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14. 도와주세요, 선생님
“……그래서 번듯한 저택을 내버려두고 랭커스터 저택에 들어앉았다고.”
“번듯하진 않습니다만.”
“스테이턴 저택은 라 먼스트로드에서도 비싸기로 손에 꼽히네. 스테이턴 저택이 번듯하지 않다면 라 먼스트로드에 ‘번듯하다’고 할 수 있는 저택은 없다고 봐야지.”
“아, 그렇습니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낯짝에는 그 저택이 가지는 가치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스테이턴 저택은 그가 가진 수많은 것들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어떻게든 황궁과 가까운 지역에 저택을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난 이들을 떠올려보면 다 가지고도 귀한 줄 모르는 모양이 아니꼽게 보였다.
하긴 아니꼬운 점이 어디 그것 하나뿐이겠는가.
루크는 자신이 가진, 남들은 가지지 못한 것들을 하찮게 여겼다.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난 레너드가 보기에도 루크는 그 정도가 지나쳤다. 레너드 자신조차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데, 저 남자는 빼앗아갈 수 있으면 빼앗아가 보라는 듯 태연하다.
‘정말 다 빼앗겨도 그러려니 살 것 같기도 하고.’
레너드는 심술맞게 입술을 비틀었다. 저러니 자꾸 심술을 부리고 싶지. 다 빼앗아보고 싶기도 하고.
고작 남작 앞에서는 무릎도 잘만 꿇더니, 정작 태자에게는 존경과 감사는커녕 겨우 존대나 써줄 뿐이다. 그나마도 감사하라는 태도라 어쩔 수 없이 짜증스러웠다.
‘차라리 누구에게도 뻣뻣했을 때가 낫지.’
그때는 황제 앞에서도 오만하게 고개를 치들고 있을 놈이라 그러려니 넘길 수나 있었다. 그러나 고작 남작 앞에서 절절 매는 꼴을 본 이상 합당한 예우를 바라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레너드는 이번만큼은 자신이 감사인사를 받을 만한 도움을 주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제 입으로 감사 인사를 하라 요구하기는 민망하고 체면도 서지 않는다. 그는 그린 듯한 미소로 속내를 숨기며 말했다.
“방치해 둘 바에는 팔지 그러나.”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선대께서 당신이 사용하던 물건을 잘 보존하라는 유언을 남기셔서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선대께서?”
“예. 뭐, 영지를 잘 건재하라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만….”
루크는 매끄러운 턱을 쓸며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해보면 그의 조부는 그를 끝까지 못미더워 했다. 인정은커녕 호통을 치지 않으면 다행인 분이었으니,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조부에게 칭찬을 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다정하게 칭찬이나 감사 따위를 주고 받는 조손지간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버려두고 있었다고? 관리도 하지 않고?”
“보존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자네라도 쓸 수 있지 않았나. 일 년에 그래도 한두 번은 오갔는데.”
“번거롭습니다.”
“사람을 쓰면 자네가 번거로울 일은 없을 걸세.”
루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테이턴 저택이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 쓸데없는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너드는 마음만 먹으면 스테이턴 저택보다 더 비싸고 대단한 저택을 여러 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다.
저택이 다 무언가.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른다면 이 제국이 그의 것이 된다.
“……스테이턴 저택 부지가 탐나십니까?”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쓸데없는 주제를 굳이 이어가시기에.”
“…….”
“아닙니까?”
“전혀, 조금도 관심없다네.”
레너드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루크는 그렇다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폐하께도 보고를 올리겠습니다만, 우선 건국기념일까지는 라 먼스트로드에 체류할 예정입니다.”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건국기념일까지는 계절 하나가 통째로 남았다. 자신이 열 번은 불러야 한 번 겨우 왔던 주제에, 부인을 위해서라면 계절 하나를 통째로 머물러 준다고. 레너드의 그린 듯한 미소에 쩍쩍 금이 갔다.
“그걸 보고하러 온 건가?”
“아닙니다.”
루크는 짜증스럽게 말하는 레너드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레너드는 본디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나이가 들고 난 후로는 노련한 척, 능글맞은 척, 세상만사에 통달한 척을 하느라 억지로 대범한 성격을 연기했다.
“지난번 중재에 대해 감사를 드리려고.”
“…….”
아. 레너드의 얼굴을 확인한 루크는 깨달았다. 레너드가 그를 불러들여 바라왔던 게 이 순간이었다는 것을.
“덕분에 무사히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됐네. 우리 사이에 뭘.”
“…….”
우리가 무슨 사이였던가. 루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친구 아니겠나.”
누구 마음대로.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레너드에게는 루크의 대답이나 동의는 필요하지 않았다.
“다행이었지. 랭커스터 남작의 장남과 친분이 있어서 말일세. 자칫 잘못하면 큰 오해를 살 뻔했어. 곤란한 자네를 도울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친분이 있다고요?”
