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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79화 (79/150)

78화

‘갈 길이 멀군.’

저택에 들어서며 부풀었던 자신감과 희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루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사소한 손짓, 눈짓 하나에도 놀라 숨을 들이켜는 사람이 적어도 세 명이었다.

수프를 떠 마시기 위해 고개를 내리면 둘러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정수리에 모였다가 고개를 들면 흩어졌다. 빵을 먹기 위해 손을 뻗으면 그곳을 따라 모였다가 그의 입으로 돌아올 때쯤 흩어졌다. 이걸 몇 번쯤 반복하자 평소 식사량의 반의 반도 채우지 않았는데 속이 찼다. 매일 이런 분위기에서 식사를 한다면 그는 한 달도 되지 않아 바싹 마른 체형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무도 그를 구속하지 않았지만 손발이 묶인 기분이었다. 차라리 묶였다면 반항이라도 할 텐데,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버리니 방법이 없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입맛이 없다’는 상태를 이해하게 됐다.

시작은 분명 나쁘지 않았다.

루크는 정식으로 무례를 사과했고, 랭커스터 남작은 커다란 고기가 입 안을 틀어막은 듯 버거운 얼굴이었지만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 또한 오해를 사과했다. 그렇게 마무리가 된 줄 알았다.

‘정상적인 과정이었을 텐데.’

랭커스터 남작이 나디아를 데리고 도망치려 했다는 건 루크도 알았다. 그 사실이 가슴 쓰리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꼬여버린 오해와 딸에 대한 사랑이 빚어낸 해프닝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나디아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미수에 그쳤으니까 말이다.

‘납치… 그렇군.’

루크는 눈을 들어 일리야를 보았다.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문전박대했던 랭커스터 가의 장녀는 그가 식당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지금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눈을 맞추지는 못했다. 어제와는 상당히 다른 태도였다.

피오나의 말이 맞다. 아이는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랭커스터 남작만이 아니라 남작 부인, 일리야, 그녀의 남편까지도 루크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단순히 외모에 겁을 먹었다면 차라리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루크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레너드의 기준으로, 혹은 라 먼스트로드의 상식으로 본다면 어젯밤의 사건은 공작 부인 납치 미수사건이다.

범인은 부인의 친정이고, 루크는 범죄를 빠르게 눈치채고 부인을 지켜낸 훌륭한 남편이 된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사실만 놓고 보면 그렇게 정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대귀족 납치범이 지게 될 죗값은 상상 그 이상으로 무겁다.

일리야는 평생을 라 먼스트로드에서 살았다. 그리고 루크는 해프닝이라 여기는 이 일을 물고 늘어지면 어떤 꼴을 당할 수 있는지 일리야는 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일리야의 현실감각이 정상일 것이다.

“루크, 벌써 배가 찼어요?”

나디아가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식사를 한 것도 아니었다. 고작 빵 몇 조각 주워먹어서 저 덩치를 어떻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루크가 채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염려가 섞인 눈길이 두 쌍 추가됐다. 루크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아니, 그럴 리가. 조금 쉬는 중이었소. 너무 맛있어서.”

“그래요? 다행이네요. 앤더슨 오빠가 요리를 잘해요.”

나디아는 해사하게 웃었다. 루크는 앤더슨을 보았다. 앤더슨은 어설프게나마 웃어 보였다.

잔뜩 위축된 랭커스터 남작 부부와 달리 앤더슨은 침착한 편에 속했다. 친근하게 느껴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주 웃어줄 정도는 됐다. 어쩐지 착해 보인다 했다. 잘생긴데다 성품도 훌륭하고 요리까지 잘한다니. 루크는 앤더슨 같은 인재가 작위조차 가지지 못한 것만 봐도 라 먼스트로드는 글러먹은 도시라고 생각했다.

“…모자라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얼마든지 더 있으니까요.”

앤더슨이 말했다.

“그러죠.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나디아, 너도 많이 먹으렴.”

“그러고 있어.”

나디아는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잘 챙겨먹어서 문제였다. 라 먼스트로드를 떠날 때와 비교해보면 그녀는 확실히 살이 붙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마음 고생을 한 탓에 떠날 즈음 살이 빠지기도 했지만 요즘 특히 잘 챙겨먹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곧 친구들도 봐야 할 텐데….’

친구라도 해 봐야 몇 명 없지만, 나디아는 그들에게 제 살찐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러자면 며칠은 굶어야 할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스테이턴 성에는 안나와 루크가, 집에서는 가족들이 한 끼라도 거르면 그녀가 굶어죽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앤더슨의 시선이 잠시 나디아에게 머물렀다. 나디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이럴 일이 아닌데.’

루크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믿었듯이 가족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 오해와 결정에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깔려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나디아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을 향한 사랑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말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답답했다.

