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나디아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 루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입 다물고 있으면 냉랭해 보이는 이목구비인데도 눈을 동그랗게 뜨니 귀여워 보인다는 게 신기했다. 나디아가 평소 루크가 귀엽다고 느꼈던 포인트와는 조금 다르지만, 어른스러운 외양을 가지고도 귀여워 보일 수 있다는 건 나름 신선한 발견이다.
루크는 당황한 기색을 뒤늦게 감추고 물었다.
“그런 것이 궁금하오?”
“궁금해요.”
루크는 나디아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나디아도 스스로가 이상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이상했다.
기억은 뜨문뜨문 끊겨 있었다. 잠든 몸은 외부 충격에도 깨어나지 못했지만 얕은 의식 속을 헤매며 들었던 소리는 선명했다. 아버지와 앤더슨의 대화, 차가운 밤공기와 말 울음소리, 말발굽 소리와 수런거리는 속삭임….
이 모든 기억이 현실이라면 아버지와 앤더슨은 자신을 어디론가 옮기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나디아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아무것도 들은 적이 없었으므로 그녀 몰래 계획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어째서 그토록 깊이 잠들었는지도 이해가 됐다.
‘어쩐지, 포도주는 즐기지도 않는 분이 햇포도 운운하시더라니….’
아버지는 포도주를 그리 즐기지 않는 분이었고, 포도주를 내어준 사람은 일리야였다. 일리야는 샐러드 접시를 그녀 앞으로 밀어주며 자연스럽게 잔을 건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단 한 번도 잔을 입에 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일리야는 단 한 번도 나디아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아직 술을 마시기에는 이르다는 이유였다.
‘뭐든 다 이르지.’
나디아에게는 늘 이른 것들투성이였다. 술도 이르고, 과감한 디자인의 드레스도 일렀고, 어른스러운 헤어스타일도 일렀으며, 어느 신사와의 데이트도 일렀다. 랭커스터 일가가 보기에는 언제나 일렀을 것이다. 나디아는 가족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과보호 속에서 평생 살아 익숙했으나 그렇다고 달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디아는 그녀 또래의 친구들이 당연한 수순처럼 밟는 경험을 단 하나도 하지 못했다. 사실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도 몇 없어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늘 제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 궁금했다.
아버지와 앤더슨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었나. 어째서 몰래 움직였나.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답은 아주 쉽게 나왔다.
도망칠 생각이었을 테다.
나디아는 어째서 저녁식사 자리에 조카들이 오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멀리 떠날 준비를 해야 했으므로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즐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연신 눈물을 짓던 어머니와 일리야, 우울해 보이던 앤더슨까지…. 보이지 않았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괜찮다는 말은 하나도 전달되지 않았다. 들어주지 않았다.
랭커스터와 자신이 왜 그 숲에 있었는지는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루크가 어떻게 ‘마침’, ‘그때’, ‘그곳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쫓아올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그게 가장 궁금했다. 루크가 있었을 스테이턴 저택과 랭커스터 저택은 꽤 멀어서 마차를 이용해도 30분이 걸렸다. 옆집 염탐하듯 들여다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루크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방패를 들고 눈앞의 적을 경계하다 느닷없이 옆구리를 찔린 기분이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 그건.”
“날 지켜봤어요?”
“…….”
“……감시했군요. 내가 못미더워서.”
뚝 떨어진 목소리가 무거웠다. 나디아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담담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제이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러니까 만약 이러고 계시는 걸 부인께서 알게 되기라도 하면?. 루크는 아무도 섣불리 입을 놀리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거라 자신있게 말했지만,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제 입으로 실토하게 될 줄은 몰랐다.
수많은 변명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루크가 꺼낸 말은 짧고 형편없는 한 마디였다.
거짓말에도, 솜씨 좋게 제 입장과 처지를 포장하는 변명에도 서투르니 진심을 고백할 수밖에.
“……걱정이 돼서.”
루크는 커다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도저히 나디아를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뺨과 귀가 불타는 듯 뜨거워졌다. 손등 위로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디아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당신이 안전한지, 그것만 확인하고 돌아가려고 했소.”
“…….”
“…그런데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
“?보고 싶어서.”
“…….”
“돌아갈 수가 없었소.”
안전을 확인할 목적으로 간 것이었고, 나디아를 두고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다. 보고 싶었던 것도 맞다. 다만 처음부터 밤을 샐 요량이었다.
‘제기랄, 질렸겠지.’
자신이 한 짓은 스토킹이나 다름이 없었다. 몰래 쫓아다니며 지켜보는 짓이 스토킹이 아니고서 무엇이란 말인가? 제아무리 걱정이니 뭐니 변명을 갖다 붙여도 당사자 입장에서는 소름끼치도록 싫을 게 분명했다.
