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3전 3패네요.”
“……이겨 본 적도 없다.”
“정정하겠습니다. 전패로군요.”
제이는 냉정히 패배 기록을 바로잡았다. 저 우수에 찬 등은 부인에게 놀아달라 애원하다 버려진 남편의 등이었다. 속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엾게 느껴지고 마는 건 뿌리 깊은 충성심 때문일까. 그는 제 충성심에 감탄했다.
‘게리 노스 같은 놈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지.’
제이드 앨런은 오른팔, 자신은 왼팔이라 주장하며 껄껄 웃던 게리 노스는 지금쯤 주인 없는 성을 지키며 쓸쓸하게 겨울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버려진 기사단장의 쓸쓸한 겨울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부럽다. 지옥 훈련 없이 널널한 겨울 아침이. 성에 남은 이들은 따뜻한 이불 속에서 늦잠을 즐기고 있겠지. 제이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버리고 말을 돌렸다.
“상심하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노력해주고 계시니 오히려 기쁜 일이 아닙니까?”
“뭘 노력해?”
뾰족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던졌던 제이가 찔끔 어깨를 움츠렸다.
“공작 부인으로서의 소양을…….”
“그 말은 나디아가 부족하단 뜻이냐?”
“아뇨, 그럴 리가요.”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왜 부족한지 말해 봐라. 3분 안에.”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나디아는 완벽해.”
“……아무렴요…….”
그러시겠죠. 제이는 영혼 없이 대답했다. 여기서 말대꾸를 하면 답 없는 부인 찬양을 듣게 된다. 하지만 그의 올곧은 본능은 기어코 혓바닥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각하께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분이십니다만, 공작 부인으로서는 아무래도.”
“뭐가. 왜. 어디가.”
“……그걸 꼭 제 입으로 들으셔야만 합니까?”
제이는 스테이턴 가의 기사였다. 그의 충심은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향했지만, 나디아 또한 그가 섬겨야 할 사람이었다. 섬기는 사람의 허물을 지적하는 일이 기꺼울 리는 없고, 설령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허튼소리를 지껄이면 그 입을 찢어버리겠다.”고 흉흉하게 노려보는 사람 앞에서는 어려웠다.
떨떠름해 하면서도 끝내 제 말을 철회하지 않는 제이를 노려보던 루크가 겨우 눈을 떼었다.
“안나는? 나디아를 따라간 건가?”
“후작 부인께서 혼자 오지 않으면 그나마의 출입도 막아 버리겠다고 하셨답니다. 안나는 마차까지만 배웅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호위는 붙여 놨습니다.”
“심술은 여전하시군. 들어줄 마음도 없으실 텐데.”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엔….”
“보기와 달리 게으른 분이다. 성가신 일을 떠맡으실 리가 없지.”
제이는 ‘전패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라 먼스트로드를 드나들면서도 연락 한 번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헌데도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귀찮으니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내 안부 편지는 불쏘시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시더군.”
“…….”
“선대가 살아계실 적에는, 매해 한 계절은 성에서 보내셨다. 그러니 어떤 분이신지는 알아.”
브릿 후작 부인은 비록 혈연은 아니지만 어설픈 방계보다 훨씬 깊은 인연이었다. 그녀는 선대 스테이턴 공작의 남동생과 태중혼약 관계로, 태어나기도 전부터 스테이턴 가의 사람이 될 것이라 내정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매년 여름, 겨울 휴가를 스테이턴 성에서 보내며 약혼자와 함께 지냈다.
대개 명줄이 긴 스테이턴 가라도 재난과 재해를 피해갈 수는 없다. 그 해에 영지를 덮친 전염병으로 약혼자가 목숨을 잃고? 17세가 되는 해까지 스테이턴 가의 사람으로 살아왔던 그녀는 한순간에 남이 되었다.
그러나 결혼이 무산되었다고 해도 약혼 기간이 워낙 길었다. 동생의 약혼녀가 아니라고 해도, 선대에게는 함께 자란 누이나 다름없었다. 선대는 죽는 날까지 그녀를 챙기며 자주 교류를 이어왔다. 루크가 6세에 양친을 여의고 조부가 라 먼스트로드에 도착할 때까지 그를 맡아 돌봐주었던 사람도 브릿 후작 부인이었다.
비록 성격이 맞지 않아서 만나면 으르렁거리기 바쁘지만 루크는 나름대로 브릿 후작 부인을 존중했다. 친척이라 느끼지는 못해도 그가 지켜야 할 스테이턴 중 하나다. 루크는 스테이턴을 사랑하고, 스테이턴의 조각이라면 그 무엇이든 품에 넣어 지켜야만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브릿 후작 부인이 나디아에게 면박을 주었어도 경고로 그쳤던 것이다.
‘모자라다니, 어디가?’
대체 무엇때문에 나디아가 스스로를 ‘모자라다’고 평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그 자체로 완벽했고, 라 먼스트로드의 격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니, 모자라다니…….
누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판단하는가.
