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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76화 (76/150)

75화

루크는 랭커스터 남작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그는 남작과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걸 의식하고는 보폭을 줄였다. 그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움츠러드는 남작의 어깨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작군. 그리고 왜소해.’

랭커스터 남작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균 신장이었다. 루크 자신에 비하면 웬만한 사람은 다 작겠으나 랭커스터 남작이 유독 작아 보이는 건 그가 한껏 움츠러들어 있기 때문이다. 루크는 도망치듯 더 빠르게 걸어가는 남작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닮기는 했네.’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분위기 같은 게 닮은 것도 같았다. 굳이 말하자면 작은 동물 같은 느낌이. 중년 남성의 뒷모습에서 억지로 부인과의 연관성을 찾아낸 루크는 느긋하게 걸어가며 주변을 관찰했다. 랭커스터 남작의 보폭에 맞추려다 보니 저절로 느긋한 걸음걸이가 되었다.

넓지 않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된 집이었다. 스테이턴 성이 겨울 같다면 랭커스터 저택은 봄 같았다. 곳곳에 손수 만든 장식물이 걸려 있거나 어설픈 솜씨의 그림도 걸려 있었다. 루크의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나디아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어린 나디아도 그가 걷고 있는 이 복도를 뛰어다녔을 것이다.

랭커스터 남작은 루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부인과 아이들이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어머니가 직접요? 밀라 부인은요?”

“…오늘은 쉬는 날이란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랭커스터 저택은 비어 있어야 했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수는 있었지만 오랫동안 저택에서 일해준 식솔들을 하루아침에 해고해버릴 수는 없었기에 남작은 우선 그들에게 며칠간의 휴일을 주었다. 차후 연락해 돈과 소개장을 줄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디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남작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외면하는 아버지가 말해주지 않은 속사정을 대강 짐작한 나디아가 말했다.

“…저도 가볼게요.”

결국 걱정을 이기지 못하고 나디아는 얼굴을 풀었다. 약까지 먹여서 납치하려던 아버지에게 화났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지만, 어차피 그녀는 화를 잘 내지도 못했다. 아까부터 눈치를 살피는 아버지가 신경쓰였다.

“뭐?! 네가?”

“…그야, 그럴 건데….”

“아니, 가지 않아도 된다!”

랭커스터 남작이 펄쩍 뛰어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거절에 나디아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딸이 상처를 받았다는 걸 눈치챈 남작은 땀을 뻘뻘 흘리며 부연했다.

“그게 아니라, 그, 그래. 공작 부인에게 부엌 일을 시킬 수야 없잖니….”

“……전….”

“안다, 알아. 그래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안 좋을 거야. 그, 그래, 내가, 내가 가마. 내가 가서 도울 테니 넌 여기에 있거라. 응?”

“…….”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었다. 이 저택에서 나고 자랐다. 지난 반년을 제외하고 나디아의 삶은 이 저택이 전부였기에 언제나 돌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한 마디는 나디아를 완전히 밀어내는 것 같았다.

“…알았어요. 루크,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

남작과 친분을 더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과욕이었다. 루크가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남작은 냉큼 도망치듯 나갔다. 아버지가 무슨 이유로 나디아의 도움을 거절했는지 알 수 있었다. 루크와 단 둘이 남겨지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나디아도 그것을 알았지만 문을 닫기 전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눈짓하던 아버지를 모르는 척했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밀어내는 걸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게 본심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특히 그녀가 온전히 속해있다고 생각했던 가족들에게서 밀려나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집이 낯설게 느껴졌다.

혼자였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차이였다. 그녀는 결혼했고, 이제 랭커스터가 아니다. 그리고 너무나 슬프게도 그 사실은 나디아 자신보다 가족들이 먼저 깨닫고서 알려주었다.

수습되지 않는 감정 때문에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는 루크가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다는 걸 깨닫고 옆을 보았다.

“미, 미안해요.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미안할 일은 아니잖소.”

“하지만 루크 혼자 심심했을 텐데.”

“……가끔 당신은 날 혼자 두면 안 되는 아이 취급을 하는 것 같아.”

언제부터였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디아는 민망해졌다. 자신이 가끔 지나치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크가 자신의 몸을 잘 챙기지 않고 무모하게 군다는 걸 깨달은 후로는 왠지 불안해서 계속 지켜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크가 훨씬 어른인 건 나도 알아요. ……혹시 기분 나빴어요?”

“아니, 전혀.”

오히려 기분 좋고,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즐기고 있기까지 했다. 루크가 씩 웃었다. 나디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가 웃는 건 자주 보았지만, 이처럼 깨끗하고 시원스레 웃는 건 처음이었다. 잘생긴 얼굴이 드디어 진가를 발휘했다.

‘그러고 보면 아까부터 기분 좋아 보였어.’

나디아가 말했다. 그는 출발할 때만 해도 아버지에게 용서받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몇 번이나 쌍방 잘못이다, 괜찮을 것이다 말해주어도 긴장을 풀지 못했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요?”

