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15.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이야, 물러터진 치즈처럼 생겨서 질기긴.”
“공작 부인께 물러터진 치즈라니요.”
“안나…….”
브릿 후작 부인이 질색하며 뒤를 돌았다.
“주인 안 따라가고 왜 남았어?”
“제 주인 내외께서는 제가 없다고 길을 잃을 만큼 어리지 않아요.”
하여간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얄밉게 흘겨보면서도 브릿 후작 부인의 기세는 반쯤 누그러졌다.
“다 네 계획이었지? 그래, 스테이턴이 이제 와 파티를 열 필요가 어디 있어. 루크가 결혼했다고 영지를 떠날 리도 없고, 수도에서 자리를 잡을 게 아닌 이상 쓸데없는 일을 벌일 이유가 없지. 다 핑계였어.”
“지금까지보다는 오가는 일이 많긴 할 거예요.”
안나는 깨끗하게 인정했다.
나디아의 친정이 수도에 있으니 예전보다야 오가는 일이 잦겠으나 스테이턴 가문은 굳이 파티를 주최할 필요가 없었다. 황실이 부르는 파티에만 얼굴을 비추어도 충분히 피곤할 것이다. 브릿 후작 부인의 말처럼 모두 핑계요, 변명이었다.
“오랜만에 연락해서는 이런 골칫거리를 안겨 줘?”
“젊었을 때는 참견하길 좋아하셨잖아요?”
“나도 늙어 기운이 없어. 당장 관짝에 누워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됐잖니.”
“정정하신걸요.”
브릿 후작 부인과 안나는 고작해야 다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후작 부인이 관짝에 들어가 눕는다면 안나도 조만간이라는 뜻이다. 브릿 후작 부인이 안나를 흘겨보았다.
“네가 교육시키면 될 일을 왜 내게 가져와?”
“보셨잖아요? 각하의 그 표정, 태도….”
“주인 지키는 개도 그보다는 충성스럽지 못하겠더라. 물리는 줄 알았잖아.”
브릿 후작 부인은 코웃음을 쳤다. 제 부인에게 말 몇 마디 했다고 인상부터 구기는 꼴이 꼴같잖았다. 위협적으로 굴어보아야 기저귀를 갈아주었던 손자에게 겁을 먹을 리 없었다.
“네가 언제부터 걜 신경 썼다고?”
“신경이야 늘 쓰고 있지요. 헌데 저도 부인께는 약해지고 말아서….”
“네가?”
브릿 후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나가 딱 싫어할 타입인데.’
생글생글 웃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웃고만 있으면 누군가 곤란한 일을 모두 해결해주겠거니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타입을 안나는 가장 싫어했다. 브릿 후작 부인은 제가 사람을 바로 보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가 쏘아붙이는 동안 나디아는 웃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루크만 안절부절못하며 성질을 부렸다.
“네가 그런…… 타입을 좋아했던가?”
“늙어서 그런가, 저도 물러터진 치즈가 됐나 봐요.”
“네가?”
세상 사람들이 다 물러 터져도 안나만큼은 그럴 리가 없었다. 브릿 후작 부인은 사교계에서도 엄하고 매섭기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안나에 비한다면 자신이야말로 물러터진 치즈였다. 안나는 대답 대신 싱긋 웃기만 했다. 브릿 후작 부인은 팔짱을 끼며 미간을 좁혔다.
“랭커스터 가의 막내딸이라고 했지.”
“네.”
“소문은 들어본 적 있어, 가족들이 싸고 도는 아주 맹한 애가 하나 있다고….”
“…….”
“그리 보지 마, 난 들은 대로 말하는 거야.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좋겠어?”
“아뇨, 그럴 이유는 없으시죠.”
없다고 하면서 표정은 떨떠름했다. 브릿 후작 부인은 은근히 안나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소문이 다 맞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확했네. 아주…… 순해 보이는 게. 뒤에서 랭커스터 가를 뭐라 부르는 줄 알아? 토끼라고 해. 해는 안 되지만 득도 안 되고, 순하니까.”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얼굴을 한 주제에 ‘민폐끼치게 해 주세요’라고 들러붙을 줄이야. 브릿 후작 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쳐야 할 점이 너무 많아. 자세도, 매너도, 화법도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어.”
“……정 힘드실 것 같다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내가 언제 싫대?”
“…….”
“선대께 진 빚도 있고 네가 부탁까지 했어. 내가 거절할 리가 없잖아.”
기꺼이 고생을 떠맡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쉽게 맡아줄 생각도 없어. 적어도 나흘은 매달려야 할 거야. 그 애가 포기하지 않으면, 받아주지. 물론 그 애 혼자 와야 해.”
“……여전하시네요.”
“사람은 갑자기 달라지면 죽을 때가 다 된 거야.”
심술궂게 입매를 비틀며, 브릿 후작 부인은 손을 내저었다.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순순하게 고생거리를 떠안아 줄 마음은 없었다. 생각보다 질기게 들러붙기는 했지만, 순해 빠진 계집애 하나 기죽이지 못할 만큼 브릿 후작 부인은 만만하지 않았다. 제 편을 들어줄 사람들이 있으니 잠깐 기가 살았던 모양이지만, 혼자서도 버틸까.
거절 한 번에 나가떨어질 게 틀림없었다. 브릿 후작 부인은 확신했다.
이때는 말이다.
*
오늘로 딱 나흘째였다.