누군가 자신을 몰래 따라다닌다면 루크는 그 징그러운 놈을 죽여달라고 빌 때까지 두들겨 패고, 무엇을 보았는지 낱낱이 고하게 한 뒤, 배후를 알아내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죽여줄 것이었다.
따라다니는 사람이 나디아일 경우를 제외하고. 그때는 찢어지는 입을 숨기지 못해 다 들키겠지….
나디아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가린 루크의 손을 잡아내렸다.
“잠깐, 나디아….”
“저 좀 봐요, 루크.”
“윽.”
힘으로 잡아당긴다고 해도 꼼짝하지 않았을 텐데 커다란 손바닥은 아주 가볍게 나디아의 뜻대로 움직였다.
손바닥 아래 가려져 있던 얼굴은 참담하고 비참한 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디아는 그 얼굴을 잠시간 쳐다보았다. 루크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으나 나디아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커다랗고 강한 사람이 자신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신기했다. 그에게 손해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 다쳤을까, 미움을 받을까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좋았다.
참 이상한 경험이었다. 나디아는 대개 상대방이 미안해하면 자신이 더 미안해지는 타입이었다. 상대가 잘못하여 피해를 보았다고 하여도 사과를 받는 것이 때로는 불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쩔쩔매는 모습은 퍽 마음에 들었다. 안쓰러운데, 웃음이 나왔다.
“저 좀 보라니까요.”
“…….”
시선이 마주쳤다. 나디아는 배시시 웃었다.
“화난 것 아니었소?”
“네. 화났어요.”
“……아닌 것 같은데.”
“아녜요. 화났어요.”
그러나 목소리에는 웃음이 배어 있었다. 루크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나디아는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안았다. 단단한 가슴에 뺨을 기대었다.
“헤헤.”
“……아버님께 무례를 저지른 데에 대해서는.”
“루크도 참.”
루크는 제게 매달리듯 안긴 나디아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둥근 어깨가 그의 손바닥에 쏙 들어왔다. 나디아는 고개를 들었다. 루크는 아직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처음부터 루크가 아버지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쳤을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어요. 그런 오해는 안 해요.”
그래도 조금은 그를 알게 되었다. 나디아는 제가 알게 된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믿었다.
“분명 사정이 있었겠죠.”
“……실수, 였소. 난, 당신이 납치당하는 줄만 알고.”
“그래요, 그랬겠죠.”
“…….”
“알아요. 그 정도는.”
싱긋 웃는 얼굴이 밝고 맑다. 그녀는 가볍게 무거운 신뢰를 전했다.
루크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입안이 타는 듯한 갈증과 어디에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동시에 밀려왔다. 물처럼 밀려 들어온 감정이 혈관을 타고 퍼져 나갔다.
나디아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 끌어안아 키스하고, 세상에 나디아를 사랑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 감정을 어떻게 진정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히 진정시키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진정시키지 못해도 괜찮았다.
‘대체 몇 번이나 반하게 할 셈이지.’
본인은 의식하지도 않은 결과라 원망조차 할 수가 없었다. 손쉽게 녹아내리고만 루크 혼자 삭여야 하는 원망이었다.
제이는 루크가 나디아의 어떤 부분에 반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소리내어 묻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그와 나디아를 번갈아 쳐다보는 눈길에는 솔직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루크는 측근의 의문에 굳이 대답을 해줄 마음은 없었다. 나디아의 매력은 그만 알면 충분했다.
루크로서는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는지가 오히려 의아했다.(하지만 반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지, 햇살 같은 이 사람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는지.(하지만 반한다면 죽여버릴 것이다.)
무디어진 상처를 염려하고 걱정하며, 대신 울어주고 당연한 듯 신뢰를 건네는 다정함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는지를.(하지만 중독된다면 정말 중독시켜버릴 것이다.)
첫눈에 반했을 때는 차라리 가벼웠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고, 감정은 감정을 불렀다. 이제는 사랑스럽지 않은 부분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스스로가 상당히 중증이며, 이미 정상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루크는 나디아를 힘껏 끌어안는 대신 제게 안긴 나디아의 어깨 위를 조심스럽게 토닥거리기만 했다. 두드리는 손바닥은 가벼웠으나 이어진 팔뚝에는 한계까지 힘이 들어가 단단했다. 제 충동을 눌러참기 위함이었다.
끌어안았다가는 당장 침대에 쓰러뜨려 얇은 잠옷을 벗기고서 온몸 구석구석에 입 맞추고 싶어질 것이다. 입만 맞추고 끝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건 더 자신이 없었다. 여기서 참지 못하면 하룻밤의 인내도 헛수고다. 랭커스터 가에 방문해야 하니까, 나디아의 부모님을 뵈어야 하니까….
‘인간, 인간이다… 나는, 인간….’
루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겁에 질린 랭커스터 남작의 얼굴을 되새겼다. 번뇌가 잠시나마 사라졌다.
그런 그를 나디아가 의아하게 올려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