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72화 (72/150)

71화

13. 사위이기는 한데

정리는 레너드의 몫이었다.

랭커스터 남작과 루크는 레너드의 중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서로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불편한 정적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루크는 루크대로 그들을 사냥하듯 쫓아와 위협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랭커스터 남작은 그를 따돌리고 도망치려 했다는 의도를 지적당할까 봐 걱정했다.

하물며 그들의 도주 원인은 저 위협적인 남자가 나디아를 학대했기 때문이지 않았나.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레너드는 앤더슨에게 ‘공작 부인의 학대’에 대해 언질을 받았으므로 그 부분에 대한 오해도 풀어 주었다. 물론 루크에게 직접 묻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앤더슨 대신 나디아를 부축한 비비안에게 그녀를 자세히 살펴봐달라 부탁했다.

만약 레너드가 이 문제를 몰랐다면 오해는 더 깊어졌을지 모른다. 진실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워낙 예민한 문제라 입 밖으로 꺼내 묻기가 힘들고,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는 일이었다.

비비안은 일리야보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나디아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나디아에게는 ‘상처’가 없었다. 그녀의 몸에 난 가장 큰 상처는 마차가 흔들리며 부딪친 바람에 생긴 타박상이 전부였다. 이런 게 학대의 증거라면 세상이 비웃을 것이다.

“이런 건 상처라고 하지 않아요, 앤더슨.”

“…….”

“이게 상처라면 당신도 날 학대한 거예요….”

“…….”

앤더슨은 할 말을 잃었다. 비비안은 무안한 듯 시선을 흘렸다. 자신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였는지 깨달았다.

어머니 마리아와 일리야는 지극히 감정적인 상태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짐작에 가까운 말만 믿고서 정작 본인에게는 확인을 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랭커스터 가는 모두 나디아가 당연히 불행했고, 불행할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나디아에게 상처로 보일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고 해도 그들은 얼마든지 부정적인 해석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비단 마리아와 일리야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디아가 불행할 것이라는 가정을 철석같이 믿고서? 정작 눈앞에 보인 진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모두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몰라요. 루크도 정말 다정하고….’

나디아가 하는 말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가족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여동생이었다. 떠밀려 희생한 결과가 불행하다고 제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행복한 척을 한다고, 제멋대로 망상해 결론을 내리고는….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거짓으로 하는 말인지 구분할 생각도 못 했었다니.

앤더슨은 그제야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나디아가 자신을 애타게 흘긋거렸던 걸 기억해냈다. 나디아는 자신을 도와주길 바랐던 것이다. 자꾸 울음을 터뜨리는 어머니와 일리야를 달래느라 정작 그녀 자신의 이야기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디아가 어떻게 지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레너드가 말했다.

“오해는 풀린 것 같군.”

“전하….”

“우선 돌아가게. 날이 밝은 후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으니.”

사실 달리 할 수 있는 선택이 없기도 했다.

앤더슨은 당황한 부모님과 일리야의 일가, 그리고 제 가족들을 챙겨 랭커스터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디아를 학대한 정황이 오해라면 그들도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랭커스터 일가를 태운 마차가 떠나자 레너드가 긴 한숨을 쉬었다.

“생긴 것과 달리 행동력이 엄청난 사람이야. 담이 큰 건지, 작은 건지 구분이 안 가는군.”

“역시 남매인가 봅니다.”

“……공작 부인도 저런가?”

“……비슷하시죠.”

제이는 흐리게 웃으며 대답했다. 머뭇거리는 행동거지만 보자면 겁이 많고 소심한데, 루크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가거나 그 야수를 어린애 취급하는 걸 보면 그렇게 대담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큰일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제이의 감사는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주인 못지않게 건방진 성미의 기사가 드물게도 공손하고 솔직한 감사를 전했으나 레너드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는 내내 떨떠름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감사 인사는 됐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는 꼴을 더 보기는 버거우니 그만둬.”

사실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기로는 오늘 밤의 레너드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타인을 위해 새벽잠을 희생해가며 외출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제이는 그 점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오늘 밤 레너드의 활약에 감사하는 마음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전하가 안 계셨다면 이 당황스러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수 있었을지….”

루크는 모르지만 제이는 랭커스터 가의 오해에 대해 들었다. 그들이 루크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 왜 야반도주를 감행하였는지 상세하게 듣고 말았다. 그 오해는 레너드가 아니었다면 절대 풀릴 수 없었을지 모른다는 점도 이해했다.

그러나 동시에 레너드가 어째서 ‘더는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지 말라고 하는지도 이해했다. 레너드가 툭 던지듯 비아냥거렸다.

“눈이 있다면 내가 없었어도 오해는 풀렸을 테지.”

제이는 레너드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끝에는 루크가 있었다. 레너드가 혀를 찼다.