사랑하는 우리 막내, 사랑하는 막내딸.

나디아는 때때로 자신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고 말을 해주지만 그녀도 그래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사실 나디아는 그리 약하지도 않았다. 어설프고 느릴 뿐, 꽤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줄도 알았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막내’일 뿐이다.

과보호가 답답하다가도 결국 가족들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거 봐, 또. 내가 나쁜 사람 같아.’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자신이 가족들을 미워하고 원망하듯 들리게 됐다.

멍청한 나디아, 바보 같은 나디아.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어.

습관 같은 자책이 쏟아졌다. 경직된 식사 분위기도 다 자신의 탓인 것 같다. 나디아는 불편한 안색으로 눈치를 살피는 부모님이 어쩔 수 없이 마음에 걸렸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평소처럼 굴었다면 이보다는 편했을까.

‘루크도 불편한 얼굴이고.’

평소 루크라면 이 식탁에 오른 음식을 혼자 먹어치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루크가 평소 식사하는 양을 아는 만큼 나디아는 움직이지 않는 그의 손이 마음 쓰였다. 잠시 식사를 멈춘 게 아니라는 건 딱 봐도 알았다.

모두가 루크와 나디아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는데, 이 와중에 태연하게 식사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나디아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얼른 식사가 끝나기를 바랐다. 끝나면…….

‘돌아가는 게 되는 건가?’

이 저택에 있는 자신의 방이 아니라 스테이턴 저택으로. 나디아는 그 사실이 못내 이상했다.

“…수도에는 얼마나 머물 생각이십니까?”

앤더슨이 나디아에게서 눈을 떼고 물었다. 루크가 대답했다.

“건국기념일까지는 머물려고 합니다.”

“네? 그렇게나 오래요?”

나디아는 깜짝 놀랐다. 애초에 저 때문에 급히 정해진 일정이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미안하던 차다.

“고작 한 계절일 뿐이오.”

“하지만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됐어요. 그리 오래 영지를 비워두면 안 되잖아요.”

“나 하나 없다고 곤란해질 만큼 무능하지는 않아.”

오히려 일하기 편하다고 좋아하는 관리들이 더 많을 것이다. 내버려 두어도 일을 게을리하거나 딴마음을 먹을 이들도 아니었다. 루크는 제 인생을 쏟아부어 키운 영지를 믿었다.

게다가 영지에 없어도 감시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집사 그랜트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담아 편지 보내기를 즐겼다.

“그래도….”

“당신도 만날 사람이 많을 것 아니오. 영지는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 그리고.”

“……?”

루크가 말을 끊고 랭커스터 남작 부부를 흘긋 보았다.

“수도에 머무는 동안 이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게 어떻겠소?”

“네?!”

“예?!”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랭커스터 부부가 깜짝 놀라며 루크를 보았다. 나디아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저만요?”

가족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채 지우지 못했다. 아버지의 본의 아닐 거절도 정리가 되지 않아 루크의 제안이 마냥 달갑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상상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루크는 나디아의 혼란스러운 눈, 랭커스터 남작 부부의 절망적인 얼굴까지 모두 확인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나디아만 이 저택에 머무르거나, 그의 제안이 실없는 농담이기를. 그러나 루크는 여기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게 마련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그는 랭커스터 남작 부부와 사이가 좋아질 기회가 영영 사라질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토록 불편한 시간을 그 누가 자처해 가지겠는가? 오늘 이곳을 떠나면 그가 발을 들일 기회는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는 한 생가지 않을 것이다.

꼬이고 비틀린 문제는 정면돌파밖에 답이 없었다.

“머물 방이 있겠습니까?”

“네?”

남작은 대답하려다 혀를 깨물었다. 그는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루크가 한 발 빨랐다.

“하인들이 쓰는 방도 괜찮습니다. 누울 곳만 있으면.”

“아뇨! 있습니다! 많습니다! 비록 게스트룸이지만 있긴 합니다!”

“충분합니다. 그럼 허락해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

“네.”

루크는 공손하게 대답하며 씩 웃었다. 무슨 말을 하든 경청하겠다는 표현이었지만, 남작에게는 “감히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라는 소리 없는 말로 들렸다. 남작이 최선을 다해 마지막 발버둥을 쳤다.

“생활하시기에 너무 작고 좁아 불편하실 겁니다. 저희는 가난하고, 각하께서 지내시기에는 아무래도 남루하고, 또….”

“마구간만 내어주셔도 문제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님.”

“히끅!”

아버님이라고. 남작이 숨을 삼켰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위인데, 사위가 맞기는 한데. 왜 이렇게 못 들을 말을 들은 것 같지.

루크는 가슴께를 움켜쥔 남작을 최선을 다해 모르는 척했다. 안 들리고 안 보인다.

아무도 바라지 않은 처가살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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