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모?”
살면서 이보다 빠르게 움직여 본 적이 없었다. 문 너머에서 들린 가느다랗고 높은 목소리가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나디아가 루크를 밀치는 것과, 루크가 제 바지춤을 올리는 건 거의 동시였다.
루크는 터질 듯이 부푼 성기를 억지로 쑤셔넣고, 튕겨 오르려고 하든 말든 허벅지 쪽으로 밀어넣어 숨겼다. 고통보다 당황이 먼저였다. 어쨌든 부러지진 않을 테니 괜찮을 것이다. 나디아는 훤히 드러난 허벅지를 치맛자락으로 감추고 그 아래에서 말려 내려간 속치마와 팬티를 정리했다.
설명은 길었으나 거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동시에 고개를 들어올린 그들이 눈을 맞췄다.
“…누가 왔소.”
“그, 그러네요. 이 목소리는?.”
나디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숨이 차올랐다. 이 꼴을 들켰으면 어쩔 뻔했나. 그녀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꼴을 보았다. 말려내려간 스타킹은 거의 벗겨지기 직전이었고, 팬티는 벗겨진 거나 다름없었던 상태였다.
‘가슴까지 안 벗겨져서 정말 다행……. 이 아니잖아….’
허리를 끌어안았던 루크의 손은 위로 올라와 가슴을 지분거리는 대신 엉덩이로 내려갔다. 만약 그의 손이 위로 올라와 가슴을 움켜쥐었다면 더 정리가 힘들었을 것이다. 앞쪽에는 자잘한 매듭과 단추가 촘촘하게 달려 있었고, 그건 차분한 상태에서도 5분은 넘게 걸렸다.
무엇보다 그가 힘을 주어 가슴을 쥐었다면 옷이 망가지지 않고 버텼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시간이 아무리 있어도 원래대로 돌아오진 못했겠지.
‘내가 지금 뭐하고 있었지.’
편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수다를 떨었던 소파, 자신이 늘 앉던 그 자리에 눕듯이 기대어서, 두 다리를 벌리고.
“…….”
허벅지를 훤히 내어놓고는, 그의 손가락을 맛있게 빨면서……. 그의 숨이 맨살에 닿을 때마다 그 감각에 어쩔 줄 모르고, 더 만져주길 바라면서.
“나디아? 괜찮소?”
“네? 네, 괜찮아요….”
지금까지도 그가 멈추어서 아쉽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나디아의 두 뺨이 타오르듯 붉어졌다. 루크가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의 검은 머리칼 위로 정오의 겨울 햇살이 담뿍 쏟아내리고 있었다. 대낮에, 문 밖에는 가족들이 있는데.
‘미쳤나 봐, 나….’
그때 다시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이모, 안에 있어? 들어가도 돼?”
“어, 어어. 들어 와!”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나디아의 조카이자 일리야의 딸 피오나였다. 아이는 나디아와 똑같은 녹색 눈동자를 영민하게 반짝이며 들어왔다. 나디아는 조카의 맑은 눈빛이 따갑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피오나가 들어선 문은 그들이 앉은 소파의 반대 방향에 있었다. 나디아는 일어서서 상체를 뒤로 돌렸다.
상체는 소파 등받이 위로 나와 있지만, 아직 다 정리되지 못한 하체는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어, 피오나….”
“이모,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으응?”
“어제도 왔었다며! 나만 몰랐잖아!”
“그게, 피오나. 넌 어제 바쁘다고 하던데.”
“그야 바빴지. 난 매일 바빠.”
올해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피오나에게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오만한 표정 하나로 피오나는 나디아가 가장 사랑하는 조카 자리를 차지했다.
‘팬티를 아직 정리 못 했는데.’
초조해서 등이 푹 젖었다. 피오나는 소파 너머에서 돌아오고 있어서 그녀의 어깨 아래를 볼 수 없었지만, 혹시 아이에게 들킬까 봐 신경이 쓰여서 자꾸 손이 미끄러졌다. 그녀는 초조한 눈으로 루크를 흘긋거렸다.
얄밉게도 그는 언제 흐트러져서 헐떡거렸냐는 듯 말끔하게 정리된 모양새였다. 나디아가 그를 흘겨보았다.
“어?”
나디아의 시선을 따라 피오나가 루크를 발견했다.
웬만한 사람은 문을 열자마자 루크부터 보았겠지만, 피오나는 마치 그를 이제야 발견한 듯이 굴었다. 나디아는 피오나의 입매가 심술궂게 비뚤어지는 걸 분명히 보았다. 아이는 처음부터 루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을 한 거였다.
루크와 피오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피오나는 눈을 깜박거리다 이내 해맑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아! 이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
불길했다.
“피오나, 안,”
“이모를 잡아먹으려고 데려간 악당!”
“…….”
“아닌가? 괴물이었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려봤자 하나도 귀엽지 않았다. 나디아는 허벅지 근처를 헤매는 손도 잊고 뻣뻣하게 굳었다. 루크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아이의 말에는 선명한 악의가 있어서 그가 기분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화를 내면 어쩌지.
루크는 무표정한 채로 피오나를 잠시 내려다봤다. 침묵이 길어지자 아이의 얼굴에도 옅은 긴장이 떠올랐다.
