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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86화 (86/150)

86화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

나디아는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했다. 어제의 일만 보아도 그랬다. 다행히 루크가 이성을 잃지 않아 저녁 식사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식사를 하는 내내 머릿속에는 루크밖에 없었다. 나디아는 스스로가 무서워졌다.

‘난 사실 희대의 탕녀가 아닐까?’

나 자신이 무서워……. 이러다가는 조만간 루크를 덮쳐버릴지도 모른다. 나가지 못하게 가둬버릴지도 몰랐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섹스는 달콤한 설탕처럼 중독적이었다. 머리가 희게 비어가는 황홀감은 헤어나오기 힘든 늪이었다. 루크만 보면 군침이 돌고, 그에게 엉겨붙고 싶고, 끌어안은 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루크는 담백했는데.’

오늘 아침만 해도 그는 깨끗하게 일어나 새벽 훈련을 위해 떠났다. 잠깐의 이별을 위한 모닝 키스가 조금 진득하고 길어지기는 했지만.

‘……담백하지만은…… 않았나?’

제 발로 일어나 침대를 벗어나긴 했지만, 떠날 때까지 시간은 오래 걸렸다. 입술만 몇 번이고 마주치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나디아는 그가 한숨을 쉬며 살짝 찌푸린 미간이 너무나 좋았다. 좋아서 바라보다가 잠깐 넋을 잃기도 여러 번이었다.

“감점.”

“헉!”

“허리가 굽었어요. 어깨도 말렸고요. 표정도 감점.”

“아…. 죄송해요.”

“감점. 사과하지 마세요.”

매서운 지적이 날아왔다. 나디아는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폈다. 그리고 무너지려는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제야 안나의 눈매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조금 더 웃으셔도 좋아요, 부인. 웃는 얼굴이 예쁘니까요.”

웃는 얼굴이 예쁘다고 해 주어도 나디아의 굳은 얼굴은 풀어질 줄 몰랐다. 막상 웃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안나가 말했다.

“웃고 싶지 않으시다면 애써 웃지는 마세요. 어설프게 웃으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표정이 없는 편이 낫습니다. 브릿 후작 부인께서는 귀족이라면 그에 어울리는 품위를 갖추어야 한다고 여기는 분이세요. 제가 아는 분들 중 가장 까다롭고 엄격한 성미를 가지셨지요.”

“……제가 그분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요?”

“글쎄요, 쉬운 일은 아닐 거예요.”

애써 펴고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안나는 나디아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에요. 후작 부인의 기준에 맞추신다면 다른 사람은 흠결을 잡아내지 못할 테니까요.”

“전 자신이 없어요. 예절 선생님께도 언제나 혼나기만 했는 걸요.”

나디아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세가 흐트러지고 울상이 되었다. 무수히 혼이 났지만 결국 고치지 못한 단점이었다. 안나가 말했다.

“부인께서 정 싫으시다면 이대로 영지로 돌아가시면 돼요.”

“…….”

“영지 안에서는 부인을 두고 흠을 지적할 사람은 감히 없을 테니까,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도 살 수 있어요.”

“…….”

“지금이라도 돌아갈까요, 부인? 한 마디만 해주시면 됩니다.”

“……아니요. 해볼게요.”

언제까지나 피하기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루크에게 그 어떤 피해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꼭 이겨내야 할 과정이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자, 준비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안나.”

안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으려다 꾹 참고 턱을 들었다. 당당해 보이려는 몸짓이었지만, 물론 많이 부족했다. 표정은 제법 그럴싸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늘게 떨리는 녹색 눈동자에는 채 지우지 못한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나디아에게는, 그리고 루크에게는 평생 스테이턴 영지에서 틀어박혀 사는 것이 행복일지 몰랐다. 안나는 부부가 그러기로 한다면 그 결정에 토를 달 생각이 없었다. 스테이턴의 주인은 루크이고, 루크가 이제껏 그래왔듯 영지의 운영과 발전에만 집중한다면 그것으로도 좋았다. 실제로도 루크가 작위를 이어받은 후 스테이턴 공작령은 더욱 살기 좋아졌다.

‘시끄럽게 구는 입들이 더 많지만.’

스테이턴은 명예와 역사에 어울리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느니, 시골에 틀어박혀 썩어서는 안 된다느니 떠들어봤자 주인인 루크가 싫다는 데에야 뭘 어쩌겠는가?

하지만 제아무리 루크라도 의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는 좋든 싫든 제국의 가신이며, 제국에 단 넷밖에 없는 공작으로서 황제의 부름에 응해야 했다. 작게는 각종 행사부터 크게는 전쟁까지. 그리고 그 부름에는 나디아도 함께여야 할 때가 많을 것이다. 나디아의 판단처럼 언제까지나 피하기만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이다.

“각하께서는 시간에 맞추어 출발하신다고 해요. 저희도 슬슬 출발하면 될 거예요.”

“아침 훈련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죠? 지쳤을 텐데, 쉴 시간이 없어서 어떡해요. 루크는 수도에 와서도 바쁘네요.”

“힘들기야 하겠지요.”

힘 넘치는 주인에게 맞춰주어야 하는 기사단이요. 안나는 뒷말을 삼켰다.

“마차에서 쉬실 테니 괜찮습니다. 출발할까요.”

“네.”

*

“…….”

“…….”

안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진실 그대로를 말해주었다. 나디아는 “가장 까다롭고 엄격한 성미”라는 안나의 평을 사람의 모습으로 옮겨놓은 것 같은 노부인을 차마 직시하지 못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연한 갈색 눈동자가 피부를 따갑게 찌르는 것만 같았다.

