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허리를 끌어안은 게 아니라 팔을 걸친 것에 가까웠다. 몸을 뒤척거리며 곁의 온기를 찾아 달라붙은 거였다. 나디아는 딱히 그를 유혹하려는 의도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없겠지. 그녀는 잠결이고? 잠들어있을 뿐이니 의도 따위가 있을 리가? 없고?…….
없다. 없는데, 루크는 힘없는 팔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떨어질 게 분명한 팔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찰나간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저지른 짓, 랭커스터 남작이 그를 쳐다보던 당황스러운 눈길,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의 수척한 얼굴, 비난이 담긴 레너드의 눈빛….
‘정신 차려라,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
허리 아래 달린 그것에 인간의 양심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건 익히 알았다. 눈치를 발휘해야 할 순간에도 기어코 죽지 않았던 게 이것이었다. 그의 단단한 턱 근육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나디아가 의도하지 않은 시험에 스스로 자주 걸려들었다.
말을 걸면 나디아가 깰까.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깨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나디아는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깊이 잤지만, 오늘은 유독 깨지 못했다. 그녀를 안아들고 스테이턴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도록 루크는 그녀가 깨기를 바랐으나 고른 숨소리는 흐트러지는 법도 없었다. 아침에 가까운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디아는 여전히 색색,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숨, 그러니까 호흡….
‘제기랄….’
사람의 숨 내음이 어떻게 달콤할 수 있는 걸까? 루크는 허리에 걸쳐진 나디아의 팔에 손도 대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말랑거리는 팔, 흰 살결에서 풍기는 체향 탓에 눈앞이 어찔거렸다. 살짝 붉은 뺨에 이를 박아넣고 아프지 않게 잘근거리다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물고 세게 빨면, 축축한 혀를 삼키고 입천장을 비비면…. 나디아는 기분 좋아 울며 힘껏 매달려오겠지.
상상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질수록 아랫도리가 꼿꼿해졌다. 자칫하면 허리를 감은 나디아의 손에 닿을 것이다. 바지 앞섶을 살짝 풀기만 해도, 부드러운 손이 그곳에 미끄러져 들어가기는 쉬울 테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부드러운 손등과 살짝 촉촉한 손바닥에 페니스를 문지르고, 그녀가 그것을 잡아 길게 훑는 상상은 쉽고 강렬하게 뇌리를 스쳤다. 잠에 빠져 의식 없는 나디아의 손바닥에 파정하는 상상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손바닥과 이어지는 손목, 살짝 튀어나온 얇은 뼈를 타고 정액이 흘러내리는 모습까지….
‘이건 아니지, 이 파렴치한 새끼야….’
잠든 나디아를 보며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것인가? 루크는 제 망상에 경악하는 한편, 되새기는 것으로 쌀 뻔한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거니와, 설령 의식이 있다고 하여도 오늘은 아니었다.
루크는 짐승이 아니었고, 고작 두어 시간 전에 제가 벌였던 짓을 잊을 만큼 기억력이 형편없지도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단점과 야성에도 불구하고 인내심 하나만은 좋았다.
그는 언제나 나디아의 아주 하찮고 의미없는 행동에도 손쉽게 유혹당했으나, 그나마 봐줄 만했던 자제력이 무너질 뻔한 건 그동안 지나치게 참아왔기 때문이라고 혼자 답을 찾았다. 안나가 거듭 강조하지 않았던가? 수도는 영지와 다르며, 랭커스터 남작에게 잘 보여야 하므로 나디아를 힘들게 하는 짓은 자제해야 한다고 말이다.
충고도 충고였으나 실제로 나디아의 건강이 안 좋기도 했기 때문에, 영지를 떠난 후로 루크는 나디아를 안은 적이 없었다.
‘안은 적은 없지.’
비슷한 행위를 비롯해 진한 애무나 키스는 매일의 의식 같은 거였다. 살짝 열이 오른 몸을 기대어오는 나디아를 어떻게 밀어낼 수 있겠는가? 만약 감기라면 제게 옮기면 되겠다는 핑계와 변명을 둘러대며, 키스하고 만지기만 했다. 정말 그뿐이었다.
“후, 후우….”
괜히 허공에서 두어 번 손바닥을 쥐었다 편 루크는 비장하게 제 허리에 얹혀진 나디아의 팔을 떼어냈다. 힘을 줄 것도 없이 떨어져 나간 팔이 툭 소리를 내며 침대에 떨어졌다. 처음부터 걸쳐진 거였으니 당연했다. 그 당연한 일이 왜 이리도 아쉬운지….
찬물을 뒤집어쓰러 가기 전에 한 번만 저 금발에 입을 맞추면, 손바닥을 키스하면, 입술을 가볍게 핥으면….
