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자들은!’
다짜고짜 남의 집에 쳐들어와 놓고서는 도리어 “어떤 새끼들이냐”고 으름장을 놓던 습격자들은 대체.
습격자 주제에 누구냐 묻다니, 제 집에서 나가다 쫓기는 신세가 된 앤더슨은 억울하다 못해 분통이 터졌다. 어두워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못했다. 그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분노를 터뜨리던 남자가 너무 크고, 무섭고, 빠르고, 힘이 세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그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앤더슨은 그것이 사람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악몽의 기사라는 나이트메어의 현신이 저럴까. 발을 굴러 말이 놀랄 만큼 큰소리가 날 수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멀리서도 거대한 체구인 줄은 알았으나 말에 올라탄 자신을 향해 달려올 때는 미친 소가 달려드는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그에게는 무기도 없었다. 바위 같은 주먹을 움켜쥐고서 마치 때려죽이기라도 할 듯이 살기로 눈을 번뜩거렸다.
“으으….”
떠올리는 것만으로 오한이 들었다. 앤더슨은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몸서리를 쳤다.
뿐인가? 남자가 몸을 던져 아버지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잡히는 줄 알았다. 앤더슨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무서운 순간 중 하나였다.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던 이불, 그 안에 둘둘 말린 채 세상모르고 잠이 든 나디아, 그녀를 신경쓰느라 말에서 떨어지실뻔한 아버지.
‘어째서 단 한 번도 든 적 없던 강도가 하필이면 오늘!’
앤더슨은 자신을 쫓아오는 추격자와 저택에 쳐들어왔던 습격자의 정체를 강도라 단정지었다. 이 근방은 치안이 좋지만, 그렇다고 불행한 사건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강도는 언제든 들 수 있고, 그게 하필 오늘이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앤더슨이 보았다고 생각해 쫓아오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끈질기게 쫓아올 이유가 없었다!
앤더슨은 물론이고 그의 부친도, 모친도, 일리야마저도 누군가에게 살해 위협을 받을 만한 잘못은 저지른 적이 없다. 그들은 타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로 유명한 일가였다.
‘얼굴 같은 거 못 봤다고 지금이라도 사정을 얘기하면….’
알아줄지 모른다.
‘그럴 리가 없나….’
랭커스터 저택에서 랭커스터 부자를 쫓아낸 괴한의 얼굴은 정말 못 봤지만, 말을 타고 도망치는 그들을 쫓아오는 추격자의 얼굴은 어렴풋이 보았다. 앤더슨은 눈물을 삼켰다.
지금쯤 랭커스터 남작은 미리 수배해놓은 마차에 타서 일리야와 남작 부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랭커스터 일가가 모두 탈 수 있어야 했으므로 마차가 두 대는 필요했다. 가족만으로도 이미 9명, 나디아까지 포함하면 10명이 되기 때문이다. 모아놓은 재산이나 신분 따위는 모두 버릴 것이기에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귀금속만 챙겼다.
마차는 일리야의 남편 조지가 수배했고, 아이들은 앤더슨의 부인 비비안이 챙겼다. 랭커스터 남작이 먼저 나디아를 데리고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갔고, 추격자의 주의를 끌어 따돌리려던 앤더슨만 남았다.
돌처럼 굳은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걷던 앤더슨이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폐가 찢어질 것 같았고, 멈추지 않으면 추격자에게 붙잡히기 전에 죽을 것 같았다. 언제 쫓아올까, 발소리가 들릴까 소리를 죽이고 밭은 숨을 몰아쉬던 앤더슨은 아무도 제 뒤를 쫓아오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포, 포기한 걸까?’
쫓아낸 것으로 만족한 것일지 모른다! 아니면 저택이 텅 비었다는 동료의 연락을 받고 챙겨갈 재산 쪽에(그나마 얼마 있지는 않다) 집중하기로 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당장 앤더슨이 살았다는 건 분명했다. 그는 희망을 양분 삼아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냈다.
마차는 약속된 장소에 서 있었다. 앤더슨은 마차를 보고 달려가다 바깥에 나와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비비안?”
“?앤더슨!”
“왜 나와 있어요?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겠어요. 괜찮아요? 땀 좀 봐….”
“…난 괜찮아요. 펠릭스는….”
“이미 자고 있지요. 그 애는 한번 잠들면 웬만해서는 깨지 않잖아요. 자, 어서 타요. 마차는 아버님이 몰아주신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앤더슨이 머뭇거리며 마부석을 보았다. 한 대에는 랭커스터 남작이, 다른 한 대에는 조지가 앉아 있었다. 비비안이 그의 마음을 읽은 듯 팔뚝을 당겨 안으며 그를 재촉했다.
“당신은 할 만큼 했어요. 이제는 쉬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자, 어서.”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솔직히 더 남은 힘이 없었다. 다리가 덜덜 떨려 당장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 앤더슨이 비비안의 부축을 받아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추적이 멈추었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들켜서 좋을 것이 없으니 어둠을 밝혀줄 빛 한 줌 없이 단 하나뿐인 길을 따라가야 했다.
