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81화 (81/150)

80화

*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왜.”

조심스러웠던 질문에 반해 대답은 공격적이다. 제이는 태자 레너드가 주군의 심기를 제대로 긁었다고 확신했다. 루크의 성질을 일부러 긁어놓고는 이죽거리며 웃었을 레너드의 얼굴도 떠올랐다.

웬일로 남의 일에 나서주기에 사람이 좀 달라졌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신경 쓰지 마십쇼. 그 새끼가 신경 긁는 게 어디 한두 번입니까.”

“불경하긴.”

“전 누구라고 특정하지는….”

“누구라 해도 황궁에 거주하는 사람일 텐데.”

“…그 분이 신경 긁는 게 한두 해 일입니까….”

“뭐.”

어차피 마차 안에는 단 둘뿐이다. 달리 들을 사람도 없는데 좀 불경하다 해서 무엇이 문제겠는가? 제이드 앨런은 스테이턴의 기사이지, 황실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으므로 황태자가 아니라 황제에게 쌍욕을 해도 웃으며 넘겨줄 수 있었다. 불경한 걸로 따지면 루크가 몇 배는 더 불경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냉큼 호칭을 정정하는 꼴이 우습기는 해서, 루크는 굳어있던 얼굴을 겨우 풀었다.

“별 일은 아니었다.”

별 일이 아니면 누구 하나 때려죽이고 싶은 눈으로 노려보지 말아야 했다.

“그렇다면 폐하께 한 소리 들으신 겁니까?”

“영감이야 늘 똑같은 소리나 하지. 언제까지 은둔자처럼 살 셈이냐, 건국기념일 외에도 중요한 행사가 많다, 의무를 다하라. 정작 내가 수도에 눌러 앉기라도 하면 가장 곤란할 양반이.”

“변함이 없으시군요.”

“지겹게도.”

루크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무뚝뚝한 얼굴에 보기 드문 피로감이 드리웠다.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졌다고 해도 정신적인 피로에는 장사가 없다.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제아무리 루크라 해도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이가 말을 돌렸다.

“놀라지는 않으시고요? 많이 놀라셨을 것 같은데.”

“……못 알아보긴 하시더군.”

“역시 그렇겠죠.”

신경을 긁은 건 레너드만이 아니었다. 루크는 황궁을 드나들며 아주 소수의 인물에 한정해 교류했다. 황실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해 온 시종장과 시녀장, 근위대의 몇 명. 그러나 나름 오래 알아왔던 그들 가운데 루크를 단번에 알아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근위대장은 끝까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경계를 풀지 않아 싸움이 붙을 뻔했다.

새삼스럽지는 않다. 사람들이 자신을 피해다니는 일은 루크에게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겁에 질려 얼어붙거나 둘 중 하나였다. 면도를 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가 지나간 후에 따라붙는 진득한 시선이었다.

루크는 레너드의 집무실에서 나오다 마주친 셀리아 황녀를 떠올렸다.

‘우습지도 않아.’

노골적인 호기심으로 번들거리던 얼굴이라니.

셀리아 황녀는 황후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 우아한 몸가짐과 언변까지 젊은 시절의 황후를 빼닮았다. 그리고 레너드처럼, 어린 시절부터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쳐야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레너드와 달리 셀리아는 루크와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특히 루크가 수염을 기르고 난 후에는 말을 섞기는커녕 대놓고 혐오스럽게 쳐다보기 일쑤였다. 루크는 신경쓰지 않았으나, 지나치게 노골적인 태도 탓에 황제와 레너드는 그들이 마주치지 않게 신경을 썼다.

아름다운 황녀에게 수염이 덥수룩한 공작은 혈연이라도 용서할 수 없는 부류였던 것이었다. 그랬던 셀리아조차 루크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황제도 가관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대뜸 정말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본인이 맞느냐고 두세 번씩 물었다. 그때마다 루크는 늙은 황제의 수염을 죄 뽑아주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레너드 새끼, 저는 모친을 닮았다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겠지.”

“황후께서는 미인으로 유명하시죠.”

“껍데기야 닮았을지 모르지만 속은 제 아비랑 판박이인 것을. 특히 사람을 골려먹으려 할 때 짓는 표정이 아주 똑같지.”

“……그, 부친을요…….”

제이는 루크의 최측근이었으므로 현 황제를 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불행하게도 황제는 잘생겼다기보다 못생긴 축에 속하는 외모를 가졌다. 젊었을 적에는 평범하다고 포장해볼 수라도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살이 붙은 몸뚱이와 벗겨진 머리털은 그에게서 그나마의 평범도 빼앗아가고 말았다.

다행히 자식들은 모친의 외형을 물려받았다. 루크는 레너드가 인생을 통틀어 신에게 가장 감사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모친을 닮은 외형을 가지게 해 준 점이라고 확신했다.

“조용히 넘어가기는 글렀어.”

“예상했던 일 아니었습니까. 덕분에 안나가 저리 바쁜 거고요.”

“빌어먹을.”