참을 수 없을 게 틀림없다. 더 앉아 있다가는 기꺼이 인간이길 포기할 것 같았다. 까짓것, 인간이 아니면 어떤가. 나디아에게 목줄을 맡긴 개가 되면?.
루크는 결연하게 벌떡 일어났다.
‘잘했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넌 인간이다, 인간….’
인간으로 사는 길은 고통과 시험과 번뇌의 연속이었다. 루크에게는 그랬다.
*
나디아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벌떡 상체를 일으켜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침실은 제 처녀적 침실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낯선 곳에는 반드시 루크가 있어야만 했다. 나디아는 허둥거리며 이불을 걷었다.
“어, 엇….”
그러나 서두르려는 마음과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침대를 짚은 손목이 미끄러지며 몸이 기울어졌다. 다행히 푹신한 이불 덕분에 통증은 없었지만, 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움직이기 힘든 몸이 이상했다. 아직 수면제의 기운이 남아있기 때문이었으나 나디아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손끝부터 천천히 구부렸다 펴기를 반복하자 그제야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느낌은 퍽 불쾌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나디아는 울고 싶었다.
“나디아, 일어났소?”
“루크!”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 마냥 나디아가 반색하며 외쳤다. 절실한 마음에 커진 목소리를 듣고서 루크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는 침대에 비스듬하게 앉은 나디아에게 다가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많이 화가 났군.”
“루크에게요? 왜요?”
“…….”
루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반색하며 외친 목소리에 혼자 지레 찔린 꼴이었다. 나디아가 새벽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만약 기억하고 있다면 응당 혼이 나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실토해야지. 뭘 어떻게 해.’
모자란 말재주로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지만, 루크는 각오를 다졌다. 그는 밤새 찬물을 뒤집어쓰고 명상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오는 길이었다. 훈련을 빙자하여 흑곰 기사단을 불러내 힘을 소비하려 하였으나 눈치 빠른 기사들은 안나 핑계를 대며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힘은 하나도 소비하지 못했지만 명상한 덕분에 번뇌는 확실히 물리칠 수 있었다.
물론 겨우 물리친 번뇌들은 나디아를 본 순간 아주 쉽게 되살아나 들불처럼 번졌다. 루크는 헝클어진 금발이 흘러내린 나디아의 흰 목과 얇은 쇄골의 패인 그림자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는 인간이었다. 호수처럼 깨끗하고 맑은 마음으로 나디아를 대할 수 있다, 있었다, 있을 것이다….
나디아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쁜 꿈을 꿨거든요. 루크가 아버지의 멱살을 잡는 꿈이었는데, 이 꿈이 또 얼마나 생생한지….”
“…….”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 모르겠어요. 부모님을 뵙고, 그날은 묵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
“가족들이 루크에 대해 크게 오해를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오해한 것처럼, 결혼을 준비하면서 혼선이 생겼는지 의사소통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겁이 나서 꺼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응?”
말을 이어가던 나디아가 제 말의 오류를 발견했다. 랭커스터 가족이 루크에 대해 깊이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낮의 일이었다. 그녀는 분명히 어머니와 언니를 만나 해후를 나누었고, 오빠와 아버지를 만나 부둥켜안고 울었다. 등을 끌어안은 아버지의 손, 무게, 눈물 같은 것들이 선명했다.
‘그럼 그 뒤의 기억은?’
어두운 마차, 거칠게 흔들리는 진동, 숨죽인 비비안과 앤더슨의 대화…. 그건 지나치게 현실감이 있어서 꿈이라 치부하기 어려운 기억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라면 루크가 제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던 그 장면도 진짜인 셈이 되었다.
“…….”
“…….”
루크가 부정해주길 바랐으나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주변이 어둡고 정신이 없어 상황 파악이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그때에 느꼈던 위기감만은 분명했다. 덮칠 듯 아버지의 뒷덜미를 붙잡은 루크, 그리고 그에게 붙잡힌 채 저를 돌아보았던 아버지의 겁에 질린 표정….
‘현실이었구나, 그게….’
우습게도 꿈이라고 여겼을 때보다 현실감이 떨어졌다. 제가 본 광경이 사실이라면 그가 아버지의 멱살을 잡은 셈이 되는데 말이다. 나디아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 흔한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가 말주변이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순간조차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것은 조금 답답했다.
침묵은 때로 그 어떤 비난보다 매섭다. 루크의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은 인상이 달랐다. 루크는 새삼스럽게 그녀가 제게 언제나 웃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무런 표정 없이 저를 바라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순간에는.
‘역시 화가 났겠지. 당연히.’
당연한 노릇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해를 끼쳤는데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가 제 가족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비난을 쏟아부어 준다면 마음이 풀릴 때까지 사과할 수 있을 텐데, 나디아는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루크는 제가 사랑하는 녹색 눈동자에 실망이 어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었다.
이윽고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정말 미안하, 응?”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