루크가 눈을 부릅떴다.
“남작의 장남과 황태자가?”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시선이 차갑게 식었다. 레너드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인재를 중용하는….”
“랭커스터 씨는 작위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만.”
“아직 가지지 못한 것뿐이지, 그는 내 측근이나 다름없다네.”
레너드는 싱글벙글 웃었다.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미소였다. 앤더슨과는 그날 이후로 감사의 편지를 전달받았을 뿐이지만, 측근이니 뭐니 헛소리는 술술 흘러나왔다. 멍청해 보이지 않았고, 성품도 괜찮은 사람이니 뭣하면 정말 측근으로 삼아버려도 좋았다.
“이미 수없이 많은 술잔을 나누었지….”
앤더슨이 술이 워낙 세서 단 하룻밤에도 동낸 술병을 셀 수가 없었다. 레너드는 환하게 웃었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이토록 부러워하는데, 뭔들 못해줄까.’
히죽거리는 레너드의 표정을 확인한 루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를 부러워하는 제 속내를 들킨 것이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또다시 놀림거리가 되는 건 사양이었다.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를 함락시킨 비법이 궁금하긴 했다. 그러나 루크에게는 힘이 되어 줄 확실한 조력자가 있었다.
두 번 다시 장난질에 놀아날까 보냐.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와 친해질 수 있었던 방법, 궁금하지 않나? 응?”
“됐습니다.”
“재미없군.”
레너드는 팔걸이에 기대어 턱을 괴었다. 푸시시 식어버린 흥미가 보이는 듯했다. 이번에도 자신을 놀려먹을 생각에 들떴던 게 틀림없다. 루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하의 재미를 위해 살고 있는 건 아닙니다만.”
“내 장난이 심하기는 했지. 하지만 솔직히 자네에게는 이득이었잖아.”
“…….”
“결과는 나쁘지 않으니까. 감사 받아 마땅하다고 보는데?”
앤더슨을 만나 랭커스터 가문이 겪었던 마음 고생을 알게 되었으나, 루크에게는 이 결과가 나쁠 것이 없었다. 떠올리자면 비위가 상하기는 하지만 그토록 소중하다는 듯 끌어안았던 부인을 얻게 되지 않았나.
루크에게만은 감사 인사를 몇 번이고 받아야 마땅했다. 그가 죄책감을 느끼게 된 만큼은.
루크는 무표정하게 레너드를 바라봤다. 레너드의 말이 맞다. 그는 레너드의 장난으로 인해 난처한 오해를 받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득뿐이었다. 그러나 결코 감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무지했지만, 레너드는 다 알고 있었다. 알고도 거리낌이 없었다.
“감사를 받고 싶다는 그 말씀이 진심이라면.”
“…….”
“두 번 다시 사적인 부름에 응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단호하게 말을 끝낸 루크는 미련을 두지 않고 자리를 떴다. 레너드는 턱을 괸 채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간 농담이 안 통하는 놈이었다. 얼굴만 번드르르해지면 뭐하나, 속이 똑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차갑게 쳐다보면서도 제가 이득을 보았다는 점은 부정하지 못하는 부분이 또 웃겼다.
‘네 탓에 내 입장이 얼마나 곤란해진 줄 아느냐고 따지지도 않고. 아니, 이제 와 따져봐야 소용없다고 여긴 거겠지.’
저렇게도 대쪽 같은 놈에게 아내 학대가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레너드는 루크가 랭커스터 가의 오해를 모르고 끝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알았다면, 처가살이고 뭐고 평생 스테이턴 령에 틀어박혀 은둔했을 테니까.
‘이제 50통은 보내야 한 통 답장을 받을까, 말까….’
10통이 50통이 되고, 50통이 100통이 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레너드는 루크와 갈등이 있을 때마다 끈질긴 편지로 해결을 보았기에 이번에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루크와 레너드의 인연은 어느 한쪽이 끊고 싶다고 하여서 끊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적인 부름에 답하지 않겠다면 공적으로 부르면 되지.’
좋든 싫든 평생 얼굴을 마주쳐야 했다. 한쪽이 죽기 전까지는.
그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왜 대답을 안 하세요? 노크를 하면 대답을 하셔야죠.”
“노크하면서 문을 여는데 무슨 수로?”
레너드는 흐리게 웃으며 대답했다. 황태자의 거처에 거리낌없이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호위기사가 제지하지 않고 들여보내는 인물은 더 적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인물은 그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다.
“이제는 익숙해지실 때도 됐잖아요? 노크하면서 문을 열면 아, 동생인가보다 하셔야죠.”
“대답을 듣고 문을 열 생각을 할 때도 되지 않았니?”
“싫어요. 기다리기 답답하다고요. 그보다.”
푸른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셀리아가 말했다.
“방금 나간 늠름하고 잘생긴 기사분은 대체 누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