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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68화 (68/150)

67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떨어지는 동안 땅과의 거리만 잘 가늠한다면, 종탑 외벽에 검을 박아넣어 속도를 줄이고 균형을 잡아 착지할 수 있다. 발목이 시큰거렸으나 참을 만했다.

루크는 본능대로 몸을 움직였다. 거대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놀림에서는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뿐하게 뛰어올라 담에 팔을 걸치고 그대로 뛰어넘었다. 불이 꺼진 랭커스터 저택을 노려보며 수십 번이나 시뮬레이션했던 루트 그대로였다.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랭커스터 가의 사람 중 누군가가 밤 외출을 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소리를 죽여가며 조심할 이유가 없었다. 루크의 직감이 말했다.

나디아가 위험하다.

‘감히 어떤 새끼가.’

루크는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감히 그의 눈 앞에서, 그것도 가장 안전하고 편안해야 할 친정에서 그녀를 위협하려는 무리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디아의 가족을 해하려 한다면 쉽게 눈감을 수 있는 자비를 베풀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나디아의 손끝이라도 상한다면 더욱.

마구간이 보이자 루크는 크게 발을 굴렀다.

쿵!

히이잉! 푸르르!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말들이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울었다. 앞발을 치켜든 말에 올라탄 사람은 둘, 그중 하나의 등에는 흰 이불에 감싸인 누군가가 있었다. 이불 사이로 긴 금발이 흘러나와 흔들렸다.

틀림없이 나디아였다.

“감히! 어떤 새끼들이냐!”

복면을 쓴 괴한들은 루크를 보고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루크는 습관적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뽑아들려 했으나, 그가 챙겨 온 검은 종탑 외벽에 박혀 있었다. 물론 검이 없어도 괴한 둘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루크는 맨손으로도 충분히 강했으므로.

다만 조금 뒤처리가 귀찮아질 뿐이다. 맨손으로는 깨끗하게 처리할 수 없으니까.

루크가 일단 말을 향해 뛰었다. 사람이 아니라 말을 때리면 혹여 나디아가 정신을 차리더라도 못 볼 꼴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도, 도망쳐!”

“후문으로!”

그러나 괴한들의 승마 실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패닉에 빠진 말들을 빠르게 진정시키고 고삐를 당긴 그들이 루크를 피해 양옆으로 흩어졌다. 제아무리 루크라 해도 말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루크는 튀어오르듯 흰 이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잡힐 듯했으나 안타깝게 닿지 못했다. 무작정 몸을 던진 탓에 형편없이 땅에 떨어진 루크가 분통을 터뜨리며 욕설을 뇌까렸다. 괴한들을 노려보는 눈빛이 살기등등하게 번쩍거렸다. 괴한의 등 뒤에 얹혀진 나디아가 혹여라도 위험할까 봐 섣부른 행동은 시도할 수 없었다.

“네 이놈들,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다! 어디로든 도망갈 수 있을 줄 알고!”

괴한들이 도망치는 방향에도 흑곰 기사단이 잠복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놓친다고 해도 루크는 대륙 끝까지라도 그들을 쫓아가 나디아를 되찾을 생각이었다. 감히 스테이턴 공작 부인을 건드렸으니 어디로 도망가도 지옥뿐이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스테이턴을 원수로 돌린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각하!”

제이였다. 허망하게 괴한들을 놓친 루크는 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는 제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빠르게 말했다.

“말을 가져와라, 당장! 후문 쪽이다. 긱스가 쫓아가고 있을 테니 후발로 붙는다.”

“기다려 주십시오, 각하!”

“제기랄, 말을 가져오라고 했을 텐,”

“태자 전하이십니다!”

“?뭐?”

“각하께서 일러주신 마차에 타고 계셨던 분이….”

사납게 일그러뜨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럴 때 들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직위가 튀어나와 더욱 그랬다. 제아무리 수도가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이 없는 루크라 해도 황태자와 남작이 얼마나 먼 존재라는 것쯤은 알았다. 새벽에 가까운 시각, 마차를 타고 랭커스터 남작가로 다가오던 자가 태자 레너드였다고.

“……그 새끼라면 좋은 말을 데려왔겠지.”

마침 잘 됐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몰라도, 언제나 최고급만 골라내는 레너드라면 말도 쓸데없이 좋은 말을 데리고 다닐 것이었다. 고작 마차나 끌기에는 아까운 준마겠지. 그 정도라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멍청한 납치범들의 말보다는 빠를 것이다.

눈앞에서 나디아를 빼앗긴 루크는 분노로 보이는 게 없었다.

“그 새끼 어딨어?”

*

그 새끼는 당황스러웠다.

