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각하?”
“황태자 전하?”
얼빠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앤더슨과 랭커스터 남작이었다.
이 자리에서 들려서는 안 될 호칭이 둘이나 들렸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리도 없는 일이었다. 제국에 단 넷밖에 없는 공작과 단 하나뿐인 황태자가 어째서 이 야밤에, 그것도 변두리 숲에 있단 말인가? 랭커스터 남작은 조금 전까지 그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던 남자와 그를 붙잡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앤더슨이 무사하고, 그의 품에 안긴 나디아도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랭커스터 남작은 당장이 어떤 상황이든 안심할 수 있었다.
레너드는 루크의 팔을 붙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루크의 팔뚝은 그가 한 손으로 붙잡기는 버거웠다. 두 손을 써서 있는 힘껏 붙잡아야 겨우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눈앞에서 제 부인을 빼앗긴 루크가 살벌한 눈으로 레너드를 돌아보았다. 레너드는 루크가 제 정체를 확인하고도 주먹질을 하려 했다는 데에 전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제이와 레너드가 온 힘을 다한 제지 정도는 그를 조금도 멈출 수 없었다는 사실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크가 멈추어준 것은 다급한 제이의 간청 때문이었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잰 척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레너드가 ‘멍청한 자식’이라는 욕을 입에 올렸기 때문이다.
평소답지 않은 데에서 오는, 어딘가 불길한 예감 때문에.
‘짐승 같은 새끼….’
레너드는 자신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설명을 요구하는 루크에게서 눈을 떼어 앤더슨을 돌아보았다. 그는 나디아를 끌어안고서 가련하게도 벌벌 떨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죽을 위기였으니 당연했다. 긴장이 채 풀리지 않아 굳은 얼굴과 혼란스러워 떨리는 눈동자? 그는 마치 대낮에 죽은 사람을 본 듯이 겁에 질려 있었다. 레너드는 속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앤더슨의 순한 얼굴만 보면 레너드는 뜨거운 땅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죄책감이 발바닥에 박힌 가시처럼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진정하게, 앤더슨.”
“저, 전하, 전하께서 어찌 이곳에, 이게….”
“숨 좀 쉬고.”
“…후…….”
앤더슨은 순순하게 심호흡을 했다.
“뭡니까, 이게.”
자신을 빼놓고 정답게 흘러가는 대화에도 루크는 인내를 발휘했다. 나디아가 제 눈앞? 그리고 손이 닿는 거리에 있다는 점이 그를 조금 더 참을성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는 짜증을 꾹 눌러 참은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눈치챈 제이가 말했다.
“오해였습니다, 각하.”
“무엇이?”
“그게, 그러니까, 저분들은 납치범이 아니고?.”
“납치범?!”
앤더슨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저희가 말입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오해가 있네. 그건….”
레너드가 말했으나 앤더슨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저희는 저희 집에서 나왔을 뿐입니다! 남의 집에 쳐들어와 쫓아온 쪽이 누군데, 우리를….”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냥을 당하는 토끼가 된 것처럼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적도, 원한을 산 적도 없는데 말이다.
“저희 집?”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누굽니까. 누구기에 저흴 납치범 취급을 한단 말입니까!”
“…….”
“누….”
울분을 터뜨리던 앤더슨이 멈칫하며 입을 닫았다. 눈을 부릅뜬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의 이목구비는 사람 같지 않던 주먹과 달리 퇴폐적이고 신경질적인 도련님처럼 섬세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이 살벌하지 않았다면 앤더슨은 그 주먹의 주인이 저 남자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아래의 흰 피부만 보면 남자는 햇빛 한 번 쬐어보지 못한 사람 같았다.
“…집이라고.”
“…….”
“그 집이, 당신의….”
흡사 목이 졸린 듯 꺼져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앤더슨이 남자를 슬쩍 보았다. 희미한 달빛 때문인지 남자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처럼 보였다. 기세가 약해진 덕분에 앤더슨은 조금 더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앤더슨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 집은 우리집입니다. 부모님의…. 랭커스터 남작의 소유이고…. 전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예요. 우리는 납치범 같은 게 아닙니다.”
“…….”
“…당신은 누굽니까.”
제이와 레너드는 슬그머니 루크의 팔을 놓았다. 루크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무표정하게 보이겠으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당황한 속내가 고스란히 보였다. 그야 그럴 것이다. 제이는 잘게 떨리는 루크의 눈동자를 보며 동정을 삼켰다.
