨우 흉내라도 좋았다. 남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면 충분했다.
그로 인해서 루크에게 창피를 주지 않을 수 있다면.
“부인, 돌아가십니까?”
“네, 하버 경. 마차를 가져와주세요.”
“예!”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흑곰 기사단원이 부리나케 뛰어갔다. 기사단원의 이름은 로렌스 하버였다. 지난 산악훈련 때 루크와 함께 실종이 되었던 사람으로, 기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나 봐.’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지 제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자꾸 시선을 흘렸다. 로렌스 하버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유가, 루크가 실종 내내 노래를 불렀던 찬양이 떠오르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면 오히려 나디아 자신이 쑥스러워지겠지만 말이다.
나디아는 현관에 서서 로렌스 하버가 마차를 가져오길 기다렸다.
‘기사님에게 마부 일을 시키게 돼서 미안하네….’
로렌스 하버는 “부인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해주었지만 나디아는 그를 부려먹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라 먼스트로드는 안전하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들어주질 않으니까….’
나디아는 라 먼스트로드에서 태어나 23년을 살았다. 밤이 되면 위험한 거리도 있었지만 대개는 안전했다. 그녀는 혼자 공원을 거닐거나 일리야와 단둘이 쇼핑을 다니기도 했다. 치안이 좋아서 여인들만 다녀도 안전했다.
그러나 루크와 제이, 안나에게 나디아의 주장은 통하지 않았다. 루크는 기어코 흑곰 기사단원을 그녀에게 마부 대신이라며 붙여주고 말았다. 로렌스 하버를 말이다.
브릿 후작 부인은 상부(喪夫)하고 자식들을 독립시킨 후 저택에 홀로 살고 있었다. 여인 혼자 지내고 있는 만큼 보안과 경계도 철저했다. 그러니까 어디에서도 위험할 일이 없었다.
‘역시 기사님께 마부 일을 시키는 건 미안해서 안 되겠어. 마차 다루는 게 서투르기 때문은 아니야, 그래서 오래 기다려야 하기 때문은 절대 아니야…….’
나디아는 외투를 여미며 입김을 불었다. 뽀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12월에 들어서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나디아?”
“……?”
로렌스 하버가 이름을 부를 리는 없다. 나디아는 낯익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있었다.
“제임스?”
*
루크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무서워 울음부터 터뜨리니 그게 싫어서 가까이 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하지 않으면 싫지 않다는 뜻이었다.
“한 번 더요!”
“더 해줘! 더!”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조르는 아이들에게 루크가 팔을 내밀었다. 아이들이 그의 팔에 답삭 매달리자, 그는 힘도 들이지 않고 번쩍 들어서 적당히 흔들어주었다. 아이들은 꺅, 꺅 비명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가며 즐거워했다.
“피오나, 너도 같이 하자!”
“싫어. 겨울 햇빛에도 피부가 탄단 말이야.”
“타면 안 돼?”
“나한테는 흰 피부가 어울려. 그러니까 싫어.”
“딱히 희지도 않은데….”
펠릭스는 피오나가 사납게 노려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는 건방진 사촌동생을 달래주는 대신 커다란 어른의 종아리에 매미처럼 매달린 또 다른 사촌동생을 돌보기로 했다.
“엘릭, 어지럽진 않아?”
“좋아! 신나! 더 해줘!”
일리야의 아들, 엘릭은 5세가 되었다. 피오나와는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조숙한 누나와 달리 남동생은 지나치게 해맑았다. 피오나는 먹고 자고 노는 것밖에 모르는 남동생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엘릭은 피오나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먹고 자고 노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루크는 제 다리를 꽉 붙잡고는 헤헤 웃는 아이가 정말이지 신기했다. 겁을 안 먹는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스스럼이 없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을 겁내지 않을 아이는 피오나뿐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펠릭스와 엘릭도 피오나 못지않게 대범한 아이들이었다. 일리야의 남편 조지가 주로 돌보고 있어 루크를 보지 못했던 엘릭은 처음엔 낯선 루크와 제이를 경계했지만, 식사 자리에서 몇 번 얼굴을 보았던 펠릭스가 그들을 알아보자 금세 친근하게 굴었다.