“잡아먹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루크가 말했다. 그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
나디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루크는 태연한 안색으로 피오나를 보면서, 그녀의 치맛자락 안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녹색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그의 손이 들어온 방향을 보기에는 피오나가 신경이 쓰였고, 그렇다고 모르는 척 내버려 두자니?.
“으읏?!”
손가락에서 번번이 미끄러지던 팬티가 그의 손에는 단번에 잡혀 제자리를 찾았다. 루크의 손은 속옷을 제자리에 되돌려놓고는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치맛자락을 내리고 정리해주기까지 했다. 이 모든 행동은 그가 피오나를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이에 일어났다.
나디아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루크가 다시 말했다.
“데려간 건 부정할 수 없군.”
“……듣던 거랑 다른데. 이모, 정말 이 사람이 그거야?”
“피오나, 사람을 물건 부르듯 지칭하지 말라고 했지.”
“그렇다고 대놓고 야수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미 말했잖아……. 나디아는 거침없는 조카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아, 이미 말해버렸네.”
피오나는 영리할 뿐만 아니라 뻔뻔하기까지 했다. 일리야는 매일밤 이 귀엽고 건방진 딸이 고귀한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물론 영리한 만큼 제 몫을 잘 챙기는 아이는 혹여 자신에게 해가 될 것 같은 사람에게는 가까이 가지도 않지만, 언제나 세상이 아이에게 유리하기만 한 건 아닐 테니까 말이다.
피오나는 예리하고 감이 좋은 아이였다. 나디아는 조카가 어른들과 달리 루크의 본성을 알아차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겁 하나 먹지 않고 입을 나불거릴 리가 없었다.
“어쨌든 맞아? 아니야? 혹시 야수 공작한테서 도망쳐서 새 남자를 데리고 온 거야? 이모는 어수룩한 줄 알았는데 제법이잖아.”
“아냐! 그런 거 아니야, 피오나! 제발 어른들이 하는 말을 흉내내지 마!”
“흉내 아냐. 엄마도, 아빠도 나한테 이런 재미있는 말은 안 해주는 걸.”
“……그러면 다 알고 하는 소리란 거야……?”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많았다.
일단 옷차림을 바로하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나디아는 약간 곤란한 듯 웃으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조카를 보았다. 피오나가 말했다.
“당연하지. 난 모르는 거 없어. 다 알아.”
“그래, 우리 피오나는 똑똑하지.”
피오나의 기분을 맞춰주려면 성의있는 맞장구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피오나는 영혼 없는 대답에도 그럭저럭 흡족하다는 듯 씩 웃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크를 직시했다.
한편 루크는 피오나가 신기했다.
면도를 한 이후 줄어든 편이기는 하지만, 그의 외모는 대개 호감보다는 공포를 샀다. 랭커스터 남작마저도 그와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지 않았나. 그가 친근하게 웃어 주어도 의도가 먹혀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인도 그러한데 어린아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멀리서 그가 보이면 무섭다고 울음부터 터뜨리는 아이들은 많았다. 바싹 얼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아이들도 있었다. 루크는 아이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전에 아이들이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사실부터 머리에 쑤셔 넣었다.
아이가 울면 시끄럽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다.
그러니까 아이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피오나는 그를 무서워하기는커녕, 도전적인 눈빛을 하고서 그를 관찰하듯 위아래로 훑기까지 했다. 여왕처럼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피오나가 바람 빠지듯 비뚤게 웃었다.
“뭐야, 하나도 안 무섭잖아. 오히려 얼굴만 보면 샌님인데.”
“……피오나, 제발….”
“할아버지가 엄청 무섭다길래 기대했는데!”
그 입 좀 다물어주면 안 될까. 나디아가 이마를 짚었다. 루크는 다른 부분을 지적했다.
“할아버지……. 랭커스터 남작, 아니, 아버님이?”
“…아버님…?!”
소리를 내어 호칭을 정정한 루크도, 그 호칭을 들은 나디아도 뺨이 붉게 타올랐다. 그 멍청한 광경을 피오나는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피오나의 눈빛을 눈치챈 루크가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내가 무섭다고 했나?”
“그럼 안 무서워 하는 걸로 보였어?”
“…….”
“이걸 제대로 봤다면 무서워하진 않았을 텐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고작 6살이 된 아이에게 휘둘리고 있는 공작? 아니면 ‘아버님’이라 제 입으로 말해놓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어느 쪽이든 한심한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루크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지….”
이만한 선물로도 호감은 조금도 사지 못한 것 같았다. 사람을 겁먹게 만들고 마는 것도 여전했다. 그의 중얼거림을 나디아는 흘려 들었지만, 영악한 6살짜리 꼬마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나디아는 루크의 목소리보다 조카의 입가를 스쳐지나간 짓궂은 미소가 더 신경이 쓰였다.
피오나가 짝,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쳤다.
“어쨌든 식사하러 오래요. 할아버지가 부르러 갈 거라며 거울 보고 심호흡하고 있는 걸 확인하고 온 거니까 정말이야. 딱 맞출 수 있을 걸. 불쌍한 할아버지가 말하다 숨 넘어갈 것 같아서 대신 말해주는 거니까 칭찬해도 좋아.”
“착하다, 피오나.”
“더.”
“착하고 똑똑하다….”
나디아는 영혼 없이 맞장구를 치며 루크를 당겼다.
야수 공작과 건방진 6세가 비밀스러운 눈짓을 주고받은 줄은 꿈에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