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랭커스터 남작이 장남 앤더슨과 함께 귀가했다. 나디아는 어머니 마리아, 언니 일리야와 나누었던 해후를 그대로 반복해야 했다. 포옹, 인사, 눈물로 이어지는 긴 과정이었다. 겨우 눈물을 그쳤던 마리아와 일리야도 그들을 지켜보며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달래는 데에 두 배 가까운 시간이 들었다.
우는 사람을 달래는 일이 이토록 피로한지 미처 몰랐다. 몸보다 정신이 힘들었다. 나디아는 눈물이 많은 편이었고, 옆 사람이 울면 저도 모르게 함께 우는 타입이었기에 달래주는 쪽의 고충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새삼 제가 울 때에 루크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 것 같았다.
루크는 말솜씨만큼이나 위로에도 재능이 없었다. 나디아가 울면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다 어설프게 팔을 벌려 안아주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것이 나디아에게는 그 어떤 말보다 효과적인 위로가 되었다.
‘얼마나 난감했을까….’
수도에 돌아와 가족들을 만나니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디아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모님도, 앤더슨과 일리야도 눈가가 빨갛고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앤더슨과 일리야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꼴사나운 얼굴이었지만, 나디아를 비롯하여 가족들 모두 울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랭커스터 가족들은 눈물이 유독 많았다.
반면 스테이턴은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자주 울기는커녕 우는 소리를 내는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울면 안 된다기보다 울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루크, 제이는 물론이고 집사 그랜트, 기사단장 게리, 심지어 시녀장 안나까지도 말이다. 왜 울지 않느냐고 물으면 눈물은 눈이 매울 때만 나는 거 아니었냐고 말할 것만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난감했을 것인가? 나디아는 루크의 심정에 공감을 하는 한편, 그의 얼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상하지. 그렇게 커다란 남자가 귀엽게 느껴지다니….’
나디아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예전부터 커다란 남자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좁고 안온한 세계에서 남자란 아버지와 앤더슨, 그리고 막 11살이 된 앤더슨의 아들 펠릭스와 해가 되지 않는 친구 두어 명이 전부였다. 그들은 결코 나디아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들이라 겁을 먹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 친구들이 ‘멋있다’고 속닥거렸던 신사나 기사에게서는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은 그들의 두꺼운 팔뚝이며 단단한 허리, 커다란 키가 멋있다고 감탄하며 비밀스럽게 웃었지만, 나디아는 지나치게 커다란 그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져 무섭기만 했다.
그런데 루크는 든든하고 멋있는데다 귀엽기까지 했다. 물론 나디아의 눈에만 그랬다. 그녀의 눈 중에서도 마음에 달린 눈에만 귀엽게 보였다. 나디아는 시력이 좋은 편이었으므로 객관적으로 루크가 잘생겼을지는 몰라도 ‘귀엽다’고 느낄 만한 부분은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
“?아? 나디아?”
“네?”
상념에 빠져있던 나디아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목소리 끝이 튀어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얘도 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죄송해요. 잠깐 저도 모르게….”
루크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려던 나디아는 어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어머니는 그녀의 입에서 스테이턴 공작 가문에 대한 단어가 나올 때마다 눈물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식사 중에 우시게 할 수는 없지….’
모처럼 가족들이 다 모여 있었다. 랭커스터 저택에서 오래 일을 한 조리장은 나디아의 방문 소식을 듣고서 그녀가 좋아하던 요리만을 내어 저녁 식사를 풍성하게 차려 주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우느라 힘들었던 랭커스터 가족은 평소보다 긴 저녁 식사를 즐겼다.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루크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리라 다짐했었으나 행복해하는 가족들을 보니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또 울어버릴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특히 어머니 마리아는 더 울었다가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앤더슨 오빠는 계속 우울해 보이고….’
가장 침착할 줄 알았던 앤더슨은 나디아를 끌어안고 가장 크게 울었다. 심지어 여전히 어딘가 우울해 보여 자꾸 눈치를 살피게 됐다. 나디아가 제 앞에 놓인 샐러드 접시를 슬그머니 밀어내며 말했다.
“그런데 오빠, 펠릭스는? 그리고 비비안 언니는 왜 안 와?”
“아, 그 둘은… 일이 좀 있어서, 내일 아침에나 올 거야.”
“…그래? 아쉽다. 그리고 언니, 피오나는? 저녁에는 온다고 했잖아.”
나디아의 질문을 받은 일리야가 몰래 앤더슨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는 입가를 닦고, 제 옆으로 밀려온 나디아의 샐러드 접시를 제자리에 돌려놨다.
“……피오나도 마찬가지야. 내일 아침에나 올 수 있대.”
“……그렇구나….”
오랜만에 사랑하는 조카들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나디아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그러나 연락도 없이 급히 온 길이었으므로, 이미 정해져 있던 일정을 그녀 입맛대로 맞추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그녀는 돌아온 샐러드 접시를 우울하게 보다, 달달한 포도주가 담긴 잔을 집어 들었다.
