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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82화 (82/150)

82화

루크가 피오나에게 간절한 조언을 구하고 있을 무렵 나디아는 어머니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보름간 나디아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리야는 몸이 쇠약해지셨을 뿐으로 병을 얻은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정상일 리 없었다. 오히려 병이 아니기 때문에 달리 손을 쓸 방도가 없는 것이다.

‘다른 의사 선생님을 찾아보는 게 좋을까?’

옛날부터 랭커스터 가의 진료를 맡아준 틸먼 선생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인 이상 완벽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나이가 많았고, 이따금 기본적인 걸 놓치기도 했다. 나디아가 청소년이 되었을 무렵부터는 아이들 진료만 보고 있다고 들었다.

‘앨런 경이 알아봐 주신 분께 연락드려야겠어.’

사람 수배가 전문이 되었다는 제이드 앨런이 이미 실력이 좋은 의사들을 몇 명 알아봐 주었다. 그중 서넛은 나디아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유명한 의사는 예약을 잡기도 힘들뿐더러 몇 달을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연락이라도 닿으면 다행이었고 말이다.

오랫동안 손을 놓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보다는 유명하지 않더라도 빠르게 진료를 봐줄 수 있는 의사가 나을 것 같다고 나디아가 말하자 제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예약이 가능하시다는 분만 수배한 겁니다.”

“……하지만 저희 때문에 미리 예약하신 분들이 손해를 보는 건.”

“아무도 손해보지 않을 겁니다. 의사 분께서 점심을 거르거나 조금 늦게 주무시게 되는 정도죠.”

아무리 바빠도 사람이라면 식사를 하고 수면을 취해야 할 테니까 말이다. 환자를 위해서라면 하지 않을 수고를 기꺼이 하게 만드는 게 권력과 돈이었다. 돈만 보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는 판에 조금 늦게 자는 하루가 뭐 그리 대수일까.

나디아는 일단 보류해달라고 말했었다.

‘명문 대귀족….’

그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결혼 전의 그녀가 더 잘 알았던 것 같다. 공작령에 간 후로는 오히려 실감할 일이 없었던 부분을 수도에 돌아와서야 아주 조금 엿보았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당연하지 않던 일이 당연하고,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졌다. ‘오래 기다려야 하지 않느냐’고 묻던 나디아를 둥그레진 눈으로 보았던 제이드 앨런은 기다린다는 가정은 해보지도 않은 사람 같았다…….

나디아는 가만히 잠든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시간은 잘 흘렀다. 고른 숨소리와 함께 마른 가슴께가 얕게 오르내렸다. 나디아는 손에 쥔 자수틀을 만지작거렸다.

그다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보름이나 붙잡고 있었는데도 자수 형태가 분명하지 않았다.

“나디아.”

작은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다. 나디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 마리아가 어느새 눈을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방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어?”

“…다른 의사 선생님께 진료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요.”

마리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피곤할 뿐이래도. 사람은 끼니를 거르고 잠을 못 자면 다 이 정도는 약해지게 돼 있어.”

“나아지질 않으니 문제잖아요.”

“차츰 나아지겠지. 나이가 들면 회복력이 떨어진단다.”

“어머니가 뭐 얼마나 나이를 드셨다고….”

“벌써 11년 전에 할머니가 된 걸.”

앤더슨의 아들, 펠릭스가 올해 11세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디아는 불만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보기에 제 어머니는 아직 할머니라 불릴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그야 아이들에게는 그렇겠지만요.”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야. 누구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어쨌든 수선떨 거 없단다.”

마리아는 딱 잘라 말했다. 이래서야 의사를 데리고 와도 문제였다.

“이제 걱정거리도 없어졌으니 나을 일만 남았어.”

“어머니….”

“그런 얼굴하지 마, 아가.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잖니.”

나디아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늘진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했다. 마리아가 픽 웃었다.

“언제는 네 말을 안 믿어줬다고 섭섭해하더니…….”

“……그건 별개예요.”

“그래, 그래. 섭섭하다고 네 언니, 오빠 붙잡고 운 것도 별개겠구나?”

“…….”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네 언니, 오빠가 어지간히 유난이어야지. 걱정으로 눈이 뒤집힌 채 몇 달을 보냈는데 괜찮다는 네 말이 곧이곧대로 들릴 리가. 물론 나도 그랬고.”

“……죄송해요.”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래도.”

“……하지만 제가 좀 더 제대로 말했다면…….”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에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

“사과부터 하고 보는 것도 비굴한 습관이고 말이야.”

입을 벙긋거리던 나디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 잘못이 아닌 걸로 사과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지적을 들었는데도 미안한 마음이 들면 저도 모르게 “죄송해요.”부터 나오게 된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사과가 튀어나온 다음이었다.

