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89화 (89/150)

89화

*

“보기보다 질기네요.”

“네, 부인.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었어요.”

“네, 부인.”

“당신은 자존심도 없나요?”

“없는 편이에요, 부인.”

“이젠 따박따박 말대꾸도 잘하고.”

“네, 부인.”

“…….”

“스콘은 입맛에 맞으세요?”

“……나쁘진 않네요.”

“다행이네요! 내일은 브라우니를 구워올까 하는데, 초콜릿 좋아하세요?”

“…….”

말을 할수록 말려드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브릿 후작 부인의 미간에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다. 깨끗한 청회색 눈동자에 비친 사람은 살면서 처음 보는 타입이었다. 어쨌든 스테이턴이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던 것일까?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태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첫날에는 나름 상처를 받고 풀이 죽은 것 같았는데 어제에 이어 오늘은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자신을 쳐다보는 맑은 녹색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마치 저를 향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나디아는 오전 10시경에 와서 점심식사 전에 돌아갔다. 정답게 담소나 나눌 관계는 아니었지만 얼굴을 맞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른 티타임 비슷한 걸 가지게 되었는데, 어제는 ‘차를 대접해주시는데 염치없이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다’며 직접 구운 과자를 가져왔다. 어제는 쿠키, 오늘은 스콘이었다.

과자 굽는 솜씨는 뛰어났다. 제과가 그녀의 구르는 재주인 모양이었다.

“대답을 잘하는 것으로 보아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네요.”

“네!”

“칭찬 아니라고 했죠? 이해력에 문제가 없는데 내 거절만 못 알아듣는 이유가 궁금해서 질문한 거예요. 사람이라면 아무리 자존심이 없어도 거절당하는 걸 좋아할 리는 없잖아요. 아, 혹시 싫은 소리 듣는 게 취향이에요?”

나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뇨, 그런 건…….”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 건 안 좋은 습관이에요. 제대로 끝을 맺어야죠.”

“앗, 네. 싫은 소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잘했어요.”

“하지만 부인께 혼나는 건 싫지 않아요.”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괴이쩍은 발언에 브릿 후작 부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나디아가 허둥거리며 부연했다.

“아뇨, 혼나는 게 좋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 취향은 없어요!”

“…….”

“전 그냥 선생님께는 혼나도 좋다는 뜻으로!”

“여전히 이상해요. 그리고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네! 죄송합니다, 부인!”

무슨 말을 해도 웃으며 튕겨내는 데에야 방법이 없었다. 브릿 후작 부인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분명 날카로운 말을 뱉는 쪽은 자신인데, 피로도 저에게만 누적되는 기분이었다. 청회색 눈동자에 어린 피로감을 읽어낸 나디아가 물었다.

“피곤하세요? 차에 벌꿀을 타드릴까요?”

“……됐어요. 그보다 계속 말해보세요. 싫은 소리 듣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계속 찾아오는 건가요. 굳이 제가 아니라도 당신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거예요. 당신 부모님도 계시고, 안나도 있어요.”

“부모님은 절 너무 사랑하세요.”

“……자랑할 타이밍은 아니었는데요.”

“앗!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었겠군요! 자랑은 아니었어요!”

“됐어요. 랭커스터 남작 부부가 막내딸을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어요.”

“……네, 무척 사랑해주시죠…….”

최근 어색해진 아버지와의 관계를 떠올린 나디아의 얼굴이 흐려졌다. 브릿 후작 부인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나디아는 얼른 말을 이었다.

“전 단점이 많거든요. 그래서 자신도 없고, 자꾸 위축돼요….”

“……많아 보여요.”

“…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절, 그러니까….”

예쁘다, 귀엽다고만 해 준다는 말을 어떻게 자랑처럼 들리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까. 나디아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르려고 해도 적당한 단어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브릿 후작 부인이 낮게 한숨을 쉬며 대신 말해주었다.

“무얼 말하려는지는 알겠어요. 부모님은 넘기도록 하고, 안나는요?”

“…안나도요. 너무나 고맙게도 절 좋게 봐 주어서….”

“……그런 것 같더군요.”

“그리고 안나에게 혼나는 건, 너무 무서울 것 같아요….”

재기불능이 될 것만 같다.

“전 만만하다는 뜻인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닌데….”

“그만. 허둥거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요. 오히려 당신 지능만 낮아 보이죠.”

“……죄송합…….”

“그 죄송하다는 말, 제발 그만할 수 없어요?”

나디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우물거리는 입 안으로 소리없는 사과가 사라졌다. 겨우 울지는 않았으나 흐려진 얼굴과 떨리는 입매, 축 늘어진 어깨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브릿 후작 부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겨우 말이 튕겨나가지 않았지만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상처를 입히려 노린 말들은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으면서 고작 ‘사과하지 말라’는 말에 풀이 죽다니, 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솔직히 말해봐요.”