“저 꼴을 보고서도 학대니 뭐니, 더는 오해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렇죠.”

앤더슨은 당연히 잠이 든 나디아를 데려가려고 했다. 그녀는 랭커스터 가에서 잠들었고, 하룻밤 묵고 갈 예정이었다. 눈을 뜬다면 잠이 든 곳이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루크가 나디아를 받았다. 축 늘어진 나디아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혹 찬바람에 추울까 제 망토를 벗어 감쌌다.

오해였다고 하더라도 눈앞에서 나디아를 빼앗겼던 경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루크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나디아가 숨을 쉬는지, 따뜻한지 천천히 확인했다. 그리고 무사한 걸 확인하고서야, 잠시 멈추었던 숨을 쉬었다.

앤더슨은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는 이 남자를 몰랐지만? 오히려 악감정을 가지기 충분할 만큼 당하기만 했지만 차마 그가 나디아에게 해를 끼치리라는 가능성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제국의 태자가 신원과 신분을 보장했으므로 그가 스테이턴 공작임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 앤더슨은 그에게서 나디아를 빼앗지 못하고 물러났다.

레너드가 말했다.

“어떻게 빼앗겠나. 그 얼굴을 보고.”

“뭐….”

‘그 얼굴’을 매일 봤던 제이는 크게 감흥이 없었다. 잠시 후 레너드는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못 볼 걸 봤어, 눈을 씻고 싶군.”

“…….”

“비위 상해.”

“…….”

차마 이해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제이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말재주가 없다.

자신도 알고 있던 단점이다. 그러나 그 단점이 이다지도 치명적일 것이라고는, 나디아를 만나기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떠오르는 온갖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못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아니, 멍청하고 못난 게 맞지.’

루크는 냉정하게 정정했다. ‘것만 같다’고 말해주기에 그는 오늘 변명할 수도 없이 멍청한 짓을, 그것도 과격하게 저지르고 말았다.

‘제이 말을 들을 것을.’

후회는 언제 해도 늦다. 충성스러운 보좌관은 대개 올바른 조언을 해주었으나 루크는 그다지 귀기울여 듣는 법이 없었다. 그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조언은 손해를 조금 줄여주는 역할을 할 뿐으로, 듣지 않아도 큰 차이는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스테이턴 공작에게 주어진 의무와 과업에 있어서 루크의 판단은 대부분 옳았다. 언뜻 엇나가거나 비틀린 답처럼 보여도 어떻게든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인간, 혹은 개인으로서의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의 판단은 모두 좋지 않은 결과만 불러왔다.

레너드의 조언을 들었던 순간이 그랬고, 랭커스터 가에 청혼서를 넣었던 순간이 그랬으며, 결혼을 진행하던 과정들이 모조리 그랬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멍청하기만 했다.

입만 살아 나불거리는 것들이 더 멍청하다고 여겼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의 방식에 만족하며 살았다. 혀에 기름칠을 한 듯 번드르르한 미사여구를 붙여 쓸데없이 늘려 말하는 레너드 같은 것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루크는 절실하게 레너드의 혓바닥을 가지고 싶었다. 진심을 전하는 데에는 때로 행동보다 친숙하고 능수능란한 말 몇 마디가 더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이제껏 몰랐다.

“으응….”

“…….”

잠결에 흘리는 신음이 달콤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루크는 눈을 들어 옆을 보았다. 나디아가 침대에 파묻힌 듯이 잠들어 있었다.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를 물결처럼 흘렀다. 다행히 단꿈을 꾸고 있는지 편안한 표정이었다.

나디아를 눈앞에서 놓쳤던 순간, 전신의 피가 발바닥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안전을 자신하지 않겠다, 결코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디아의 자매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고집을 부려 함께 머물렀다면, 혹은 함께 떠났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다.

루크는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한 줌 쥐었다. 매끄럽고, 조금 차가웠다. 그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그대로 입술에 가져갔다.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는 정도로는 그녀의 꿈을 방해하지 않겠지….

“…….”

고작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 것만으로. 루크는 자괴감에 인상을 찡그리며 숙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가장 걸리적거리는 자기 자신을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힘을 덜 썼기 때문인지, 벌떡벌떡 지칠 줄을 몰랐다.

‘사람이 감성적인 생각을 좀 하려니까….’

그러나 결혼을 한 이후 이 정도 발기는 일상이었으므로 루크는 자괴감을 느낄지언정 당황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일어나 찬물을 뒤집어써준 후, 새벽부터 흑곰 기사단 몇 명을 불러다 훈련시켜주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가 발기할 때마다 나디아를 안았다가는 그녀가 쪼개지고 말 테니까….

“으응, 루크….”

멈춘 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루크는 오랜만에 결혼 직후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너울거리는 팔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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