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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70화 (70/150)

69화

마차라는 물건이 사람 손으로 부술 수 있는 것이었던가? 비비안과 앤더슨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급히 구했다고는 하지만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낡은 마차는 아니었다. 부수고자 두드려도 망치 같은 도구를 써야 할 텐데, 마차 벽은 마치 얇은 판자처럼 허무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게다가 그 주먹은 너무나 컸다. 속도를 맞추기 힘들기 때문인지 주먹은 금세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사람의 손이 그들의 눈앞에 머물렀던 시간은 고작해야 찰나였으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저자들은 누구예요?! 왜 우리를 쫓아오는 거죠?”

“강, 강도인 것 같… 으악!”

마차가 크게 흔들려 앤더슨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모양이 혀를 깨문 듯했다. 비비안은 자신들을 쫓아오는 이들이 단순한 강도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느 강도가 달리는 마차를 맨손으로 깨부수며 쫓아온다는 말인가? 오히려 도적에 가까운 행태였다. 그것도 자신들에게 굉장히 깊은 원한을 가진 도적 말이다.

그러나 랭커스터 가문은 정말이지 순하고 착하다는 장점 하나로 험한 사교계에서 버텨온 가문이었다. 짧은 순간 마치 주마등처럼 제 지난날을 훑어보았으나 도통 이만한 원한을 살 만한 일은 짐작도 가는 게 없었다.

뚫린 구멍(사람의 손이 지나간 자리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너머로 한층 생생해진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경쾌한 발굽 소리가 마치 그들을 쫓아오는 죽음의 신의 웃음소리처럼 느껴졌다. 비비안은 잠든 아들과 나디아를 끌어안았고, 앤더슨은 마차를 몰고 계실 아버지가 걱정되어 마부석 부근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아버지! 아버지, 무사하신,”

그러나 말을 마치기 전에 마차가 급히 멈추었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앤더슨과 비비안은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아들 펠릭스와 나디아를 끌어안고 있던 비비안이 그들 위로 무너지자, 잠들어 있던 펠릭스가 짜증 섞인 신음을 흘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앤더슨에게는 살면서 들어보았던 그 어떤 소리보다 컸다.

‘안 돼, 아이들까지 위험해지겠어!’

심장이 바싹 졸아붙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스테이턴 공작가에서 청혼서가 날아들었을 때? 나디아만 희생시키는 꼴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때? 그것도 아니면, 공작 부인이 된 여동생의 불행을 외면하지 못하고?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고자 마음먹었을 때인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야 원인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불과 반년 전까지 누렸던 평화롭고 행복한, 때로는 지루하기까지 했던 일상이 마치 꿈만 같았다.

‘안 돼,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앤더슨은 비장하게 볼 안쪽 살을 세게 깨물었다. 비비안이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비비안은 제 마음을 헤아려 앞으로 어찌될 지도 모르는 길을 따라나서 주었다. 그 결정을 했을 때 도적(강도에서 발전했다)에게 살해당할 위기는 아무도 상정하지 않았으나,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가족을 반드시 지켜내야 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상념은 길었으나 마차가 갑작스레 멈추어 넘어진 직후의 찰나간이었다.

‘왜 조용하지…?’

급히 마차가 멈추었을 정도이니 밖에는 소란이 일었을 거라 생각했다. 끈질기게 쫓아오던 말의 발굽 소리도, 앞서 달려가던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모두가 숨을 죽인 듯이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앤더슨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비비안, 절대 나오지 말고 여기 꼭 숨어 있어요. 알겠죠? 절대 나오면 안 돼요….”

작게 속삭이자 비비안이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밖에는 랭커스터 남작이 있었다. 차마 가지 말라고도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젓는 비비안을 뒤에 두고 앤더슨은 마차 문을 열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을 삼키며 마부석을 보았다.

“헉….”

유독 어두웠던 이유는 그림자 때문이었다. 커다란, 올려다보아 그런지 산처럼 느껴지는 남자가 마차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마차가 멈추기 전에 들렸던 “쿵!” 소리는 그가 마차 지붕에 발을 딛으며 난 소리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손이 제 아버지의 뒷덜미를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그 손을 놓, 놓….”

“…….”

앤더슨이 떠듬떠듬 소리치자 남자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달을 등지고 서 있어 역광이 드리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살벌한 기세만은 선명했다. 평생 싸움이나 전쟁, 검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앤더슨은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으나, 언젠가 늙은 기사가 말해주었던 살기라는 것은 이런 것일 테다.

짐승의 눈빛이 이럴 것인가. 자신을 한 입에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다리 힘이 풀릴 것 같았으나 앤더슨은 주저앉을 수 없었다. 저 남자에게 붙잡힌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이고, 등 뒤에는 아내와 아들, 여동생이 있었다. 그가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벌린 그 순간.