짧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브릿 후작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운 좋게 공작 부인이 되었잖아요. 각하께 이상한 소문이 붙어 있지만 결국 잘 지내는 모양이고요. 누구나 탐낼 자리를 손에 넣은 거죠. 내 입으로 당신이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말했지만 사실 내 말은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

“누가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인가요? 결국 당신이 어떻든 험담하고 싶은 사람은 험담할 테고, 그 사람들에게 이유 몇 가지 더 준다고 해도 달라질 것 없어요. 그들이 당신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당신은 그냥 즐기면 돼요. 누가 당신을 욕하든 결국 당신 앞에서는 말할 수 없을 거고, 혹시 정 거슬린다면 각하에게 말하면 될 걸요. 보아하니 경비견처럼 지켜줄 것 같던데요. 안 그래요?”

“…….”

“사람들 험담에 흔들려 당신을 내칠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잖아요.”

“…네, 알아요….”

“그걸 안다면 더욱 날 찾아와 시간낭비를 할 필요가 없어요.”

“맞아요.”

올 필요가 없다고 설득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단번에 맞다고 말하니 또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전 공작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렇게 부탁을 드리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에요….”

“……말해보세요.”

“전 제가 정말 싫어요.”

브릿 후작 부인은 깜짝 놀랐다. 나디아를 만난 지 고작 나흘이었지만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나디아는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는 물론이고 분명한 사실을 전달할 때조차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며 말이 끝나고 난 뒤에는 꼭 상대방의 눈치를 살폈다. 브릿 후작 부인이 가장 싫어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말을 끝마친 후에도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의외네.’

스스로를 싫어한다는 고백이 가장 확신에 차 있었다. 브릿 후작 부인은 나디아에 대한 평가를 약간 수정했다. 마냥 해맑은 사람은 아니었다, 정도로.

부정적인 평가가 워낙 많아서(수동적이다, 말을 못 한다, 눈치를 많이 본다, 어른스럽지 못하다, 똑부러지지 못하다, 안나가 좋아한다 등등) 티도 나지 않았지만.

“당당하고 쾌활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뭐라든 신경 안 쓰고 살 수 있는 사람, 실수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도 똑바로 하고요. 하지만 그게 늘 안 되니까 실망하고, 또 실망하게 돼요. …이런 저라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너무 고마우니까, 저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들어주고 싶어지고요. 바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금방 절 싫어하고 미워할까 봐 무섭고….”

“아니라는 걸 안다면서요?”

“네,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저를 싫어하는 걸요….”

나디아는 말을 끊고 입술을 깨물었다. 긴장으로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처음으로 털어놓는 속내였다.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속마음을 털어놓는 상대는 고작 나흘 전에 만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낯설기 때문에, 또 자신에게 새삼 실망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 있는 거였다.

“루크는 너무 고맙게도 절 사랑한다고 해 줘요. 사랑한다고, 표현도 자주 해 줘요.”

“…….”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정말로요. 하지만 제가 이런 줄 알면, 실망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건 제가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로군요.”

자기혐오 한 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기혐오에 빠지는 순간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다를 뿐이었다. 루크라면 나디아의 부정적인 면을 받아줄 것 같았지만, 그건 남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루크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루크가 나 때문에 창피를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루크가….”

나디아는 말을 잠시 끊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루크가 저를 사랑해준다는 걸 어떻게 의심할 수 있을까? 루크는 깊은 검은색 눈동자로,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정한 배려와 단단한 몸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나디아도 처음에는 그 사랑이 마냥 기뻤다. 기쁘고 행복하며,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었다. 잘해주고 싶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스테이턴 성에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파고들 틈이 없었다. 익숙해졌다고 해도 스테이턴 성은 낯설었고,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조금 더 힘을 내서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익숙한 도시에 돌아오자 전혀 변하지 못한 스스로가 보였다. 너무 잘 보였다.

난 이렇게 못났는데 루크는 왜 날 사랑하게 된 거지? 나의 어떤 점을 좋아해 주는 거지? 계속 그의 사랑을 받으려면 난 어떤 노력을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나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그가 날 더 사랑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루크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나디아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곤란해하는 얼굴이 좋았다. 자신에게는 무르지만 그는 제국에서도 용맹하기로 유명한 기사단을 호령하고, 단호하고 명쾌하며 시원시원했다.

자신 앞에서만 달콤하게 허물어지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은 설탕 같았다. 나디아는 설탕에 절여진 과일이 된 것 같았다. 흐물흐물 녹아서 뭉그러졌다.

욕심이 날수록 무서웠다. 사랑을 먼저 말한 건 루크였지만, 더 안달을 내는 건 자신이었다. 그의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루크가 실망하지 않게, 절 더 좋아해 줄 수 있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나디아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잡았다.

“저도 절 좋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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