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드디어 나오기로 한 거니?”
일리야가 책을 덮으며 물었다. 나디아는 머쓱한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틀어박히려고 한 건 아니었어.”
“뭐가 달라. 식사하자 불러도 안 나오고, 네 방 가서 자라는데도 굳이 버티고….”
타박을 듣고 보니 좀 심했다 싶었다. 어머니 얼굴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가는 줄 몰랐기에 틀어박힌 것으로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한테 섭섭하다고 얼굴도 보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았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얼굴도 자주 봤고. 매일 봐놓곤.”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나디아가 눈을 흘겼다.
“난 아는데, 앤더슨은 모를 걸.”
“아.”
“나중에 위로해주렴.”
“알았어. 미안해.”
앤더슨은 이따금 나디아조차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일리야는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이르지만, 티타임을 가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저녁 식사는 같이 할 거고?”
“그러면 어머니가 혼자 드셔야 하잖아.”
“아버지가 같이 드셔주실 거야. 네가 없을 때는 쭉 그러셨어.”
“아….”
“어머니도 우리보다는 아버지가 편하실 거고. 알다시피, 워낙 사이가 좋으시잖아.”
나디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렸을 때는 여느 부모님은 다 그런 줄 알았지만, 커가며 제 부모가 평균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집의 부모님들은 눈만 마주치면 입술을 부딪치지 않고, 어딜 가나 손을 잡고 다니지도 않으며, 말끝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지도 않는다.
너무 당연해서 특별한 줄 몰랐던 광경은 사실 매우 드문 것이었다.
‘아버지는 눈치 채셨을까?’
나디아가 어머니 침실에 붙어서 잤던 이유는 루크를 만지지 않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지만, 식사를 하러 내려가지 않았던 이유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럽기 때문이었다.
앤더슨, 일리야에게는 울며 섭섭함을 토로했지만 아버지에게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명확하게 무엇 때문에 섭섭하다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굳이 말하자면 밀어내고 선을 긋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건 그저 루크와 단둘이 남는 걸 피하기 위한 거였단 걸 나디아도 알고는 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감정이 따라가질 못했다.
“공작 부인에게 부엌 일을 시킬 수야 없잖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안 좋을 거야.”
그 말이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디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워낙 사이가 좋으시지….”
“그래, 사이가 좋으셔. 어머니는 금방 털고 일어나실 테니까 너무 걱정하며 붙어있지 않아도 돼. 나머지는 아버지께 맡겨두자.”
“으응….”
“그보다는….”
일리야는 조심스럽게 나디아의 눈치를 살폈다. 나디아가 시선을 눈치채고 눈을 맞추자, 일리야가 말했다.
“?그 분들을 어떻게 해주면 안 되겠니?”
“루크? 안나? 앨런 경?”
“…셋 다….”
“왜? 혹시 누가 실수라도?.”
“아니, 아니! 실수는 무슨,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그러면….”
“……나디아. 우리 막내….”
일리야는 습관처럼 나디아를 ‘우리 막내’라고 불렀다. 나디아는 귀를 쫑긋 세웠다.
루크가 랭커스터 가에 머물겠다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한 이후 나디아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루크에게 졸라서 돌아가자 해 볼까, 수십 번도 넘게 고민했다.
당장 나디아 자신도 아버지를 볼 자신이 없었고…… 루크와 랭커스터 가족 사이에 흐르는 미묘하고 어색한 기류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이 활달한 성격이라면 나서서 친해질 수 있게 노력이라도 해 보겠지만, 나디아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얼 어떻게 해야 일이 잘 풀릴지 고민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나디아에게 루크가 말했다.
“다 잘될 거요. 오해는 풀 수 있는 거라고 당신이 말해줬잖소.”
“오해는 이미 풀렸잖아요.”
“알아,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모르지.”
“그러니까 그걸….”
“나를 직접 보고 판단해주시길 바라오. 당신의 도움 없이.”
“…….”
“단기간에 가능할 일은 아니겠지. 알고 있소. 기회를 얻은 것으로 지금은 충분해.”
그리고 같은 저택에 머문다고 해도 마주칠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루크와 제이는 날이 밝으면 스테이턴 저택으로 가서 흑곰 기사단을 훈련시켰고, 안나는 그들을 돕거나 저택의 일을 도왔다. 루크의 말처럼 같은 장소를 공유할 ‘기회만’ 얻은 셈이었다.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고 해도 너무 무신경했어.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무엇보다 나디아 자신에게는 나고 자란 고향이지만, 루크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장소가 아닌가. 나디아는 깊이 반성했다.
아침마다 루크가 웃어주었다고 해도, 제이와 안나가 ‘걱정하지 말고 맡겨두시면 된다’고 안심시켰다고 해도.
키스를 더 하고 싶다, 더 만지고 싶다는 생각 따위가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지낼지 걱정했어야 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 말해줘도 돼, 언니.”
“무슨 일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야.”
“괜찮아, 전부 말해도 돼.”
“…득 찼어.”
“뭐?”
나디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일리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조금 더 크게 말했다.
“창고가 가득 찼다구. 식량 창고도 겨울인데 공간이 모자라. 새 옷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30벌이 넘는 드레스를 다 언제 입겠니? 걸치기보다 모셔야 할 것 같은 목걸이며, 반지며……. 돌려주지도 못할 선물이 쌓이고 있어서 목록만 작성하다 하루를 다 보낼 판이야.”