“루크, 안 돼요!”

“멈추게, 루크!”

마차 안에서 나디아가 뛰쳐나왔다.

*

나디아는 한참 전부터 깨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의식만 깨어있다고 해야 옳았다.

물에 푹 젖은 듯 온몸이 무겁고 눈꺼풀이 열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억지로 끌어내리는 것처럼 도저히 잠에서 깰 수가 없었다. 열에 시달렸던 어제처럼 분명 제 몸인데도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아 답답하고 무서웠다. 까무룩하니 어두운데 익숙한 목소리? 비비안과 앤더슨의 목소리가 들렸고,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지진이 일어난 땅에 서 있는 듯이 흔들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악몽을 꾸고 있는 줄만 알았다. 일리야가 언젠가 자다 보면 의식만 깨어 있고 몸은 잠들어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던 말이 기억났다. 눈을 뜨고 싶은 초조함과 아주 기절하고 싶은 두려움 사이에서 애를 쓰고 있는 사이 주변이 크게 흔들리고, 어딘가에 세게 부딪혔다.

눈을 뜨자마자 겁에 질린 비비안과 펠릭스, 그리고 앤더슨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어디인지, 제가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마부석과 이어지는 연결창을 열었다. 아직 잘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서두른 탓에 넘어질 뻔했지만 아프지도 않았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마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얼어붙은 듯 멈추어 선 앤더슨,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 올려다본 그곳에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이 함께 있었다. 나디아는 하얗게 질려 비명처럼 외쳤다.

“루크, 안 돼요!”

“멈추게, 루크!”

동시에 누군가가 내지른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뻣뻣하게 굳은 아버지가 눈만 돌려 그녀를 보았다. 겁에 질린 그의 표정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아버지의 목을 쥐고 있는 남자, 루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자신을 발견하고서 허물어지듯 손을 놓았다.

“나디아!”

루크, 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채 밖으로 나오기 전에 그녀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전신을 부딪힌 아픔으로 겨우 붙잡은 의식이 멀어지려 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쓰러지는 나디아의 시야에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루크가 보였다. 그가 자신을 붙잡아줄 수 있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그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자면… 안 되는… 데….’

겁에 질린 비비안의 얼굴, 급히 뛰어나가던 앤더슨의 뒷모습, 그리고 궁지에 몰려 얼어붙어 있던 아버지의 눈빛이 차례로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에게 루크는? 첫날밤 나디아에게 그랬듯 두렵고 위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나디아는 랭커스터 가족들이 느끼고 있었을 공포를 이해했다.

스테이턴 영지에 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루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기 전까지 나디아도 그들과 똑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자유를 빼앗긴 피지배자의 처지란 그런 것이다. 나디아의 결혼에 그녀의 의지는 없었다. 부모님의 강요도 없었다. 지배자의 간택, 그리고 그에 복종해야만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피지배자의 굴복이 있었을 뿐이다. 언제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을 수 있는 입장, 그들에게 소중한 것들을 한순간에 망가뜨릴 수 있는 힘.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스테이턴 공작 가문은 순간의 변덕으로 랭커스터 남작 가문을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제아무리 억울한 누명을 씌워도 도리가 없겠지. 고작 남작 가문을 위해 대귀족에게 싫은 소리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 ‘돌아왔다’고 실감할수록,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어 감동스러운 한편으로 나디아는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선명하게 느꼈다.

루크를 밀어내는 일리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일리야에게 루크는 여전히 극악무도하게 권력을 휘두른 대귀족이고, 그녀는 그를 몰랐다. 일어난 사건과 드러난 진실만 알 뿐이다.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때릴 의도는 없었으니 이해하라고, 가해자가 말해봐야 피해자는 납득할 수 없다.

그러니 루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없는 자리에서 가족들을 온전히 안심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멍청한 나, 제대로 해내는 거라고는 결국….’

아무것도 없어. 여전히.

나디아가 땅에 쓰러지기 직전, 루크는 겨우 그녀의 한쪽 팔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을 떠받친 사람은 다른 이였다. 루크보다 그녀와 가까이에 있던 남자였다. 루크는 차마 나디아가 아플까 봐 당기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빼앗길 수도 없어 손 대신 눈에 힘을 주었다. 허튼짓을 하려 한다면 당장 때려죽여 주겠다는 위협을 담아서.

그때였다.

“멈추라고 하지 않았나, 이 멍청한 자식아!”

“그만두십시오, 각하!”

레너드와 제이가 그의 오른팔과 왼팔을 각각 붙잡았다.

“……각하?”

“황태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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