수도는 높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벽의 내부는 눈부신 번영을 이룬 화려한 도시이나, 도시 전체가 화려하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오래된 건축물 사이에는 낡고 더러운 골목이 존재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값비싼 통행료를 낼 돈이 없었다.
숲은 남서쪽 성벽을 따라 길게 생성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성벽 밖에서 몰래 돈벌이를 하는 가난한 자들이 만들어놓은 문이 있었다. 랭커스터 가는 그 문을 이용해 탈출할 예정이었다.
평민에 가까운 하급 귀족이 아니라면, 성품이 다정하여 사용인들에게도 인망이 높은 랭커스터 남작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는 정보다. 특히 스테이턴 공작 같은 대귀족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앤더슨이 오른 마차에는 그의 아들 펠릭스와 함께 나디아가 잠들어 있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지도 못하고 곯아떨어진 나디아는 평온하게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비비안이 나디아를 걱정스럽게 살펴보며 물었다.
“얼마나 강한 약을 먹였기에 깨질 않아요?”
“…의사가 알려준 만큼만 넣었는데.”
“누구 이름으로 처방 받았는데요?”
“어머니가 쓰실 약이라고 했어.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계시기도 하니.”
비비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나디아에게는 약이 셀 수밖에요. 나디아는 한 번도 수면제를 마셔본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
“걱정할 것 없어요, 금방 일어날 테고….”
핀잔을 주고 곧바로 위로를 더한 이유는 어둡게 가라앉는 앤더슨의 표정 때문이었다.
“정말 걱정이 많다니까. 괜찮아요. 단 한 번 쓴 것으로 부작용이 생기지는 않을 테고, 오히려 푹 자고 일어나면 컨디션도 좋아질 거예요.”
“……정말 미안해요, 비비안. 나 때문에…….”
“어머, 그 얘기는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요?”
단순히 나디아를 걱정해서 얼굴이 어두워진 게 아니었다. 비비안은 씩 웃으며 오히려 경쾌하게 말했다. 그녀 또한 나디아를 홀로 낯선 집안에 팔듯이 시집보낸 것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앤더슨에게 자신과 아이가 없었다면, 일리야에게도 가족이 없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결혼 생활을 한 지 벌써 12년이 넘었다. 나디아를 지켜본 세월도 딱 그만큼이 됐다. 비비안에게도 나디아는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아들의 안위와 저울질해야 했던 순간의 고뇌와 죄책감을 어떻게 잊을까.
“하지만.”
“이미 끝난 얘기이고, 벌어진 일이고, 엎질러진 물이에요. 우린 이미 마차에 탔잖아요.”
비비안은 단호하게 뒷말을 잘랐다. 앤더슨은 중요한 순간에는 제 신념에 따르고, 한 번 결심하면 고집스럽게 밀어붙이지만 결심을 하기까지 매우 오래 걸렸다. 다정하고 섬세하다는 건 일부분 우유부단하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앤더슨과 사는 동안 비비안은 그가 부족한 만큼의 결단력을 더 갖추었다.
앤더슨은 고개를 숙여 비비안의 콧등에 제 콧등을 문질렀다. 작게 고맙다 전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때였다.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악!”
비비안이 비명을 지르며 누워있는 아들을 끌어안았다. 앤더슨은 나디아가 쓰러지지 않게 떠받치며 마부석과 이어지는 작은 연결창을 열었다. 직사각형의 좁은 틈 사이로 찬바람이 확 들이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차가 거칠게 흔들렸다. 바퀴에서 쩍,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아버지! 무슨 일, 윽!”
“그놈들이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이럇!”
랭커스터 남작이 이를 악물고 말채찍을 휘둘렀다. 소란이 일어서야 곤란했지만 강도에게 붙잡혀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앞서 출발한 마차에는 랭커스터 남작부인과 일리야, 그리고 그녀의 남매가 타고 있다. 절대 붙잡혀서는 안 되며 설령 붙잡힌다 한들 아이들만은 살려야 했다.
‘왜 하필 오늘!’
어째서 오늘인가? 왜 오늘 강도가 들어야만 했는가. 앤더슨은 울고 싶었다. 그는 후미로 난 연결창을 열었다. 마부석으로 이어지던 창과 마찬가지로 직사각형의 조그만 틈 사이로 바깥 풍경이 보였다.
두두두두!
빛 한 줄 들지 않는 듯 어두운 숲길에서도 희부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는 선명하게 보였다. 그 선두에는?.
“미친….”
맨손으로 말을 때려잡으려던 괴한이었다. 앤더슨이 어, 어 소리를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비비안이 얼어붙은 그를 이상스레 쳐다보았다.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앤더슨, 왜?.”
그때였다.
콰직!
마차 벽을 뚫고 사람 주먹이 앤더슨과 비비안 사이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