장난감과 간식, 그리고 지치지 않는 체력과 힘 덕분이었다.
아이들의 체력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제이는 일찌감치 나가떨어졌다. 수도 아이들이라고 얕봤다가 호되게 당했다.
루크가 물었다.
“너희는 내가 무섭지 않나?”
“아저씨가 뭐가 무서워요?”
“왜요?”
“왜?”
피오나, 펠릭스, 엘릭 순서였다. 루크는 제 입으로 말하기는 새삼스러운 대답을 꺼냈다.
“…얼굴이?”
“아저씨 잘생겼어요.”
“그런 편이시죠.”
“한 번 더!”
엘릭은 도중에 집중력을 잃었다. 피오나는 제 옆에 쓰러지듯 앉은 기사를 흘긋 보았다.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피오나로서는 그가 왜 저런 반응인지가 더 의아했다.
어른들은 이따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걸 싫어했다. 펠릭스가 말했다.
“난 얼굴은 상관없어요. 아저씨랑 노는 거 재밌는 걸요. 아버지는 이렇게 놀아주지 않으니까요.”
“우리 아빠도! 맨날 책 읽으라고 해.”
“맞아, 책 읽어야 훌륭한 사람 된다고. 난 기사가 되고 싶은데!”
‘거 봐요, 내가 말했죠?’라고 말하듯 피오나가 씩 웃었다.
루크는 감동했다. 앤더슨의 아들 펠릭스, 일리야의 아들 엘릭. 아직 11세, 5세의 어린아이들이지만 그들도 훌륭한 랭커스터였다. 처음으로 그에게 호의를 표현해 준 랭커스터인 것이다.
루크와 눈을 맞추어 제 공적을 어필한 피오나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안 그러시잖아. 나가 놀라고 하시는걸.”
“가-끔. 그래도 같이 놀아주진 않잖아.”
“오늘만 해도 나보고 같이 나가 놀라고 하셨고….”
루크가 귀를 쫑긋 세웠다. 피오나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책이나 보고 있지 말고 나가 놀라고, 아저씨랑 같이 말이야.”
“콜드웰 부인께서?”
“네. 아저씨랑 노는 거 다 보고도 저한테 가라고 했다고요.”
역시 피오나에게 조언을 구하기를 잘했다. 루크는 피오나에게 더 많은 보상을 안겨주기로 결심했다. 그까짓 리본, 원피스, 장난감…. 가게 하나를 통째로 선물해도 아깝지 않을 지경이었다. 루크가 진지하게 어떤 가게를 사주어야 할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또 말만 종알거리고 있구나? 그늘에 앉아서.”
“헉!”
일리야였다. 루크가 딱딱하게 굳었고(다리에 매달려 있던 엘릭이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제이가 헐레벌떡 일어났다.
일리야는 머쓱한 듯 뜨겁게 쏟아지는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피오나의 콧대가 한층 높아졌다.
“아이들 간식 시간이라서….”
일리야의 손에는 커다란 간식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피오나를 먼저 내려보내고, 그녀는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휴가에서 복귀한 밀라 부인에게 아이들이 먹을 만한 간식과 샌드위치를 잔뜩 싸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만 먹을 것이 아니므로 잔뜩.
밀라 부인은 그렇지 않아도 손이 컸다. 그 결과 간식이라기에는 부담스러운 무게의 바구니가 완성되고 말았다.
어쨌든 계기가 필요했다. 일리야는 한쪽 다리에 엘릭을 매달고서 뻣뻣하게 굳은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사과할 계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계기, 어깨에서 힘을 빼고 가족으로 받아들일 계기….
문전박대에 대한 사과를 담아, 일리야가 말했다.
“같이 드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