“?음?”
“…왜 그러니?”
어째서인지 일리야의 목소리가 긴장한 듯 날이 선 것 같았다. 나디아는 잔을 입에서 떼고 대답했다.
“아니야, 좀 새콤한 것 같아서.”
“햇포도를 써서 그럴 거란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랭커스터 남작이 말했다.
“내일 아침에 피오나와 펠릭스가 오면 같이 쿠키나 파이를 만드는 게 어떠니?”
“그럴까요? 전 너무 좋아요!”
“애들도 좋아할 거야.”
나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잔을 비웠다. 혀 끝에 남는 단맛이 기분 좋았다.
*
덜컹덜컹덜컹!
루크가 다리로 책상을 부술 듯 쳐대기 시작했다.
쿵쿵 울리는 책상 위에 놓인 펜대와 잉크병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제이는 이 광경이 퍽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본 적이 있는 광경이었다. 나디아가 스테이턴 성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루크가 멍청하게 그녀를 한 달이나 방치하다 겨우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직후….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굉장히 오래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영지를 떠나기 전, 루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실실 웃고 다녔던 걸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멍청이처럼 웃던 얼굴은 꼴보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이 상태로 돌아가길 바라지도 않았다.
제이는 루크의 무릎이 찍어대는 책상이 참나무로 만들어진 물건이길 기도했다. 그렇지 않다면 두드려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콰직!
부서져 버릴 게 틀림없었으니까 말이다.
“……뭐 이렇게 약해.”
“…….”
기어코 책상을 부수고서야 겨우 다리를 멈춘 루크가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오래 되기는 했을 겁니다. 선대부터 쓰셨던 물건이니.”
“낡아 빠진 고물이었군.”
어쩌면 가치 높은 고가구가 되었을지 모를 책상은 한순간에 낡아빠진 고물로 전락했다. 책상이 특별히 약하거나 낡은 건 아니었겠으나 제이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스테이턴 저택은 방치되어 있었던 세월만큼 낡아 있었다.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생기가 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이 저택은 그 긴 시간 죽어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나와 그녀가 데리고 온 하녀들이 부지런히 저택 곳곳을 청소하고 있었지만, 루크의 주장처럼 ‘낡은’ 가구들을 비롯해 손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흑곰 기사단을 데려와서 다행이었지.’
흑곰 기사단을 데리고 온 것은 어디까지나 구색을 갖추기 위함이었으나 힘 좋은 기사들은 여기저기 쓸 데가 많았다. 안나는 그들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는 장난감처럼 적재적소에 이용했다. 제이는 루크의 가라앉은 얼굴을 슬쩍 살폈다.
더는 다리를 떨지 않지만 루크는 무섭도록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이는 그가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괜히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나디아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쭉 저 상태일 것이다. 그로서는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말없이 물러가려는데, 루크가 그를 불렀다.
“제이, 사람을 불러라.”
“네?”
사람이요? 영리한 제이가 드물게도 루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루크가 다소 짜증스러운 투로 덧붙였다.
“데리고 온 녀석들 말이야.”
“?아아.”
기사단을 부르라고 하면 될 일을, 꼭 ‘비밀스럽고 위험한 일’을 해줄 사람을 알아보라는 듯 말할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이번에야말로 주군에게 수도에서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충언을 하게 될까 걱정했던 제이는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명이나 데리고 올까요. 전원은 무리입니다. 안나가 일꾼으로 데려가서….”
“다섯, 아니 여섯 정도면 충분해. 너도 포함해서.”
“저도요? 전….”
“네 녀석도 일단은 기사잖아.”
“…….”
일단을 빼주든지, 기사 취급을 하지 말아주든지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랭커스터 저택에.”
“……각하, 납치는 안 됩니다. 아무리 초조하셔도, 아무리 법적 부부라고 해도 그건 범죄?.”
“누가 납치하겠다고 했나?”
“아니었습니까?”
“……저택 보안이 허술했어. 담도 넘기 딱 좋았고, 대문도 한 손으로 부술 수 있을 것 같더군.”
“…….”
일반인은 처가를 방문하며 그런 생각은 안 한다는 상식을 알려주어야 할까. 제이가 보기에 랭커스터 저택은 아담하지만 일반적인 보안은 전혀 문제가 없는 집이었다. 루크가 보기에는 종잇장 같아도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견고한 돌벽이었으니 말이다.
“나디아가 묵는데 조그만 위험 요소도 있어서는 안 돼.”
“……근처 경비를 돌면 됩니까? 부인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
“조를 짜서 랭커스터 저택을 경호하겠습니다. 3시간마다 보고를 드릴 테니….”
“아니, 됐다.”
루크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무릎에서 가련한 책상의 잔해가 부스스 떨어졌다. 제이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조각을 보며 제발 그가 다음 말을 잇지 않길 바랐다. 불길했다.
“나도 갈 거니까.”
이럴 줄 알았다.