마리아는 손을 뻗어 딸의 뺨을 쓰다듬었다.

‘지금까지야 괜찮았지만 앞으로 어떨지….’

어리광을 부리며 손바닥에 뺨을 기대어오는 딸은 마리아의 눈에 여전히 어리게만 보였다. 인성은 나무랄 데 없이 착하게 키웠다고 자부하지만, 막내라고 감싸고 돌다보니 가르쳐야 할 부분을 가르치지 못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성교육이었다.

그리고 성교육은…… 어쩌어찌 해결은 된 것 같으니 넘어간다고 쳐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나디아는 너무 기가 약했다. 자꾸 떨어뜨리는 고개와 습관적인 사과는 물어뜯으려 눈에 불을 켠 사람들에게는 딱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다.

불행하게 휘말린 희생양일 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었다. 랭커스터 남작이 재주 좋게 딸을 공작에게 팔았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나디아가 원치 않는 결혼에 희생당했다고 말했다. 그건 야수 공작이라는 스테이턴 공작의 악명 탓이었지만, 덕분에 나디아에게 공작 부인의 자격 운운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까지는.

하지만 스테이턴 공작의 실체와, 나디아가 잘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나디아의 작은 흠결까지 모두 찾아내 그녀가 얼마나 주제넘는 행운을 거머쥐었는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 떠들 것이다. 자기들끼리 있는 자리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더러운 추측까지 더해가면서.

야수 공작이라던 스테이턴 공작이 사실 미남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자기들이 뭘 놓쳤는지, 그래서 그 행운을 감히 남작의 딸이 차지해버렸다는 걸 알게 되면 배가 아파 미치겠지….’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수염 덥수룩한 야수가 그 미남과 동일인물이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냉랭해 보이는 것이 흠이었지만, 나디아를 보는 눈빛은 꿀보다 달콤했다. 보는 사람이 다 부끄러워질 정도로.

마리아가 말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이니?”

“네? 그야 건국기념일까지….”

“아니, 너 말이야. 네 방에서 잠은 자고 있니?”

“…….”

“아니겠지. 내 침실 옆에 달린 하녀 방에서 지내고 있지? 아침에 살짝 다녀오기만 하고.”

매일 루크의 면도를 해주기로 약속했으므로, 나디아는 일어나 씻고 나면 루크에게 갔다. 그러나 아침 외에는 따로 그를 만나러 가지는 않았다. 핑계는 어머니의 간호였지만, 사실 시간을 내려면 얼마든지 낼 수 있었다. 앤더슨과 일리야, 비비안도 있었으니까.

“설마 싸웠니? 부부싸움?”

“……그런 건 아니고요.”

“하긴 싸웠다면 매일 아침 만나러 가지도 않았겠구나. 그러면 왜?”

“…….”

“말하기는 곤란하니?”

우리 막내가 이제는 비밀까지 만들다니…. 마리아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나디아를 보며 새삼 충격을 받았다. 앤더슨과 일리야더러 팔불출이니 유난이니 비난하지만 마리아 역시 막내 나디아를 싸고도는 경향이 심했다.

그럼에도 나디아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해, 루크를 만나면 만지고 싶다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을 것 같아서 만날 수가 없다고 말이다.

“…싸우지는 않았어요. 모처럼 집에 있는 거니까 어머니 옆에 있고 싶어서….”

“봄이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잖아. 내내 불편하게 자려고?”

나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게 자는 거야 괜찮지만, 계속 루크를 만지지 못한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루크도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가 편찮으시고, 곁에 있어주고 싶다는 이유를 이해해주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오래 끌고 갈 이유는 아니었다.

‘그치만 집에서 만졌다가 또 누가 들이닥치면 어떡해….’

피오나에게 들킬 뻔했던 기억이 너무 강렬하게 남았다. 그렇다고 끌어안고 자기만 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이가 각하께 어느 방을 내어드렸니?”

“안나와 제이드 앨런 경에게는 게스트룸을, 루크는….”

“각하께 내어드릴 만한 방은 없을 텐데….”

어느 방이든 루크에 비하면 너무 작았다. 나디아가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방이요.”

“뭐?”

“그게, 어딜 써도 마찬가지일 거면 굳이 방을 따로 쓸 필요도 없고, 안나와 앨런 경도 그게 편할 거고….”

“부부가 같은 방을 쓰는 것뿐이잖아. 변명할 것 없어.”

부부는 서로 끌어안고 자야한다고 가르쳤던 건 마리아 본인이었다. 허둥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그냥 끌어안고만 자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게 확실하다.

‘부인이 결혼 전 쓰던 방에서 부인 없이 보름간 독수공방….’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마리아가 말했다.

“오늘은 네 방으로 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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