“당신 집이잖아.”

기분이 좋아서인지, 편안해져서인지 말투도 바뀌었다. 나디아는 그가 반말하는 건 처음이라 신기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편안하게 풀어진 태도가 보기 좋았다.

“별로 볼 만한 건 없잖아요. 평범하고요.”

루크의 눈에 이곳이 어떻게 비칠까. 나디아는 이 저택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스테이턴 성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지 아는 만큼 자신이 없었다. 스테이턴 성에 비하면 랭커스터 저택은 아주 작고 초라했다. 그가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집일 텐데도 그는 호기심 넘치는 소년처럼 눈을 빛내며 두리번거렸다.

“전혀. 너무 많아 탈이오.”

아, 말투가 돌아왔다. 나디아는 조금 아쉬워졌다.

“어디가요? 그냥 평범하잖아요.”

“당신이 여기서 살았잖아.”

“…….”

“아까 지나온 복도도 당신이 매일 걸었을 테고, 이 소파에도 자주 앉았겠지. 어린 시절부터.”

“…….”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다 보면… 나디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제 주변의 공기만 없애버린 것만 같았다. 무어라 말해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어떤 얼굴로,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 있을까?’

그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이유와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부드러워서, 어쩐지 견딜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고개를 숙이고 붉어진 얼굴을 숨겼다. 그가 아무데도 보지 못하게 다 숨겨버리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그러나 당장 내쫓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디 안 좋소? 얼굴이 너무 빨간데.”

“안 좋은 게 아니고, 더워서, 더워서 그래요.”

“…겨울인데?”

“여, 여긴 집안이잖아요. 아이들이 있어서 집은 늘 따뜻하게 해 놓거든요….”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지금은 제대로 된 변명거리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요? 저 아무래도 어머니가 걱정돼요. 식사 전에 해두고 싶은 말도 있고요. 물론 루크가 괜찮다면요. 정말, 혼자 두기는 미안하지만….”

“알겠소.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걱정하는 건… 아닌데.”

또 어린애 취급을 한 것처럼 들렸을까 봐 나디아는 눈썹을 내리며 목소리를 죽였다. 루크가 허리를 슬쩍 숙여 그녀의 눈 앞에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올려다보아야 했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려 했다. 뒤로 넘어간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긴 루크가 아니었다면 한 걸음 물러났을 것이다.

지금은 어쩐지 루크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숨도 막혔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데, 루크는 야속하게도 짓궂게 웃고 있었다.

이건 반칙이었다. 평소에는 저런 얼굴은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하필 지금.

“아니었소?”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디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어쩐지 등허리부터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루크의 팔을 떼어내려 했다.

“……놀리는 거죠. 다 알거든요.”

“다? 정말?”

“다? 는 아니지만….”

밀어내면 밀려나 주었는데, 루크는 허리에 두른 팔을 풀어주지 않았다. 나디아는 원망스레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루크는 모르는 척 웃을 뿐이다. 그 얼굴이 또 밉지가 않아서 문제였다.

밉지 않고, 좋았다.

나디아는 충동적으로 발돋움을 해 가까이 보이는 입술에 키스했다.

사실 그가 기분 좋은 이유를 들었을 때부터 그에게 키스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루크는 평화롭고 장난스러운 분위기에 맞추듯 고개를 틀어 다시 입술을 붙였다. 쪽, 쪽 소리가 났다. 깊어지지 않는 입맞춤이 두 번, 세 번 이어졌다. 나디아는 입술을 떼어낼 듯 멀어졌다가, 혀를 내밀어 그의 입술을 핥았다.

키스는 순식간에 깊어졌다. 그는 나디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허리를 끌어안았던 손이 점점 내려와 엉덩이 부근을 더듬었다. 둥근 살을 지나 허벅지와 이어지는 부분, 그리고 그 사잇골을 문질렀다.

“으응….”

목 안쪽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가락은 정작 음부에는 스치지도 않았는데 몸 안쪽이 바르르 떨렸다. 긴 물통 같은 것이 배를 꾹 눌렀다. 길고 뜨거운 게 무엇인지 안다. 나디아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가늘게 눈을 뜨자 키스에 완전히 몰입한 루크가 보였다.

루크가 더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다. 그가 더 빠져서, 더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들고 싶었다. 자신처럼, 그가 키스하고 만질 때에는 머릿속이 희게 비어버리는 그녀 자신처럼….

‘똑같이 해주면 될까.’

입술을 삼킬 듯이 달려드는 그에게 맞추어 키스를 돌려주며, 나디아는 손을 내밀어 그의 배에 얹었다. 딱딱하고 각이 져 있었다. 말랑한 자신의 배와는 완전히 다르다. 매끄러운 옷감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옷감 너머 뜨거운 체온만 알 수 있었다.

나디아는 그대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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