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랭커스터 저택은 침통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넓지 않은 응접실에는 온 가족이 모여 있었다. 일리야가 결혼하여 저택을 나간 후에도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이 많았지만, 이토록 가라앉아 조용한 적은 없었다. 일리야는 침묵이 제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보지도 못하는 눈은 뭐하러 달고 다니니.’
일리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도 자신을 탓하지 않아 더욱 가시방석이었다.
아팠던 어머니는 착각을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일리야는 자신이 평소 비교적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만큼이나 이 실수가 끔찍했다. 단순히 웃어넘길 수 있는 실수도 아니었다. 온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구렁텅이에 쳐넣을 뻔했다.
어떻게 키스마크를 보고서 상처자국이라고 착각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도 하지 않을 착각이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 내린 지금에야 자신이 얼마나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였는지 깨달았지만 이미 뒤늦은 후회였다.
게다가 어이없는 착각으로 인한 도주를 스테이턴 공작 본인에게 들켜 버리다니.
비비안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일리야를 보고는 남편의 팔을 두드렸다. 부인의 부름에야 앤더슨은 입술을 너무 깨물어 피가 날 지경인 일리야를 발견했다. 그가 말했다.
“그리 자책할 것 없어, 일리야. 네 탓이 아니래도.”
벌써 몇 번이나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착각하지 않았다면….”
“확인해보지 않은 내 잘못이기도 해.”
“그걸 오빠가 어떻게 확인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이건 다 내 잘못이야.”
단호한 말과 달리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묻어 있었다.
“어떻게 하지, 오빠. 그 남자가 우리가 자길 모욕했다 여기면 어떻게 해?”
“……그러진 않을 거야.”
“어떻게 알아, 그걸. 높으신 분들은 못할 게 없어. 알잖아.”
일리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먹거렸다.
랭커스터 가문도 일단 귀족 사회에 속하기는 했다. 그러나 고작 남작 가문의 장녀? 작위를 잇지도 못한 자작 가문의 차남과 결혼한 그녀에게 ‘고귀한 분’들이 긋는 선은 뚜렷했다. 자애롭게 웃으며 어울리되 끊임없이 주제파악을 요구했다.
너희와 우린 다르다. 타고난 핏줄의 격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같은 사회에 속해 있지만 세계가 다르다.
그들이 요구한 주제파악을 제법 잘한 덕분일까. 일리야는 그들에게 제법 인기가 좋았다. 데리고 다니기에 평판이 나쁘지 않고 태도가 순순하며 말이 적어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들러리 삼아 부리기 쉬운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몇몇 분들 덕분에 일리야는 그들이 자존심이나 명예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게 됐다.
라 먼스트로드에서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선은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치맛자락에 물을 쏟은 평민 아이의 뺨을 자애롭게 어루만져 달래던 귀부인이 우아하게 웃으며 매질을 명령했다. 네 시간 넘게 매질을 당한 아이는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예쁘장한 하녀를 건드려 데리고 놀다 성가셔지면 몰래 죽여버리는 신사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 같은 진실들이 소문이 되어 떠돌아다녔다. 그들은 아랫것들을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 여기질 않았다.
그리고 겨우 귀족 사회 끄트머리에 발을 걸친 랭커스터는 언제든 떨어져 미끄러질 수 있다.
사람 이하로.
“…앤더슨 말이 맞다.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어.”
“아버지….”
일리야가 고개를 들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랭커스터 남작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저택에 돌아와 내내 침묵을 지켰다. 앤더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꼭 닮은 미간을 똑같은 모양으로 찌푸렸다. 못내 복잡한 심정이 보였다. 일리야는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렸지만, 남작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그가 말했다.
“……우선 기다려보자꾸나.”
“…그럴 수밖에 없겠죠.”
앤더슨이 남작의 말을 받아 마무리를 지었다.
랭커스터 남작은 매우 복잡한 심경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부인과 딸은 의아하게 여겼으나 그는 무어라 설명해 줄 말이 없었다. 제국에 단 넷밖에 없는 공작이 한낱 남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말을 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말한다고 해도 믿기나 할지 모르겠다.
무릎 꿇은 거대한 남자의 등 뒤에서 경악하며 쳐다보던 황태자와 공작의 측근이 떠올랐다. 그 당황스러운 얼굴, 방황하는 눈동자….
신분을 떠나 저 남자가 사람 앞에 무릎 꿇어본 일이 없다는 반증이었다.
‘장인어른이라니.’
내가 무려 대귀족의, 공작의 장인어른이라고…?
나디아를 결혼시킨 후에도 자신이 공작의 장인이 된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장인어른은 무슨, 안중에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남작은 몰래 일리야의 남편 조지를 흘긋 보았다. 그의 첫째 사위 조지는 커다랗고 순한 개를 연상시키는 남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봐 와서 익숙하고 편안한 이목구비가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공작은….