짧지만은 않은 인생에 이토록 당황스러운 적은 처음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일이 언제부터 이렇게 꼬였을까. 랭커스터 남작가의 장남이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자신답지 않게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을 때? 모르는 척 도움을 청했을 때만 도와주는 척을 했으면 되었을 일을, 굳이 나서서 먼저 연락을 했을 때? 혹은 장난삼아 “반했다면 청혼부터 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던 순간부터였을까?

아마도 전부였다.

레너드는 유독 바빴던 오늘을 회상했다.

앤더슨과 대화하느라 (정신적으로)매우 피로했으니 늦은 오후까지 느긋하게 쉬고, 일정을 취소한 김에 평소 자주 찾던 향수 가게를 직접 찾았다. 그는 향수를 특히 좋아하여 이따금 직접 조향을 하기도 했다. 조향사는 그의 취향을 모조리 꿰뚫고 있었고, 좋아하는 향기에 푹 잠겨 쉬다 보면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몽땅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루크를 만난 것이다. 루크인 줄도 몰랐던 남자를 말이다.

앤더슨과 헤어진 직후까지만 해도 레너드는 자신이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영주로서는 뛰어나지만 귀족으로서는 의문인 남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시에 언제나 의심해야 하는 혈연, 기사보다는 전사에 가까우며 개인적인 성격은 사실 단순한 사람, 연애 면으로는 순진하기까지 한 숙맥.

‘그 사이에 사람이 바뀌었을 줄은 몰랐지.’

단순히 외모가 바뀐 것만으로 이다지도 극적인 효과가 날 줄은….

제 외모에 자신이 있는 만큼 레너드는 타인의 외모에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잘생겼다, 보기 좋다, 미남이다 칭송하는 얼굴을 매일같이 보고 있으니 눈이 높아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자의 모친은 황후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빼어난 미모로 유명했고, 자연스럽게 그의 형제 자매도 평균 이상으로 잘생기고 어여뻤다.

그러나 루크는 다르다.

잘생긴 건 부정할 수 없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레너드도 한순간 시선을 빼앗길 만큼 잘 조형된 이목구비였다. 그러나 레너드가 루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수염이 주는 강한 인상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냉랭한 표정과 삭막한 분위기였다.

어쩌면 그의 본질에 가까울지 모르는 분위기.

고작 얼굴을 덮은 털 따위에 현혹되어 있었다. 어쩌면 레너드가 루크를 조금 우습게 보고 있었던 것은 수염이 주는, 도저히 제 또래나 일반인 같지 않은 인상 때문이었을지 몰랐다. 그리 생각하니 루크에 대해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가 없게 됐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스리려 또 저녁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부친에게 잔소리 몇 마디 듣는 것쯤은 감수할 만한 혼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연락을 받은 것이다…….

스테이턴 공작 부인이 명백히 ‘학대’를 받고 있으며, 랭커스터 가는 오는 새벽 급히 수도를 떠날 것이라는 연락을.

앤더슨은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태자에게 결코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았다. 스테이턴 공작이 혹 그들의 행방에 대해 물어온다면 모르는 척만 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은 그에게 긴 감사와 사과가 편지 가득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레너드는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 쉬지도 잠들지도 못했다.

루크가 진정 부인을 학대했는지, 달라진 외모만큼이나 그의 본질도 사실은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달랐는지 알아내야 했다. 진실이라면 제 탓에 불행해진 랭커스터 가를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고, 거짓이나 오해라면? 단순한 해프닝으로 야반도주는 지나쳤다.

혼자 고민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레너드는 직접 랭커스터 가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야수와 맞닥뜨렸다.

*

“헉, 허억….”

턱까지 숨이 차올랐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타고 있던 말은 숲에 들어서자마자 풀어주었다. 오랫동안 교육을 받은 말은 다소 헤매더라도 금방 제게 익숙한 길을 찾아낼 것이다.

‘약속 장소까지 조금만 더 가면….’

누군가에 쫓기고 있다는 감각은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피가 바싹바싹 마르고 신경줄이 닳았다. 등 뒤에서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내장은 움츠러드는데 심장은 지나치게 빨리 뛰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앤더슨은 누군가에게 쫓겨본 적도, 누군가를 피해 도망쳐 본 적도 결단코 없었다.

그는 말을 타고 있었고 추격자는 제 발로 뛰었다. 사람 발이 말의 발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므로 당연히 쫓아올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매우 안일하고 멍청한 생각이었다.

추격자는 금방 앤더슨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한 번은 운 좋게 숨었으나, 운은 두 번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앤더슨이 죽을 것 같아도 멈출 수 없는 이유였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자들은!’

다짜고짜 남의 집에 쳐들어와 놓고서는 도리어 “어떤 새끼들이냐”고 으름장을 놓던 습격자들은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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