제 부인을 눈앞에서 납치해 간 원수가 처가 식구들일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루크에게는 최악을 피하기 위한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다. 랭커스터 저택을 찾아온 레너드와 만났을 때다. 그때 레너드와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누었다면….
‘적어도 처가 식구들을 토끼몰이하듯 사냥하지는 않았을 텐데….’
평소처럼 레너드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말을 들으면 납치하듯 결혼을 해 오고, 말을 안 들으면 납치하는 줄 알고 처가 식구를 사냥한다. 뭘 어떻게 해도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제이는 입안이 썼다.
어느 쪽도 동정할 만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사들도 무서워하는 루크에게 직접 추격을 당한 랭커스터 남작과 그 장남이 불쌍할 따름이었다.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저 무서운 사람이 죽일 듯이 쫓아오는 상황이 말이다. 꿈에라도 볼까 무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
루크는 천천히 마부석에 앉아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조금 전까지 목을 쥐고서 위협했던 남자는 다소 마른 체구를 가진 중년이었다. 이목구비는 낯설었으나?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이 가득한 녹색 눈동자는 루크가 잘 아는 녹색과 똑같았다….
랭커스터 남작이 틀림없었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보았던 그 얼굴이다.
‘제기랄.’
망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열이 순식간에 식었다. 눈앞에서 나디아를 놓치고 잃어버렸던 이성이 제자리를 찾았다. 자신이 누굴 고양이 쥐 잡듯 사냥했는지, 그를 말려준 제이와 레너드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끔찍하고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뻔했는지…. 생각하면 칼날을 삼킨 듯 목구멍이 선득해졌다.
실수를 저지르기 직전이라 다행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루크는 누구보다 잘 보여야 할 사람들을 사냥하고, 위협하고, 마차를 부순 것이다. 비극적 사태는 가까스로 막았지만, 루크 개인으로 보자면 이미 충분한 비극이었다.
루크는 홱 몸을 돌려 마부석 쪽으로 걸어갔다.
앤더슨은 제 신분을 밝힐 줄 알았던 남자가 갑자기 아버지에게 접근하자 놀라며 손을 뻗었다. 그가 나디아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남자의 발목이라도 붙잡고 늘어졌을 것이다.
마부석이 꽤 높았는데도 랭커스터 남작은 빠르게 다가오는 남자가 손만 뻗으면 제 멱살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히익….”
맞는다…!
랭커스터 남작이 숨을 삼키는 순간, 동시에 털썩 소리가 났다. 눈을 질끈 감았던 남작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빠르게 다가왔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물러났던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당겼다. 상체를 숙이자 남자의 정수리가 보였다.
커다란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네?”
뭐?
“나디아를 납치하려는 줄 오해했습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예? 네?”
“정말 죄송했….”
“잠깐, 저기, 누, 누구신데 저에게 장인어른이라고….”
랭커스터 남작은 말 고삐를 생명줄처럼 쥐고서 떠듬떠듬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그의 녹색 눈동자도 하염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남자와 그를 황망하게 쳐다보는 남자 둘?그중 한 사람은 먼발치에서나마 보았던 고귀한 황태자일 것이다?, 그리고 더 당황한 장남 앤더슨을 훑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듯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주변을 훑어본 남작의 눈동자가 다시 눈앞의 남자에게로 돌아왔다. 자신을 장인어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딱 한 사람이었다. 다른 마차를 몰고 있던 일리야의 남편, 조지였다. 그 외에는….
‘설마, 그럴 리가….’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하는 머릿속 한구석에는 이름 한 줄이 떠올라 있었다. 느닷없이 날아온 청혼서에 쓰여있던 이름, 평생 자신과 얽힐 일이 없을 거라 확신했던 그 이름, 그 가문….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아니야, 그 남자는, 그 사람은 야수인데….’
아직 20대라고는 믿기지 않던 그 남자를 잊어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저 남자는 무섭기는 해도 사람이지 않은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말끔한 얼굴이 드러났다. 역시 사람이야…! 안도하던 랭커스터 남작은 잘생긴 사람의 얼굴에서 익숙한 것을 한 가지 발견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검은 눈동자, 살벌한 눈빛.
결혼식장에 들어서기 직전까지도 스테이턴 공작은 저런 눈으로 랭커스터 남작을 노려봤다. 그때는 대체 제게 무슨 원한이 있어 저러나, 딸을 빼앗고도 모자랐나, 저런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하는 우리 딸이 과연 무사할까…. 그런 생각으로 가득해 슬퍼하기 바빴지만 지금은 어째….
‘긴장… 한 건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