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67화 (67/150)

66화

12. 도망인지 납치인지

밤이 깊었다.

랭커스터 저택은 수도에서도 변두리에 속하는 구역에 위치했다. 황궁과는 거리가 멀고 귀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구역도 아니었지만 치안이 좋아 랭커스터 가문처럼 중하위급에 속하는 귀족들과 중산층이 주로 살고 있었다.

랭커스터 남작은 결혼과 동시에 이 저택을 구입했다. 집안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거의 없던 말단 서기관으로서는 퍽 무리한 지출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남작이 무리를 해서라도 저택을 구입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다정하고 유약한 성품의 남작이 명망 높은 백작 가문의 딸을 납치하다시피 하여 결혼해야만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바로 장남 앤더슨이 결혼 전부터 백작 영애의 뱃속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지인에게 돈을 빌려 구입한 저택은 2층짜리의 아담한 저택으로, 삼 남매가 자라는 동안 든든한 요람이 되어 주었다.

루크는 ‘쉽게 넘을 수 있는 담장’과 ‘한 손으로도 부술 수 있을 대문’이라고 표현했으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보안이 허술한 편은 아니었다. 담장도, 대문도 평범한 정도는 됐다.

애초에 경비를 세워놓고 사는 사람은 귀족 중에서도 정적이 많아 언제 암살당할지 모르는 권력자, 누구나 이름을 아는 유서 깊은 대귀족 정도였다. 부유한 귀족이나 재산을 쌓은 중산층이라면 도둑을 경계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랭커스터 저택처럼 조그만 저택에 경비를 세운다면 도리어 눈길을 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고생은 헛수고에 불과했다.

적어도 제이가 보기에는 그랬다.

제이는 저도 모르게 제 주군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가, 급히 눈을 내리깔아 감추었다. 지금은 야심한 밤이었고, 이곳은 사람의 눈이 없었다. 루크가 그를 죽일 리는 없겠지만 죽을 만큼 팰 수는 있었다.

“바람이 차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진중한 표정이 퍽 심각한 분위기를 풍겼다.

루크와 제이는 랭커스터 저택이 내려다보이는 종탑 위에 숨어 있었다. 종탑은 근방에서 가장 높아서 랭커스터 저택만이 아니라 그 주변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제이가 보기에는 안전하기만 한 골목을, 루크는 사냥터를 지키는 개처럼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그림이 되는 게 더 한심하다니.’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 검은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뺨을 할퀴는 바람에도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목표물을 주시한다. 날렵한 턱선과 굳건하게 다물린 입술은 강인해 보였고, 잘 단련된 신체는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긴장되어 있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아름다운 야수처럼.

빈정이 상하지만 종탑 위 야수는 그림이 됐다. 그럼에도 제이의 시선에서는 희미한 한심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건 제이가 충성스럽지 못한 탓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루크를 (일부분)존경했으며, 누구보다 그에게 충성하는 기사이자 보좌관이었다. 다만 지나치게 솔직해 절대 거짓말을 하지도, 자신을 속이지도 못할 뿐이다.

제국의 대귀족, 황족과 가장 가까운 푸른 피? 야수 공작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지금 부인을 스토킹하는 중이었다.

“겨울 초입이니까요. 스테이턴 영지의 겨울에 비하면야 이 정도는 봄 날씨입니다.”

“나디아에게는 춥겠지.”

“…….”

“이불은 잘 덮고 자는 건지….”

“…….”

루크는 저 혼자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눈빛이 아련하기 짝이 없었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그윽한 눈빛…. 이쯤 되자 생존 본능조차 솔직하고 가감없는 눈빛을 감춰주지 못했다.

“각하, 이만 들어가시죠. 직접 안전을 확인하시지 않았습니까.”

“…….”

“설마 이대로 밤새 지키고 계실 생각은 아니시죠?”

“…….”

대답이 없었다. 제이는 답답한 마음에 울컥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솔직히 우리가 제일 수상합니다. 이러다 순찰 도는 경비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일반 경비병에게 은신을 들킬 한심한 새끼에게 흑곰 기사단의 이름은 아깝지.”

“……그러니까 만약 이러고 계시는 걸 부인께서 알게 되기라도 하면?.”

루크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제이를 흘긋 보았다. 성가신 것이라도 보는 듯한 눈길이었다. 제이의 혀에 충언과 욕설이 동시에 올라왔다.

“너희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

“경솔하게 입을 놀릴 만한 사람은….”