“어….”
“감사하지, 감사하고, 감사한데, 너무 과해.”
일리야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안나라는 분, 그분도 제발 어떻게 좀 해줘. 나보다 훨씬 귀하신 분처럼 보이는데? 생전 그런 극진한 시중은 받아본 적이 없어! 뒤에 서 계시는 게 어색해 죽을 것 같아. 부담스럽고, 사실 내가 저분의 뒤에 서서 시중을 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고….”
“…….”
“비비안도 마찬가지래. 몸 둘 바를 몰라서 결국 같이 서 있었다고 하더라….”
그 심정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공작령에 도착해 한 달 동안 나디아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또 앤더슨이 그러는데, 누가 자길 따라다니는 것 같대.”
“설마….”
“어딜 가도 제이슨 앨런 경과 마주친다고.”
“…….”
“공작 각하나, 앨런 경 둘 중 한 분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고. 아버지는 그나마 일하러 가시니 덜하신 것 같지만…. 처음에는 우연인가 했대. 그런데 아무리 우연이라도 매일 만날 리가 있겠니? 그것도 집 밖에서 말이야.”
말을 하다 보니 멈출 수가 없었는지 일리야는 속사포처럼 털어놓고는 후련한 듯 짧은 숨을 내쉬었다.
“나도 이제 알아, 그 분이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라는 거. 오해를 사기 쉬운 타입이고, 네 결혼에 대한 건 이해가 안 되지만 그래도 사정이 있던 거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정도는 돼.”
“……다행이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가까이 하기 어려운 분이야…….”
“…….”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루크, 제이, 안나는 ‘맡겨두라’고, ‘걱정할 것 없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정확히 정반대로 향하고 있었다.
오해의 골짜기를 건너 어려움의 바다로.
*
“안나.”
“?부인.”
나디아는 조심스럽게 방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안나가 웃으며 말했다.
“당당하게 들어오셔야죠. 부인의 방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보름 만에 낯설어지셨나요?”
부드럽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괜히 찔렸다. 나디아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한 소리 들었어요.”
“어머님께요?”
“네. 제가 불편하게 자는 게 더 신경이 쓰여서 불편하다고….”
“그게 부모 마음이지요. 그래서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인데도 부인을 뵐 수 있게 된 거로군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신경을 못 썼죠.”
결국 웃는 얼굴 앞에 무너진 나디아가 사과하자 안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부인께서 사과할 일이 있었나요?”
“…….”
“전 사과받을 일이 없어요, 부인. 어머니가 편찮으신데 다른 것이 보일 리가요.”
안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과부터 하고 보는 건 비굴한 습관이라고 어머니께 따끔한 소리를 들은 직후인데 또 똑같은 말을 반복해 듣고 있었다. 나디아는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시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안나가 칭찬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주었다.
“마침 잘 되었네요.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있었거든요.”
“예, 말씀하세요.”
“우선 앉으세요, 부인.”
아. 나디아는 문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안나가 빼주는 의자에 앉으며 뺨을 붉혔다. 안나는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금세 마법처럼 향긋한 차가 준비되었다.
“수도에 도착한 날 제가 알던 분께 편지를 드렸어요. 선대 각하와도 인연이 있으신 분이고, 스테이턴 가와 아주 멀지만 인연이 있으십니다.”
“네에….”
“오래 머물면서 어디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쪽에서 파티를 열기엔 여러모로 여건이 따라주지 않고요.”
나디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고 랭커스터의 인맥으로 파티를 열 수도 없었다. 소소한 친목 파티가 될 테니까 말이다.
“오늘 답장을 받았어요. 기꺼이 도움을 주고 싶다, 먼저 각하와 부인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세요.”
“네. 도움을 받는 입장이니 당연히 먼저 인사를 드려야죠.”
“내일 시간 괜찮으실까요?”
“네, 전 괜찮아요. 루크….”
루크만 괜찮다면, 이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나도 괜찮소.”
“루크!”
나디아가 미처 닫지 못한 문이 열리며 루크가 들어왔다. 나디아가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아침마다 만나 인사하고 면도를 해주는 동안 대화도 나누었지만, 그렇다고 반가움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루크가 팔을 벌리자, 나디아가 뛰어들 듯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누가 보면 10년은 헤어졌다 상봉한 줄 알겠지만, 불과 오늘 아침 애틋하게 키스한 사이였다.
안나는 내심 혀를 차고는 말했다. 제이는 현명하게도 아예 방문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럼 그러신 줄 알고, 준비하지요. 제이, 날 좀 도와요.”
“예, 안나.”
안나는 루크를 보지도 않고 방을 나갔다.
앗, 앨런 경도 있었구나. 나디아가 문 밖을 보려 고개를 뺐지만 그녀의 시도는 허무하게 막혔다. 루크가 얼굴을 내려 입술을 붙여왔기 때문이다. 나디아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꺾어 키스를 받았다.
‘이따 저녁? 저녁 식사하러 가야지. 겨울이니까 해가 짧아서 어두울 뿐이고 사실 지금은 아직 5시 좀 넘었고, 그러니까…….’
생각, 무슨 생각을 하려 했더라.
탁.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