브릿 후작 부인은 안나에게 나흘이면 받아주겠다고 말을 해주었지만 나디아는 열흘을 각오하고 있었다. 열흘이 다 무언가, 더는 오지 말라고 못을 박을 때까지는 매달려 볼 참이었다.
‘나 때문에 고생할 이유가 없으신데 부탁드리는 거니까….’
나디아라고 거절이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 싫다는 행동을 해본 적은 난생처음이었고, 저를 매섭게 내치는 사람에게 먼저 접근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결혼 전에는 가족들이나 아주 적은 친구들과만 어울려 다녔고, 결혼 후에는 운 좋게도 그녀를 좋게 봐 주는 사람들뿐이었다.
반면 브릿 후작 부인은 그녀를 좋게 봐 주지도, 처음부터 사랑해 아껴주지도 않았다. 상처가 될 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했다.
브릿 후작 부인은 부탁은 거절하면서도 오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내일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코웃음을 칠지언정, 오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디아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릴 수 있는 근거였다.
나디아는 수많은 기회를 헛되이 흘려보냈다. 과보호하는 가족들 품에서 빠져나올 기회,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귈 기회, 제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잡아볼 기회, 알려주지 않는 것들을 알아낼 기회. 기회는 수없이 많았지만 나디아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브릿 후작 부인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다. 진짜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여기서도 물러난다면 다음이 또 올 것 같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너무나 크게 실망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더 매달리게 되는 것일지 몰랐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거절만 당하는 게 아니라 호되게 혼이 나고 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힘이 나고 마음이 편했다.
“오늘도 가는 거요?”
“어머, 루크. 아침 훈련가신 것 아니었어요?”
“……다녀오는 길이오.”
“아침 식사는요.”
“먹고 왔지. 그보다 나디아.”
“샤워는 했고요?”
“당연하지. 땀 흘린 채로 올 수는 없으니까….”
“착하네요. 머리카락도 다 말렸고요?”
“보다시피 오늘은 완벽하오.”
부부 간의 대화라기보다는 모자 간의 대화였다. 나디아는 손을 뻗어 루크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머리를 쓰다듬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을 다 말렸는지 확인하려는 손길이었다. 루크는 제 말이 계속 잘리는 데도 나디아의 손이 닿기 쉽도록 허리를 숙여 머리를 낮춰 주었다.
머리카락 속은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지만, 머리 모양을 만지면 금세 마를 것이다. 나디아는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면도는 내일 하면 되겠어요. 이틀에 한 번만 해도 될 것 같아.”
“음.”
그건 아쉬운데……. 막상 면도를 하고 보니 수염이 생각보다 빨리 자라지 않았다. 루크는 나디아의 손가락이 훑고 간 턱을 매만졌다. 나디아는 아쉬운 듯한 그를 보다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나디아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허리를 더 낮췄다.
쪽 소리를 내며 보드라운 입술이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런, 늦었네. 저 이만 가볼게요, 루크.”
“잠깐, 나디아!”
시계를 보지도 않고 입으로만 ‘늦었다’고 말하며 나가려는 나디아를 루크가 붙잡았다. 그는 가느다란 손목을 가볍게 그러쥐고는 애절하게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가야만 하오?”
“루크?”
“……안 가면, 안 되겠소?”
“루크….”
누가 보면 어디 멀리 가는 줄 알겠지만, 나디아는 늦은 오후에는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녀는 제 손목을 그러쥔 루크의 손등을 덮어 토닥거렸다.
“라 먼스트로드에 와서 제대로 외출해본 적도 없잖소. 당신 가족들과 함께 외출해도 좋고. 피오나가 연극을 좋아한다더군. 그래서 말인데 오후에 제이가 티켓을?.”
“다녀와서 합류할게요. 피오나랑 많이 친해졌나 봐요. 펠릭스가 아니라….”
“…….”
“앗?”
루크는 말없이 나디아를 끌어당겨 안았다.
가벼운 포옹으로 시작해 입맞춤, 키스로 이어지면 언제 떨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아침에도 배웅하느라 한 시간 넘게 썼던 걸 생각하면 루크의 속셈이 빤했다. 나디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제 입술로 내려오는 루크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아냈다.
“읍.”
“안 돼요, 진짜….”
“으브븝.”
“안 된다니까요…. 그래도 갈 거예요.”
나디아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루크는 나디아의 손바닥에 입을 틀어막힌 채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대놓고 조를 때보다 가만히 바라보는 눈길이 더욱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제는 끌어안기기 전에 도망칠 수 있었는데, 오늘은 루크도 작정한 모양이었다. 나디아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여기서 휘말리면 안 된다.
하지만 막상 가려니 애절한 눈길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그렇다고 입을 맞추면 한 시간 안에 떨어질 자신이 없었다. 루크가 달라붙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떨어질 자신이 없었다. 만지다 보면 시간은 물론이고 무얼 하려고 했는지도 죄 잊게 되고 만다.
섹스를 몰랐기에 망정이지, 일찍 눈 떴으면 어쩔 뻔했나.
‘일상 생활을 못하게 되었을지도 몰라. 풍기문란으로 잡혀가거나…….’
결혼은커녕 집안에서도 내쫓겼을지 몰랐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입술에 키스해서야 루크의 꾀에 넘어가는 꼴이다. 나디아는 그의 입술을 덮은 제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자기 손등에 입을 맞추는 꼴이었지만, 안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디아는 루크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고서 속삭였다.
“다녀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