‘윽, 위가….’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위가 따끔따끔 아팠다.
*
새벽에 있었던 웃지 못할 사건을 보고받은 안나는 마치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이 제이에게 있는 것처럼 불같이 화를 냈다. 제이로서는 억울한 노릇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말리려고 했다. 그의 조언을 맛있게 씹어먹은 것은 그의 주인이지, 그가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게 아예 없으신데 대체 누가 말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루크의 이성을 빼앗아버리는 사람도 그 사람이었으므로 별반 소용은 없었다. 그나마 시녀장 안나와 집사 그렌트의 조언을 귀담아 듣는 편이었는데, 안나는 새벽에 일어난 눈 먼 처가 사냥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냈다.
“부인의 가족이시니 부인 같은 분들이실텐데….”
“……그랬지.”
루크는 랭커스터 남작의 얼굴을 상기했다. 겁에 질린 티가 역력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이기 때문인지 딸꾹질을 하거나 기절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 걸 보면 나디아의 부친이 맞다.
“뭘 해야 마음을 푸실까요.”
“…선물?”
“…생각나는 게 그거밖에 없으신 거죠.”
그럼 달리 뭐가 있단 말인가. 루크는 초면에 빈손으로 타인의 환심을 사는 방법 같은 건 몰랐다.
차라리 바라는 바가 명확한 인간의 환심을 사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하다. 바라는 걸 쥐여주면 된다. 그러나 겁이 많아 갑작스러운 행운은 오히려 저어하는 사람들의 환심은 어떻게 사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일단 사람이니 선물을 싫어하시진 않겠죠.”
아닌 척 시침을 떼고 있지만 안나 역시 스테이턴 쪽의 사람이었다. 루크나 제이보다 나이가 많아 우아하게 감추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과격하고 대담한 성격이다. 섬세한 사람의 심리는 경험과 짐작으로 대충 때려맞추어야 했다.
나디아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가족은 모두 9명이나 됐다. 안나와 루크는 선물의 양이 모자라다 입을 모았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선물을 긁어모았다. 제이는 작게 “부담스러워 하시지는 않을까요?”라고 주장해봤지만 그럼 다른 방법을 내놓으라는 말에 입을 닫았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문전박대를 당했던 어제와 달리 랭커스터 가는 대문을 활짝 열고 스테이턴 가의 마차를 맞이했다. 스테이턴 공작 부부와 안나가 탄 마차가 한 대, 보여주지도 못하고 쓸쓸하게 가지고 돌아갔던 선물 마차가 한 대, 그리고 안나가 준비한 선물이 또 한 대….
세 대의 마차는 무장한 흑곰 기사단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호위했다.
랭커스터 남작을 비롯해 남작 부인, 딸, 아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입을 떡 벌리고 마차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작은 거의 숨이 넘어갈 듯 창백한 안색이었다. 제이는 남작을 동정했다. 심약한 새 가슴에는 지나치게 과격한 상황이었다.
“이, 이것들은 다 뭡니까.”
“약소한 선물입니다.”
“약소….”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에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약소의 기준이 세상과 많이 다르지 않나. 입을 떡 벌린 랭커스터 남작이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고 제 딸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나디아는 아버지의 애타는 시선을 냉랭하게 외면해버렸다. 랭커스터 남작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사랑하는 막내딸의 외면은 이 와중에도 가슴 아팠다. 하지만 잘못한 게 있으니 더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가 우울하게 말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말씀 편히 해주십시오.”
루크는 씩 웃었다. ‘친절하고 자연스럽게’.
수차례 거울을 보며 연습한 결과였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싸늘한 얼굴에 떠오른 상큼한 미소는 더할 나위 없는 부조화의 극치였다. 랭커스터 남작은 울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얼굴도 무서운데 하는 말은 더 무서웠다.
“아닙, 아닙니다. 어떻게 감히 각하께….”
“집안의 어른이시니 개인적으로는 제가 아랫사람이 됩니다만.”
“허억….”
“그러니 말씀 편히 해주십시오. 막 대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그 편이….”
“허어억….”
“…좋지만,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더 밀어붙였다가는 딸꾹질을 건너뛰고 바로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에 루크는 적당히 물러섰다.
‘말은 나오는군.’
레너드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유창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랭커스터 남작이 남성이기 때문일까. 나디아의 자매를 상대로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던 어제와는 달랐다.
시작은 만족스러웠다.
랭커스터 사람들은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차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랭커스터 남작은 그의 미소에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었다.
무엇이든 경험이 중요한 법이었다. 실수를 딛고 발전하는 것이 인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