너밖에 더 있겠냐는 듯 루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조용하고 서늘한 위협이었다. 제이는 작게 “없죠.”라고 대답했다. 루크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들킬 일도 없겠군.”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랭커스터 저택에 시선을 고정했다.

종탑에서 감시하는 루크와 제이, 저택을 둘러싼 흑곰 기사단의 정예 다섯. 그들의 눈을 피해서는 쥐새끼 한 마리도 이 저택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아니지.’

그 누구도 랭커스터 저택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 이상으로는.

‘꼼짝없이 밤새게 생겼군….’

말려봤자 들어먹을 루크가 아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충언을 건네고 마는 것은 습관이며 고집 같은 거였다. 제이는 포기하고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 지나치게 평화로워 지루하기까지 한 이 골목에서 대체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는 제 곁을 떠난 부인이 아기새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제이의 추측대로였다.

루크는 불만스럽게 랭커스터 저택 주변을 샅샅이 관찰하고 있었다. 처음 랭커스터 저택을 방문했을 때부터 느꼈던 점이었다. 이 저택은 지나치게 허술하고 무방비했다.

‘나디아 그 자체 같군.’

낮은 담과 연약한 대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문제였지만? 고작 종탑 위에서 저택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며, 위협적인 놈들(흑곰 기사단은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충성스러운 기사들이다.)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적어도 경비견 몇 마리는 키워야 하지 않느냐고 루크는 생각했다.

저택 안에는 나디아가 있었다. 그녀를 노리는 불한당(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습격이라도 감행한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지나치게 많았다. 루크는 종탑 위에 앉아 랭커스터 저택을 공략할 방법을 수십 가지나 생각해냈다. 그 어느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제이는 쓸데없는 걱정이며 헛수고라 비난했으나 루크는 이 모든 위협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

루크가 벌떡 일어났다. 제이도 덩달아 긴장하며 기둥에서 등을 떼었다. 느슨하게 풀어져 농담을 주고받았던 순간이 거짓말처럼 그의 주변에는 살벌한 긴장감이 흘렀다.

종탑은 족히 10층은 되는 높이였다. 한눈에 랭커스터 저택이 위치한 거리를 관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아무래도 어둠이 내려앉은 길목을 자세히 살피기는 무리였다. 제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루크가 시선을 고정한 방향을 노려 보았다. 제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각하? ?뭔가 발견하신 겁니까?”

“무언가 움직였다.”

“예? 그게 보입니까?”

“네 녀석 눈은 옹이구멍이냐? 3시 방향, 5시 방향에 잠복한 녀석들에게 알려라, 당장 6시 방향으로 튀어가라고.”

“예? 6시 방향이요?”

6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제이의 뺨을 루크가 한 손으로 콱 움켜쥐었다.

“당장.”

“예, 옙….”

“저택 별관에 몰래 움직이는 자들이 셋, 마구간에서 말이 3필…. 6시 방향에서 마차 두 대가 접근 중이다.”

“그게 다 보입니까?!”

“당장 가지 않으면 직접 던져주겠다.”

“지금 갑니다!”

루크는 빈말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제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땅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해 내리뛰기 시작했다. 이 높이에서 던져졌다가는 목숨은커녕 성한 시체조차 건지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균형을 잡지 못한다면 머리부터 처박히게 되겠지. 솜털이 모두 일어서는 상상이었다.

긴 다리로 두세 칸씩 계단을 미끄러지다시피 내려가던 제이가 문득 멈추었다. 서둘러 가라면서 왜 루크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추어 있는 것인가? 그는 수상한 자를 발견해놓고도 다른 사람들 손에만 맡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다스리는 영지에서도 보호받기는커녕 언제나 최전선을 지키던 사람이다.

특히 지금은 첫사랑에 눈이 멀어 앞뒤 보이는 게 없는 상태…… 과거에도 없던 인내가 생겼을 리 만무했다.

‘잠깐, 그럼 각하는?.’

종탑에서 쓸 만한 무기는 롱보우 정도였다. 루크는 검뿐만 아니라 활도 잘 다루었지만 지금은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순간 제이의 머리에 섬뜩한 가정이 스쳤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각하!”

펄럭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찢어질 듯한 바람 소리와?.

제이는 종탑 끝에 매달려 땅을 내려다보았다.

쿵! 콰지직, 쩍!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시꺼멓고 커다란 사람 그림자가 빠르게 랭커스터 저택의 담을 넘었다. 제이는 루크의 명령도 잊은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괴물, 괴물했더니 정말 인간이길 포기한 건가, 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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