루크는 벅벅 거칠게 머리를 헝클었다. 이래서 수도에는 오기 싫었다. 건국기념일에만 얼굴을 내밀고 냉큼 사라져버렸을 때에도 그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지 못해 갖은 심술을 부리던 황제였다. 그 성미를 태자가 그대로 빼다 박았다.

“연말이니 연회나 사냥 같은 행사도 많을 테고….”

“…….”

“이제 기혼자이시니, 당연히 부인께서도 동석하셔야겠군요.”

“……제기랄…….”

나디아에게 괜한 고생을 시키기는 죽어도 싫었으나, 이는 수도에 머물자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레너드에게 들었던 감사 운운은 황제의 예고에 비하면 거슬리는 일에도 끼지 못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레너드는 겨우 말뿐인 엄포에 기가 죽을 사람이 아니었고? 애초에 루크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간 거였다. 드물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는데 레너드가 제 발로 걷어차 버린 셈이다.

레너드 덕분에 새벽의 곤란을 면했던 만큼, 루크도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헛소리쯤은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새끼가 이상한 소리를 했는데.”

“뭐라 그럽니까?”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와 친분이 있다고.”

“…….”

“친분은 얼어죽을. 오다가다 몇 번 얼굴이나 익힌 정도겠지. 그조차도 신기하지만.”

레너드는 제게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으면 상대도 하지 않았다. 앤더슨은 레너드에게 딱히 득 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친분이 있을 리가 없다. 코웃음을 치는 루크에게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이가 보기에 레너드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앤더슨은 레너드에게 학대에 대해 말할 정도로는 신뢰를 했고, 레너드도 앤더슨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게다가 남의 일로 절대 손해 안 보는 성미의 레너드가 그 새벽에 달려 나와 괜한 고생을 한 건 앤더슨 때문이었다.

“……어떻게 친해진 거랍니까.”

제이는 루크가 레너드에게 조언을 구했기를 바라며 물었다.

첫사랑에 빠져 조언을 구했을 때처럼 말이다. 루크가 씩 웃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거짓말일 게 뻔한데다.”

“…….”

아닌데요. 제이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조언을 구하지 말아야 할 때는 구하고, 조언을 구해야 할 때는 스스로 거절하다니, 작정하고 엇나가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제이의 답답한 심정을 알 리 없는 루크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나한테는 달리 도와줄 사람이 있어.”

*

루크의 처가살이 선언으로부터 보름.

랭커스터 저택에는 소소한 변화가 몇 가지 생겼다.

루크가 처가살이를 말했을 때는 당연히 저 외의 존재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시종을 데리고 다니지도, 호위가 필요하지도 않았으므로 누군가를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가 처가살이를 부탁했을 때 걱정했던 건 제 식비뿐이었다.

그러나 안나와 제이가 용납할 리 없었다. 20명의 흑곰 기사단은 몰라도 자신들만은 데리고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부인께서 절 필요로 하실 거예요, 각하. 이곳이 어디인지 잊지 마세요.”

“제가 필요하실 걸요. 각하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실 겁니다.”

자신있게 필요성을 어필하는 안나에 비해 제이가 내세울 수 있는 쓸모란 매우 하찮았지만, 제이는 이것이야말로 루크에게 가장 필요할 거라는 걸 알았다. 안나는 객관적인 조언을 해줄 수는 있겠지만 쓸모없는 혼잣말까지 들어주지는 않을 테니까.

루크는 제이의 쓸모를 인정해주지는 않았지만 나디아에게 안나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안나는 나디아의 의복과 생활 관련한 모든 것을 돌봐주고 있었다.

나디아는 시녀와 하녀의 손을 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극진해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던 안나와 시녀들이 부담스러워 위통이 왔다고 했다. 남에게 민폐 끼치기를 싫어하는 그녀라면 그럴 만했다.

그러나 나디아도 곧 공작 부인에게 어울리는 차림새를 갖추려면 안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작의 막내딸일 때와 달리 공작가의 안주인에게는 자리에 어울리는 차림새가 필요했고, 드레스 중에는 혼자서는 입을 수 없는 디자인이 많았다. 드레스에 어울리는 장신구를 골라내는 안목도 필요했다.

루크는 제이와 안나만 데리고 들어왔다. 20명의 흑곰 기사단은 스테이턴 저택에 거주하되 조를 나누어 랭커스터 저택 인근을 경호하기로 했다. 안나가 데리고 온 시녀들도 랭커스터 저택에는 출입하지 않고 외부에서만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등 서포트를 도맡았다.

“이게 문제예요, 아저씨는.”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알려주겠나? 모두 시정하마.”

피오나는 턱을 치켜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황태자보다 더 거만한 태도가 여섯 살짜리 꼬마 숙녀에게 더없이 잘 어울렸다. 피오나는 바닥이 드러난 우유잔을 밀어내며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루크는 꼬마 숙녀의 빈 잔을 채워주며 귀를 쫑긋 세웠다.

“본인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모른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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