인사는 어찌어찌 말을 더듬거나 혀를 씹지 않고 해냈지만 그나마도 성공적인 것 같진 않았다.

브릿 후작 부인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부인의 전형이었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올려 정리한 머리칼은 희게 새었지만 숱이 많았고, 주름이 잡힌 얼굴에는 우아한 기품이 흘렀다. 당당한 고개는 누구에게도 숙여본 적이 없을 것 같고, 허리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꼿꼿했다.

‘바닥 보지 말고, 정면. 정면….’

그러나 시선은 후작 부인의 눈까지 닿지 못하고 그 근처에서 흩어졌다. 주름이 잡힌 콧잔등이나 우아하게 휜 눈썹, 귀에서 반짝거리는 귀걸이 쪽으로 흘렀다. 나디아의 속이 바싹 타들어갔다.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 훤히 보였다. 미간이 찌푸려지려는 찰나,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 말씀도 안 하실 겁니까, 할머님.”

“……할 말을 잃은 겁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브릿 후작 부인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루크가 잡은 나디아의 손에. 나디아는 손을 비틀어 겨우 빼냈다. 루크가 그녀를 흘긋 보았다.

“다행히 눈치는 있네요.”

“누구에게 눈치를 주시는 겁니까?”

“천둥벌거숭이는 좀 빠지세요. 결혼하여 철이나 좀 들었나 했더니….”

브릿 후작 부인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털만 벗었지, 하나도 자라지 않았네요.”

“그나마 하나라도 벗어 다행 아닙니까?”

“?안나, 나더러 이걸 어떻게 도우라는 거야.”

나디아와 루크의 뒤에 서 있던 안나가 그 자리에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것’이라니요?”

“말 그대로지. 야생에서 뛰어노는 게 어울리는 손자 때문에 내가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알면서, 결혼을 한다는 소식조차 새빨간 남에게 듣게 하는 이 무례한?.”

“부인. 말을 조심해주세요.”

“……후, 그래, 좋아. 손자가 제일 큰 문제지만 하루 이틀 문제였던 건 아니니 그렇다치고, 눈도 못 뜨는 병아리 새끼 같은 걸 데려와서, 나더러 어쩌라고?”

나디아는 눈을 부릅떴다. ‘눈도 못 뜨는 병아리 새끼’가 자신이라는 걸 깨닫고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불행히도 그건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안나마저 나디아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루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사람을 불러다놓고 면박을 주는 형국이 짜증스러웠다.

“말조심해주십시오.”

“……그러죠. 실언이었어요.”

“기꺼이 도와준다고 부르신 거 아니었습니까?”

“내가 기꺼이 돕겠다고 한 사람은 안나였어요.”

브릿 후작 부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루크와 천성적으로 맞질 않았다.

“안나는 도와달라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는 친구이니, 도와달라는 편지를 받았을 때는 기쁘기까지 했죠. ……그 부탁이 당연히 저 짐승 같은 손자와 연관이 있다는 걸 고려했어야 했는데.”

마지막 말은 살벌하고 냉랭했다. 나디아는 어깨를 움츠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루크와 브릿 후작 부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스테이턴의 직계는 루크뿐이고, 아주 먼 방계를 제외하면 친척이 없었다. 안나도 ‘멀지만 인연이 있다’는 정도로만 말했다. 그러나 조금도 닮지 않은 두 사람은 서로를 조손지간처럼 대하고 있었다. 브릿 후작 부인이 영문을 모르는 나디아를 위해 부연해주었다.

“돌아가신 선대의 형제가 내 약혼자였어요. 결혼을 하기도 전에 죽어버렸지만.”

“아, 죄송합….”

“눈만 못 뜨는 게 아니라 말도 못하네.”

“…….”

“이런 걸 어디서 주워서 데려왔는지. 안나, 안나가 말해 봐. 그래도 시간이 있었을 텐데 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거지?”

“할머님. 말조심해달라고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루크의 목소리가 심상치않게 낮아졌다. 브릿 후작 부인이 눈썹을 치켜들고 그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안나를 한 번, 그리고 나디아를 한 번 보았다. 다시 루크에게 눈을 돌린 후작 부인이 말했다.

“저 애가 공작부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해주길 바라나요? 안나도 그걸 아니까 내게 데려온 걸 텐데.”

“더 들을 필요 없소, 나디아. 일어나요.”

루크가 나디아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러나 나디아는 그에게 잡힌 팔을 부드럽게 비틀어 빼냈다. 여기서 물러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디아?”

“제가 부족한 거 저도 알아요, 부인.”

브릿 후작 부인의 평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나디아의 현 위치였다. 그녀가 딱히 냉정한 게 아니었다. 나디아 스스로 생각해봐도 자신은 공작 부인이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변명은 핑계에 불과했다. 무지도 때로는 죄다.

공작령에서는 모두 너무나 다정하고 상냥해 아무도 그녀의 허물을 탓하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안온하고 태평했나. 자신이 없다고 말할 때가 아니었다. 억지로 결혼을 했을 때에는 바란 적도 없는 영광이 기껍지 않았지만 이제는 불평이나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적어도 모자라고 싶진 않았다.

언제나 과보호를 받는 상황이 답답했다. 그러나 언제나 생각만으로 그칠 뿐, 결국 그녀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주어진 상황에만 안주하고,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할 뿐이었다. 불만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지나고 나면 후회하고,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꼴이 가장 답답한 건 자기자신이었다.

달라지고 싶다. 그러려면 붙잡아야만 했다.

“도와주세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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