단순히 갖추어야 할 몸가짐과 매너 따위로 따져야 한다면 그 누구보다 루크 자신이 자격 미달이었다.
“됐고, 오늘 할 일이나 내놔.”
루크는 성질을 부리며 화제를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황실에서 15통의 편지가 와 있습니다.”
“불쏘시개가 늘었군. 종이는 재가 날리는데.”
“15통 중 12통이 태자 전하이십니다.”
“……나머지 3통은?”
“셀리아 황녀 전하께서.”
“……?”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루크는 괴이한 것이라도 본 양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이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걔가 왜?”
욕을 굳이 증거 남겨가며 편지로 보낼 리는 없을 텐데.
“내용은 모릅니다만, 직접 보시겠습니까? 페이퍼 나이프를 가져올까요?”
“사적으로 온 연락이냐, 공적으로 온 연락이냐.”
“일단은 공식적인 부름은 아닙니다.”
“불쏘시개.”
“예.”
“정 부를 일이 있으면 공식적으로 부르겠지. 부르지 말라고 해도.”
제이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미련없이 편지를 뒤로 넘겼다.
“영지에서 몇 통의 연락이 와 있습니다만 거의 확인 보고뿐이고 긴급한 건은 없었습니다. 이는 차후 정리해 드릴 테니 확인해주시면 됩니다.”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문 밑에 있었던 연락입니다.”
“사오라고 한 건?”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좋아, 그럼 가볼까.”
루크는 목을 좌우로 흔들며 몸을 풀었다. 새벽 훈련으로 몸을 풀었는데도 뚜둑, 뚜둑 살벌한 소리가 났다. 제이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기분으로 루크를 보았다.
“정말 이래야만 합니까?”
“이보다 나은 대안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도 좋다.”
“적어도 애들을 시키든지….”
기사단을 스무 명이나 데리고 와 놓고서는, 왜 굳이 직접 몸을 써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크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놈을 보듯 제이를 쳐다보았다.
“우연을 가장해 자주 만나면 익숙해질 거라는 의견을 낸 게 너였던가?”
“……그렇습니다.”
“그 결과 스토커 취급이나 당하게 되었지.”
“…….”
“선물 싫어하는 사람 없다는 안나의 의견을 따랐다가.”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완벽한 패배가 여기에 또 있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그래도 보름 간의 노력이 아주 소용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거리감은 여전할지라도 같은 지붕 아래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주는 친근감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루크는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아침 식사에는 꼭 참석했다. 나디아가 면도를 해 주고 함께 내려가기 좋은데다, 불편하다고 피한다면 굳이 처가살이를 자처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랭커스터 남작은 불편한 기색을 아주 숨기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퍽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 주었다. 앤더슨, 비비안과도 한두 마디씩 나누게 됐다. 일리야가 가장 어색해했지만, 피오나의 제보에 따르면 낯을 가리는 것뿐이라고 했다.
루크의 목표는 일리야의 남편이었다. 조지 콜드웰처럼 아들 같은, 적어도 편안한 반말을 듣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럼 토 달지 말고 따라와.”
“……각하, 전 정말…….”
“뭐.”
노려보는 눈빛이 살벌하다. 제이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며 중얼거렸다.
“전 정말 애들이 싫은데요….”
*
“피오나…… 이게 다 뭐니?”
“뭐가?”
피오나는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대답만 툭 던졌다. 일리야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른이 말을 걸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얼굴을 보라고.”
“그리고?”
“존대를 써야 합니다.”
“잘 아시는군요. 알면서 왜 자꾸 그러실까.”
소파 뒤로 걸어간 일리야가 피오나가 들여다보고 있는 책을 빼앗았다.
“앗! 이리 줘!”
“또.”
“…주세요….”
“참 잘했어요. 그래서 피오나, 이게 다 뭐니?”
책을 빼앗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성의 없이 대답만 할 테다. 피오나는 일리야에게 빼앗긴 책을 아쉽게 쳐다보다 입술을 비죽거렸다. 일리야는 혀를 찼다. 얘는 누굴 닮아 이렇게 책을 좋아해, 라고 생각했다가 그게 딱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자신은 이 정도는 아니었다.
누굴 닮아 저리 조숙하고, 영악하고, 못됐을까. 벌써 이러면 커서는 어떨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피오나가 잠깐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어느 친절한 어른의 선물.”
“…….”
“빼앗은 거 아니고요, 거짓말도 안 했어요.”
“……네가 어른한테 뭘 빼앗고 다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다만 그 어른이 혹시….”
뻔하겠지. 달리 누가 있겠는가.
일리야는 피오나가 앉은 소파 주변에 엉망진창으로 뜯겨 있는 쿠키 틴케이스와 딸의 머리카락을 장식한 공단 리본,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제가 사준 적 없는 새 원피스를 힘없이 훑었다. 리스트에 몇 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았다. 갚지도 못하고, 돌려주지도 못하는 선물이 쌓여만 갔다.
“응, 저기 있는 사람.”
“……?”
어느새 창가에 달라붙은 피오나가 바깥을 가리켰다. 일리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어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